<50화>
“리시안과 가족이 될 생각 없어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조심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리시안셔스는 단호하다 못해 차가운 목소리에 당황한 듯했다.
“내가 너의 진짜 가족을 대체하겠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니…….”
“리시안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란 건 알아요.”
계모나 계부를 받아들이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심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전 리시안셔스를 제 오라버니나 아버지처럼 생각한 적 없어요.”
“나도 널 진짜 딸로 생각한 적은 없어.”
“하지만 그 비슷한 느낌으로 절 대하긴 하잖아요.”
지금 제게 가족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리시안셔스일 테지만, 만약 리시안셔스가 자신과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같이 여기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스위트피는 그런 관계를 바라지 않았다.
“그럼 말해 봐. 내가 널 어떻게 대해 줬으면 좋겠는지.”
그리고 자신을 마냥 어린아이처럼 여기는 리시안셔스와의 관계를 바꾸려면 바로 지금이어야 했다.
“저는…….”
왜냐하면, 지금이 아니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을 거 같으니까. 스위트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쳤다.
“리시안을 좋아해요!”
‘좋아해요’라는 말이 공기를 타고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스윗.”
스위트피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건만…….
“나도 널 좋아하고 있어.”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내뱉은 좋아한다는 말의 무게를 가볍게 받아들였다.
“넌 시끄럽지만 그만큼 유쾌하고,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아이니까.”
“전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여기서 지나치게 감정 조절을 못 하면 더더욱 어린아이 취급당할 것이 분명했다. 스위트피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뺨은 부끄러움에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리시안에게 마냥 어린애로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제야 리시안셔스의 표정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리려는 거 같기도 하고, 황당해하는 거 같기도 한 애매한 표정이었다. 어떤 감정을 의미하는 표정인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호자 말고…….”
목소리가 끝내 작아지기는 했으나, 스위트피는 결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오늘따라 고요해진 밤바람이 더욱 춥게 느껴졌다.
“절 여자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리시안셔스에게서 오랫동안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불안함과 초조함에 견디지 못한 스위트피가 먼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주한 리시안셔스의 표정에 스위트피는 이미 그가 할 대답을 알아 버렸다.
“스위트피.”
“…….”
“네 나이대의 인간은 이성에게 관심이 많고 한창 끌릴 때라고 하더군.”
스위트피가 정말로 비참한 것은, 그가 자신을 거절하려고 한다는 단순한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물론 거절당하는 것도 속상하지만, 그보다 스위트피를 더 비참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한데, 네 주변에 있는 수컷이라고 할 만한 남자는 나밖에 없으니…….”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안쓰러워하고 있었다.
“서로 아무 감정이 없어도 ‘반려’라는 이름으로 묶였으니, 너도 그런 식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다 안다는 식의 말투가 스위트피의 감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스윗.”
스위트피는 뒷걸음치고 싶었으나 먼저 다가온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뺨을 감쌌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
“넌 아직 어리니, 충분히 감정을 혼동할 수 있어.”
정말로……, 보호자로서 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스위트피는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스윗, 스위트피.”
리시안셔스는 아예 얼굴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여 버린 스위트피를 보며, 안타까움에 혀를 찰 뻔했다. 이제야 가끔 제게 보이던 스위트피의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예고 없이 가까이 다가가면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서던 것도,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얼굴을 붉히던 것까지. 인간들의 기준으로 이제 성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리시안셔스의 기준에서는 아직 본인에게 주어진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한 아이였다. 신께서 쓸데없이 ‘반려’라는 이름으로 묶어 놨으니, 그런 방향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대한 스위트피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달래 보고 싶었다. 고개를 숙인 스위트피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 무릎을 굽히려고 할 때였다.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흔히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에 빠지거나 설렐 때 느끼는 심장 박동은 아니었다.
심장이 쿵, 쿵, 쿵, 울리는 것과 동시에 몸이 뜨거워졌다. 몸속에 닫혀 있던 커다란 문이 열리고 있었다.
“리시안이 절 어린애 취급만 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소리 없이 가쁜 호흡을 내쉬는 리시안셔스의 귀에, 여전히 고개를 숙인 스위트피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제 마음을 멋대로 정의 내리지 말아요.”
