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덕분에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가는 거 같아요.”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로렌 양 덕분에 즐거운걸요.”
“제가 모러 씨가 아니면 언제 이런 큰 파티에 와 보겠어요. 떠나기 직전에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감사할 필요 없……, 네?”
설레는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 가던 헤이든은 갑작스러운 얘기에 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떠, 떠난다고요? 언제, 왜요? 이렇게 갑자기요?”
“갑자기가 아니에요. 리시안과 저는 원래 한곳에 정착하며 살진 못하거든요. 아마 내일 당장 떠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정확한 기간을 두지 않는 편이라서…….”
봄바람의 훈풍을 맞는 것처럼 기분 좋은 상태이던 헤이든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직 스위트피와 가까워질 시간이 좀 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한부의 관계였다니.
내일 당장 떠날 수도 있다고?
그 말은 어쩌면, 그에게 남은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는 것일 수도 있다. 다급해진 헤이든이 스위트피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까, 로렌 양?”
스위트피는 갑자기 자신의 두 손을 붙잡은 헤이든 때문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실은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
“좀 더 가까워진 다음에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헤이든 모러가 얼굴을 귀끝까지 물들인 채 거의 감정을 토해 내듯이 외쳤다.
“저, 로렌 양을 좋아합니다!”
‘좋아합니다’란 말이 정원 안에 울렸다. 예상치 못한 폭탄 고백에 당황한 스위트피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정원에는 자신과 헤이든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은 없는 거 같았다.
“죄송한데……, 언제 봤다고 저를 좋아하신다는 거예요?”
“서점에서 당신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습니다!”
“…….”
“사랑에 빠지는 일에 이유와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로렌 양이 당황하고 계신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는데, 내일 당장 떠나실지도 모른다고 해서…….”
리시안셔스를 제외하면 다른 이성과 대화를 나눌 일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스위트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고백이었다. 당연한 거절조차 어떻게 얘길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새끼를 키우는 부모가 되는 체험은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벽마다 그려진 태피스트리와 조각가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 만큼 화려한 기둥 장식에도 불구하고 리시안셔스의 모든 신경은 제 눈앞에 없는 스위트피에게 향해 있었다.
시기마다 조금씩 형태는 달라도 인간들이 사는 모습은 대개 비슷했다. 자기들끼리 서열을 정했고, 높은 서열에 해당하는 자는 그 아래에 속해 있는 자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부유함을 뽐내고는 했다.
긴 시간을 살아온 그는 오래전 신으로 떠받들어지며, 인간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자가 누리는 모든 것을 가져 본 적도 있었다. 스위트피는 이러한 화려한 풍경에 주눅이 든 듯했지만 사실 생각보다 별 가치 없는 것들이란 것을 아는 리시안셔스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물론 자신을 데리고 사람이 없는 곳까지 데려와 노골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내는 트리사에게도 관심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저희 영지에서 난 포도로 담근 와인이에요. 입맛에 맞나요?”
인간의 음식은 먹을 수도 있지만, 먹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인간의 음식을 맛보는 거에 큰 즐거움을 느끼는 드래곤도 있었지만 리시안셔스는 음식을 섭취하는 일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부류였다.
트리사가 건네준 와인 잔을 무심하게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트리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름답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자신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구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아니지. 단호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으니까.
“이제 리시안의 얘기를 해 봐요. 전에 로렌 양의 반려라고 했던 말은 사실이 아니죠?”
리시안셔스가 트리사에게 관심을 가진 건 그녀가 스위트피에 관한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로렌 양과 리시안은 누가 보더라도 연인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헤이든과 로렌 양을 밀어주는 거잖아요.”
