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49화 (49/120)

<49화>

“로, 로렌 양?”

스위트피는 조용히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소리는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제 뜻대로 막을 수 없었다.

“왜, 왜 울고 그러십니까? 제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헤이든은 허둥거리며 스위트피에게 손을 뻗었지만, 스위트피는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로, 로렌 양……. 왜 우는진 알려 주셔야죠. 그래야 제가 사과를 할 거 아닙니까? 혹시 제 고백이 너무 감동적이라 그런 거라면 우는 대신에 입맞춤으로 화답해 주셔도 됩니다!”

이번에도 스위트피는 다가오려는 헤이든을 피해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헤이든은 세 발자국 다가오며 입을 가린 채 도리질만 치는 스위트피의 두 팔을 붙잡았다.

“로렌 양, 으악!”

헤이든이 막 스위트피를 불렀을 때였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공중에 들어 올려졌다. 그러고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헤이든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그제야 눈물을 닦아 낸 스위트피가 겨우 선명해진 시야로 발견한 것은 어느새 제 옆에 다가와 서 있던 리시안셔스였다.

“리, 리시안!”

“제 또래의 인간과 함께 있을 기회가 필요한 거 같아 자리를 내주었건만…….”

“…….”

“감히…….”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분노에 차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전에 디에고가 자신을 납치했었을 때도 리시안셔스는 화가 난 상태이긴 했지만 이만큼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인간을 상대로 리시안셔스가 이렇게까지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경우는 아예 없었기 때문에, 스위트피도 당황했다.

“리시안! 저분이 절 울린 게 아니에요! 저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비켜. 더 화나게 하지 말고.”

아무래도 리시안셔스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았다.

‘리시안이 뭘 봤길래 저렇게 화가 난 거지?’

내가 울고 있기는 했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닐 텐데.

“고작 제가 운 거 가지고 일을 크게 만들지 말아요!”

“……고작?”

헤이든에게 가려던 리시안셔스의 걸음이 멈췄다.

“고작이라고 했나, 지금?”

“…….”

리시안셔스는 이번엔 헤이든에 이어 스위트피에게도 화가 났다.

“너는 이날까지 내가 돌보고 키웠어.”

“…….”

“내게 건방지게 굴어도 작고 연약해서 마냥 봐주며 키웠는데, 고작 저런 별 볼 일 없는 인간 수컷이 내 꼬마에게……!”

“헤이든이 못생겨서 울었어요!”

어떻게든 리시안셔스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침착하게 들어줄 거 같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의 분노에 찬물을 끼얹어 줄 필요가 있었다.

확실히, 헤이든에게는 잔인했을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당장 헤이든의 숨통을 끊어 놔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던 리시안셔스의 움직임을 우뚝, 멈춰 세우기엔 충분했으니 말이다.

“뭐라고?”

리시안셔스도 황당했던지, 스위트피에게 되물었다.

“너무…… 모, 못생긴 남자가 고백을 해서…….”

“…….”

“내가 못생겨서 저런 남자가 고백을 했다고 생각하니까…….”

“…….”

“눈물이 난 거뿐이었어요!”

그 황당한 이유는 리시안셔스의 분노를 식히기에 충분했다.

“저 인간 수컷이 널 해치지 않았다고?”

“네.”

“널 강제로 추행한 일은?”

“없었어요.”

“네게 모욕을 주는 말은?”

“헤이든 모러 씨는 제게 무례하지 않았어요.”

“정말로……, 저 수컷이 못생겨서 울었다고?”

“……그렇다니까요.”

헤이든 모러를 향한 리시안셔스의 분노가 미약한 연민으로 바뀌는 것은 금세였다.

“그나저나, 리시안.”

리시안셔스가 진정하고 나자 그제야 스위트피도 조심스럽게 이 사태에 대한 걱정을 전했다.

“헤이든 모러 씨는 귀족인데, 지금 귀족을 해친 건 다름 아니라 리시안과 저예요.”

“엄밀히 따지면 네가 아니라 나 혼자 한 일이지.”

“아무튼 자칫 잘못하면 일이 커질 수도 있단 말이에요.”

다행히 헤이든 모러는 지금 겁에 질려 당장 사람을 불러올 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어쨌든 조용히 넘어가기는 힘든 일이었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발등을 밟고 올라섰다. 그 뜻을 알아챈 리시안셔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윽고 헤이든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드래곤으로 변했다. 자신의 저택 정원에서 사람이 드래곤으로 변하더니, 첫눈에 반했던 여인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드, 드, 드……, 드래곤이다!”

헤이든이 하늘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지만 이미 저택 안에서 시끄러운 연주 소리와 함께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닿지 못했다.