“…….”
“리시안이 어떻게 생각하든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스위트피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다시 당돌하게 말했다.
“좋아해요.”
또 한 번의 좋아한다는 고백이 기폭제가 되었다.
“……리시안?”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부여잡은 리시안셔스를 발견한 스위트피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풀썩,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리시안!”
스위트피는 놀라 리시안셔스에게 달려갔지만, 리시안셔스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눈을 감은 상태였다.
“리, 리시안……. 리시안셔스!”
눈을 감은 리시안셔스의 미간은 깊게 패 있었고, 얼굴과 목에는 땀이 가득했다. 처음으로 인간처럼 쓰러진 리시안셔스를 보며 스위트피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디에고와 전투 중에 환각에 빠졌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병에 앓아누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무방비하고 연약한 모습이었다.
“리시안! 제발 눈 좀 떠 봐요!”
리시안셔스의 머리를 끌어안은 스위트피는 애타게 그를 깨웠으나, 리시안셔스는 눈을 뜨지 못했다.
리시안셔스는 꿈을 꾸는 중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꿈을 꾼 적은 없었으나 이게 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꿈을 꾸지는 못해도 꿈을 보여 준 적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거대한 어둠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양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이 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물쇠가 걸려 있는 이 문 안에는 봉인된 자신의 힘이 있었다.
힘이 봉인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고린도가 뽑혀 나갔을 때, 차례대로 봉인될 드래곤들 중 가장 첫 번째로 봉인되길 선택했을 때. 그때 리시안셔스는 고린도 말고도 또 다른 힘을 잃었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고린도는 빼앗긴 것이지만 그것은 제 안에 잠겨 있다는 것이었다. 리시안셔스뿐만 아니라 모든 드래곤들이 봉인되며 몸속 깊숙한 곳에 봉인해 둔 것이었다.
「리시안을 좋아해요!」
눈앞에 있는 거대한 문이 아니라면 어디가 앞과 뒤고, 하늘과 땅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완전한 어둠 속에서 스위트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아해요.」
울음기가 섞여 있던 목소리가 가장 순수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꺼내던 순간을 떠올리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순수한 고백이 열쇠였다. 고백하는 스위트피의 목소리가 신에 의해 잠겨 있던 봉인을 풀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문의 자물쇠가 열리며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와 동시에 돌아온 힘이 혈관을 타고 몸속에 퍼지기 시작했다.
* * *
“리시안……? 리시안!”
어둠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그것이 눈을 뜨려는 자신의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스위트피의 짧은 머리카락이었다는 것은, 완전히 눈을 뜬 다음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스윗……?”
부르기 시작한 지 오래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보다 입에 잘 붙는 애칭으로 스위트피를 부른 리시안셔스는 곧바로 자신이 쓰러지기 전, 들었던 고백을 떠올렸다. 먼저 그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는 척해줘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몸에 닿아있는 스위트피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는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꼬마 반려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잘못된 줄 알고 두려워했던 건가.
“리, 리시안. 저 너무…….”
리시안셔스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너무 추워요…….”
“…….”
“옷 좀 벗어 주면 안 될까요?”
그러나 뭉클하던 감정은 잠시뿐이었다. 스위트피는 계속해서 리시안셔스의 겉옷 끝을 잡아당겼다. 어서 벗어 달라는 뜻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자신 때문에 밤공기에 오래 노출되었으니, 추울 만도 했다. 리시안셔스는 서둘러 옷을 벗어 스위트피의 어깨 위에 걸쳐 줬다.
“왜 여기에서 쓰러지고 그래요! 저는 리시안을 데리고 이동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쓰러졌는데도 반려에게 걱정을 받기는커녕, 타박이나 듣고. 내 신세도 참 처량하군.”
“어차피 절 진짜 반려라고 생각하지도 않잖아요.”
스위트피의 마지막 말에 리시안셔스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에 스위트피는 제게 고백을 한 상태였기에, 애써 얘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했다.
“아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얘기였다. 리시안셔스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려고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