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있나요?”
내내 리시안셔스의 건방진 행태를, 그의 외모가 마음에 든 탓에 꾹꾹 억눌러 참고 있던 트리사는 지금 리시안셔스의 행동이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동시에 조금 화가 나려고도 했다. 이 몸이 이렇게까지 맞춰 주고 있는데, 겉모습을 제외하면 뭐가 그리 잘났다고 이렇게까지 꼿꼿하단 말인가.
“드래곤은 영생을 살진 않아. 인간이 보기에는 영생처럼 보일 만큼 수명이 긴 것일 뿐.”
“네……?”
“그리고 ‘환생’이라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든 개념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
제 할 말만 끝낸 리시안셔스가 미련 없이 돌아서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이봐요!”
결국 자존심이 상할 만큼 상한 트리사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을 파티에 초대해 주고 이렇게 과분한 대접을 해 줬으면 최소한의 예의와 성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문 앞에 선 리시안셔스의 뒤를 쫓아온 트리사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어디까지 참아 줘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트리사를 등지고 있던 리시안셔스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트리사는 더 이상 자존심 구겨 가며 참지 않을 생각으로 그의 눈을 마주 보려 고개를 들었다.
“…….”
그러나 그의 한쪽 금안과 눈이 마주친 트리사는 숨이 덜컥,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는 반응이 딱딱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하기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지금 그에게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제 취향인 수컷과 밤을 보낼 생각으로 정성을 쏟은 것을 일방적인 호의를 베푼 걸로 착각하지 말았으면 해.”
“흐으…….”
“욕망에 솔직한 인간은 인정해 줄 수 있지만, 포장된 욕망은 썩은 내만 풍길 뿐이야.”
“…….”
“알아듣겠지?”
아이를 타이르듯이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트리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녀를 압박하던 무거운 공기가 가셨다.
“그리고 하나 더.”
방문을 살짝 연 리시안셔스가 나가기 직전, 한마디를 더 남겼다.
“내 반려가 얘기를 해 줬는데도 꾸역꾸역 내 애칭을 부르더군.”
“…….”
“잘 지내시길, 모러 양.”
대놓고 나무라는 말투는 아니었으나 애칭을 부른 점을 지적하고서는 트리사를 ‘모러 양’이라고 부른 것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그러나 트리사는 따라가서 따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까 리시안셔스가 내뿜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압감의 공포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트리사는 닫힌 방문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몸을 떨어야 했다.
* * *
“그, 저기, 뭐라고 해야 할까…….”
타인의 진심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 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본 적이 없던 스위트피는 부담스러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얘기해 준 헤이든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제 생각에는요…….”
스위트피의 대답을 기다리는 헤이든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모러 씨가…….”
“헤이든이라 불러 주세요. 로렌 양에게는 제 이름을 허락하고 싶습니다!”
“……헤이든 씨가 절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신 게 이해가 잘 안 가요. 첫눈에 반한다는 게 저는 납득이 안 가서요. 친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착각하고 계신 건 아닐까요?”
애써 빙빙 돌려서 얘기하고 있지만 지금 스위트피가 하고 싶은 말의 참뜻은 이러했다. 너의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으니까, 자존심 상하지 않게 서로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이 고백은 없었던 걸로 하자.
하지만 너무 빙빙 돌려서 말한 탓일까.
“친구가 되고 싶은 감정과 연인이 되고 싶은 감정은 서로 착각할 수가 없습니다, 로렌 양.”
헤이든은 고백을 없었던 일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힘주어서 다시 고백했다.
“저는 로렌 양을 좋아하는 게 맞아요. 제 마음을 믿어 주십시오!”
이쯤 되니, 스위트피도 헤이든이 신기하면서도 의아했다.
“어떻게 본인의 마음에 그렇게 확신을 가지시는 건데요?”
마음이란 것은 시각적으로 눈앞에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감정을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스위트피도 알고 싶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좋아한다는 감정에 확신이 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기분이 들었을 때 상대방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그야 로렌 양을 보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세상이 멈춘 거 같았으니까요!”
스위트피는 자신도 모르게 리시안셔스를 떠올렸다.