리시안셔스의 발등에 앉은 스위트피는 멀리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마을의 시계탑이 정각 12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오늘로써 스위트피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리시안, 저……!”

리시안셔스에게 자신도 이제 성인이라는 것을 얘기하려던 때였다.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 꼬마야.』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하면서 여전히 자신을 ‘꼬마’라고 부르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에 스위트피는 조금 들뜨려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리시안셔스는 분노가 가라앉은 거겠지만 자신은 좋아지려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이니, 지금 이 상황은 리시안셔스가 제게 잘못한 상황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인적이 드문 언덕에 도착한 리시안셔스가 하강해서 스위트피를 무사히 내려 주고는 그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내 꼬마 반려님이 왜 또 토라졌을까.”

발등에서 내려오자마자 뒤돌아선 스위트피의 뒷모습을 보며 리시안셔스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짓궂게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반면에 스위트피는 마주 보고 웃어 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전 꼬마가 아니에요. 이렇게 큰 꼬마가 어디 있어요?”

“내 눈에는 여전히 땅딸막한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스위트피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만들었다.

“리시안도 알겠지만 전 이제 성년이 다 되었다구요.”

“네가 성년이 된 것과 여전히 꼬마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제가 진짜 화를 내야 그만 놀릴 거예요?”

“놀린 건 아니지만, 성내지 마.”

스위트피가 정말로 화를 내겠다는 엄포를 놓자, 그제야 리시안셔스가 항복의 표시로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아쉽기는 해.”

“뭐가요?”

이미 기분이 상한 터라 목소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나자, 리시안셔스가 부르는 ‘꼬마’라는 단어 자체가 왜 기분이 나쁜지에 대해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이 싫었던 이유는 자신이 그의 옆에서 이성으로 느껴질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한테는 ‘꼬마’라는 말이 널 향한 애칭이나 다름없었는데…….”

그 꼬마라는 말이 리시안셔스의 나름대로는 애칭이었다고 하니, 이걸 기분 좋아해야 하는 건지 잘 구분이 가지 않을 때였다.

“네가 싫다고 하니, 별수 없지. 다르게 불러 줄 수밖에.”

“어떻게요?”

허리를 낮게 숙인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와 눈을 맞췄다.

“스윗.”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애칭이었다. 스위트피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왜, 그렇게……. 싫다고 했었잖아요! 애칭으로 부르는 걸 부담스러워했던 거 같았는데, 아니었어요?”

“생각을 해 보니 ‘꼬마’라는 말도 내 나름의 애칭이었으니, 다른 단어로 대체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거 같아서.”

‘스윗’이라는 애칭은 스위트피가 그간 리시안셔스에게 그렇게 불러 달라고 졸랐으나, 그가 절대 들어주지 않던 것이었다.

“이제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불릴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울 일이 아닌데, 괜히 울컥했다. 새삼스럽게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고, 리시안셔스의 다정함이 서러웠다.

“가족이 불러 주던 애칭이라며.”

지나치게 감동받은 것이라 여긴 건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눈꼬리에 살짝 맺힌 눈물을 가볍게 닦아 주며 작게 웃었다.

“우리는 피도 안 섞였고, 난 너 같은 딸을 가질 생각은 없지만.”

괜히 짓궂은 말을 하는 것도 빼먹지 않은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너의 보호자 역할을 맡고 있고, 늘 함께하고 있으니…….”

“…….”

“이런 관계도 나름 가족이라면 가족이겠지.”

담백하고 자상한 언어 속에서 스위트피는 잠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남들의 눈에는 나와 리시안셔스의 관계가 어떻게 보일까?’

이제 성장한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의 외적인 나이 차이는 얼마 나 보이지 않았다.

「제 누이가 말하기를, 그 남자는 로렌 양을 연인보다는 보호자처럼 대하는 거 같다고 해서요.」

모러 가문의 헤이든과 트리사도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의 관계를 연인으로 보지는 않았다.

「혹시 남매 사이인데, 예쁜 여동생에게 하도 남자들이 들이대서 그런 거짓말을 하신 걸까요?」

하지만 그런 오해를 한 것이 모러 남매뿐만은 아니었다.

「보통 다른 남매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기 마련인데. 여기는 오라버니가 자상해서 그런가? 아가씨랑 사이가 좋아 보이네.」

전에 머물던 마을에서 여관 주인이 한 말이었다. 아가씨라고 불릴 만큼 성장한 스위트피였지만, 낯선 사람들도 대부분 리시안셔스를 스위트피의 보호자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리시안셔스조차도 본인을 자신의 보호자로 생각했다.

“리시안, 저는…….”

이대로는 싫다. 남들이 보는 시선은 상관없지만 리시안셔스마저 자신과의 관계를 그렇게만 정의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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