어제 트리사 모러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겁도 없이 모르는 남자의 귓가에 대고 큰 비밀을 얘기하듯이 속삭인 말이 있었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파티에 오기 싫어하는 숙녀는 없어요. ‘괜찮다’는 말은 기회를 잡을 용기가 없어서 하는 말뿐인 거절이죠.」
트리사가 뭐라고 말하건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나 애석하게도 리시안셔스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특히나 한참 예민하고 종잡을 수 없는 그 나이대의 스위트피를 이해하려면 조금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리시안셔스가 나름 스위트피를 관찰하며 얻어 낸 결론은, 이제 다 자란 스위트피가 그 나이대의 인간답게 이성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어쩌면 이 여자의 말대로 내심 파티에 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착각일 수도.’
홀에 처음 들어섰을 때 에이든인지 헤이단인지 하는 인간 남자에 대해 얘기하는 스위트피의 반응도 썩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려고 하는 듯한 모습은 아닌 거 같았다. 수줍음을 탄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좋아하는 상대를 숨길 이유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럼 이성으로서 작은 관심 한 톨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인간 수컷에게 자신이 스위트피의 반려라고 소개했을 때, 상대가 결혼한 줄 오해하자 격하게 반응하며 부정하던 스위트피의 반응은 뭐란 말인가.
마치 모욕적인 오해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까지 붉히던 스위트피의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금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인간, 특히나 아직은 어린 축에 드는 여자의 마음은 그로서는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워서일까. 때때로 스위트피가 내보이는 어떤 반응들은 리시안셔스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고는 했다. 그 인간 수컷을 좋아한 게 아니라면, 자신과의 결혼을 그렇게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외모에 이렇다 할 감상을 느낀 적은 없으나, 인간들이 자신의 외모에 쉽게 호감을 느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껍데기만 봤을 때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저한테 할 말이 하나도 없나요, 리시안?”
“난 그 아이의 반려가 맞아.”
계속 대답이 없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에 결국 자존심이 상한 트리사가 한마디 하려고 할 때였다.
“내 반려가 되지 않았다면 그 아이도 인생의 선택지가 지금보다는 많았겠지.”
리시안셔스는 애써 스위트피에 대한 생각을 끊어 내고 옆에서 끈덕지게 굴던 트리사에게 대답을 해 줬다. 어쨌든 초대된 손님으로서의 적절한 예의는 필요한 법이었다. 설사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해도, 인간의 시늉을 하고 있는 한 그들의 규칙을 따를 필요가 있었다.
“아……. 그렇군요, 부모님이 정한 인연인가요? 로렌 양과는 어떻게…….”
“그보다, 드래곤에 관심이 많나 보군.”
의도적으로 트리사의 말을 끊어 낸 리시안셔스가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드래곤 신화와 드래곤과 관련된 책들을 둘러보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이 여자와 제 꼬마 반려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친절함을 가장해도 속으로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헤이든이 어릴 적부터 드래곤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실제 드래곤의 존재를 알게 되고서는 더욱 드래곤의 존재에 심취해 있는 상태거든요.”
계속 스위트피 로렌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트리사는 기꺼운 마음으로 새로운 대화 주제에 임했다.
“드래곤의 정통 신화부터, 드래곤과 관련된 창작물까지……. 모을 수 있는 정보는 전부 다 모으더라고요.”
하지만 열심히 대화를 이끄는 트리사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리시안셔스의 생각 한편에는 스위트피에 관련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쯤 자신의 꼬마는 헤일리인지, 에이스인지 하는 그 수컷 남자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스위트피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인간 수컷은 확실히 제 꼬마에게 관심이 넘쳐 보였는데…….
“그래도 그렇지. 가끔은 너무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읽는 거 같을 때도 있어요. 드래곤마다 가지고 있는 힘이 다르다거나…….”
설마 벌써 고백하진 않겠지? 둘만 있는 틈을 노려 스위트피에게 손을 대려는 건…….
“아, 그래. 영생을 사는 드래곤이 죽었다가 환생한 연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너무 우습지 않나요?”
“…….”
“리시안……?”
소파에 반쯤 기대어 누워 있던 리시안셔스가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