‘내가 리시안을 봤을 때, 세상이 멈춘 거 같다고 느낀 적이 있었나?’
약간의 고민 끝에 답을 내렸다. 리시안셔스의 얼굴이 예뻐서 잠깐 넋 놓고 본 적이 드물게 몇 번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멈춘 거 같은 착각을 느낀 적은 없었다. 머릿속에서 그렇게 답이 나오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그게 다예요?”
“무, 물론 그게 다가 아니죠!”
허무해하는 스위트피의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난 것일까. 크리스는 오기가 생긴 것처럼 더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감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내게 달콤한 말을 속삭여 주면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면서도 너무 설레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런데 전, 헤이든 씨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인 적이 없는데요?”
“크흠, 제가 전 연인과 사랑했을 때의 일입니다. 물론 지금 제 마음은 로렌 양의 것이지만요!”
“……그러시군요.”
내게 달콤한 말을 속삭여 주었을 때?
‘아주 가끔 비슷한 기분을 느낀 거 같기도 하고.’
생각을 해 보면, 리시안셔스가 먼저 모러 남매의 앞에서 자신의 반려라고 본인을 소개했을 때 헤이든이 말한 기분을 느낀 거 같기도 했다. 그때는 지나치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서 버겁다고만 느껴졌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싫지 않았던 거 같다.
……사실은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마차 안에서 이곳에 있는 귀족들 중에 자신이 가장 완벽해 보인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기뻐서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친밀하게 접촉하게 되거나, 유독 그 상대가 아름다워 보일 때면 건강에 해로울 정도로 심장이 빨리 뛰기도 하죠. 그리고 지금처럼 제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요. 로렌 양에게 고백하느라 부끄러워서 빨개진 제 얼굴 보이시죠?”
“…….”
“그리고 또 상대방이 다른 이성과 가까워 보이면 질투가 샘솟기도 합니다. 제가 로렌 양의 반려라는 남자를 봤을 때 얼마나 괴로웠다고요!”
상대방이 다른 이성과 가까워 보일 때는 질투가 난다고. 머릿속에는 저절로 트리사와 함께 있던 리시안셔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도 트리사에게 벽을 치지 않는 리시안셔스에게 괜히 심술이 돋아 헤이든과 함께 나온 것이었다. 이런 자신의 심술을 리시안셔스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오히려 자신이 헤이든 모러를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안 되는데!’
자신이 헤이든을 좋아한다고 리시안셔스가 착각하는 건 정말 싫었다. 그런데, 내가 왜 헤이든 모러의 얘기를 들으면서 리시안셔스를 자꾸 대입해 보는 거지?
‘마치 내가 리시안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스스로 의문을 떠올리고, 알아서 답을 내린 순간이었다.
‘내가 리시안을 좋아한다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 지금 다시 묻겠습니다. 그 남자는 로렌 양의 반려가 아니죠?”
옆에서 헤이든 모러가 하는 말이 들리기는 했으나, 답을 해 줄 여유까지는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스위트피는 제 감정을 부정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아무리 부정해 봤자, 이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미 리시안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떠올린 이상, 돌이키기에는 늦었다는 걸.
어쩌면 내심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계속 헤이든에게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물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 누이가 말하기를, 그 남자는 로렌 양을 연인보다는 보호자처럼 대하는 거 같다고 해서요.”
리시안은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좋아한다는 감정을 깨달아 버리면,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러워질 테니까.
“거기다가 그 남자도 제 누이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던데요? 연인이라면 로렌 양을 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놔두고, 다른 여자와 함께 있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
“혹시 남매 사이인데, 예쁜 여동생에게 하도 남자들이 들이대서 그런 거짓말을 하신 걸까요?”
남들의 눈에는 저렇게 보이는구나. 남매로 오해할 만큼, 나를 보는 리시안의 시선에는 이성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는 거야.
‘어쩌면 리시안은 지금 나 따위는 떠올리지도 않고 트리사 모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지금 헤이든 모러에게 원치 않는 고백을 받아서 짜증 나는데. 결국 리시안을 향한 감정을 깨닫고 말아서 너무 서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