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46화 (46/120)

<46화>

그건 어떤 의미로 한 말이에요?

그 질문이 하고 싶었지만 부끄럽고 대답을 들었다가 실망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마부가 결국 다시 한번 문을 당겼다. 리시안셔스도 이번에는 문이 열리게 놔두는 대신 스위트피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게 손을 내민 리시안셔스의 눈을 봤다가 시선을 황급히 내린 스위트피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네가 가장 완벽하다는 그 말이 귓가에 메아리치고, 가슴 속에 간지럽게 불어왔다.

홀로 들어서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의 옆에 선 스위트피가 괜히 볼멘소리로 물었다.

“이런 파티에 자주 왔었어요?”

“그럴 리가.”

리시안셔스는 긴 시간 잠들어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많이 와 본 거 같은데…….”

“자주는 아니지만 과거에 이런 인간들의 모임에는 몇 번 온 적이 있었지.”

“그렇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잖아요.”

“시대가 달라져 풍습이 조금씩은 다르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인간들의 큰 틀은 같으니까.”

입고 있는 옷과 저택의 인테리어, 신분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바뀌어도 큰 틀은 같았다. 신분이 높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부를 과시하는 모임. 리시안셔스에게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곳은 리시안의 취향이 아닐 거 같은데, 저 때문에 온 거예요?”

너무 당연한 말에 리시안셔스는 잠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무렴, 내가 인간들의 파티가 궁금해서 왔을까.”

“왜 제가 파티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요?”

테이블 위에 있던 간식거리를 우아한 손짓으로 집은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입 안에 음식을 넣어 줬다. 얼떨결에 입 안에 가득 찬 달콤한 디저트를 우물거리는 스위트피를 내려다보며 리시안셔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 인간 남자.”

“네……?”

“이름이 뭐더라. 에이단이었던가?”

“헤이든 모러라고 했어요.”

“그래, 이름이 뭐든 간에 네게 껄떡거리던 그 수컷 말이다.”

“헤이든이 왜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헤이든을 언급하며 스위트피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리시안셔스의 얼굴은 흡사 결혼을 앞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처럼 보인 탓이었다.

“넌 그 남자를 좋아하잖아.”

쿨럭!

불안함은 현실이 되어 스위트피를 덮쳐 왔다. 입 안에 있던 디저트를 급하게 삼킨 스위트피는 사레 때문에 연신 콜록거렸다. 리시안셔스가 차분하지만 빠른 동작으로 유리잔에 든 음료를 건넸다.

“제, 제가…… 헤이든을요?”

“아직 그 정도의 감정은 아닌가?”

“그 이하의 감정도 아니에요!”

잔 안에 든 음료는 스위트피가 좋아하는 단맛이 강하게 났지만, 방금 마신 음료의 맛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리시안셔스가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제가 왜 부끄러워해요?”

“오히려 그동안 지나치게 이성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일 뿐, 네 나이라면 슬슬 남자에게 관심이 갈 만도 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새파랗게 어리던 게 언제 이렇게 큰 건지, 기특하기까지 해. 인간들은 이런 기분이 좋아서 새끼를 낳고 키우는 건가? 아, 그렇다고 지금 내 기분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리시안셔스는 도통 스위트피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답답함에 가슴을 내리친 스위트피가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물었다.

“리시안,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한 건데요?”

“그거야, 네가…….”

제법 자상한 표정을 짓던 리시안셔스가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것인지, 그답지 않게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앞에서 그 인간 수컷을 감싸지 않았나.”

“제가 언제요?”

“그 인간 수컷이 널 험하게 대했을 때도 넘어지지 않았다며 옹호하고.”

“대체 언제 옹호했다고…….”

문득 스위트피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가 있긴 했다.

「다친 곳은?」

「넘어지지도 않았는데요, 뭘.」

리시안셔스가 헤이든과 있을 때 넘어질 뻔한 자신을 살피며 했던 짤막한 대화였다. 엄밀히 따지면 스위트피는 헤이든을 옹호한 게 아니었다. 일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뿐이며, 넘어지지도 않아서 다칠 일이 없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또, 그 인간 수컷에게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결혼하지 않았다며 해명했지.”

“리시안과 제가 결혼하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요!”

“단순히 사실을 정정하는 정도의 반응이 아니지 않았나? 허둥거리며 적극적으로 부정했지.”

“그건!”

헤이든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결혼한 걸로 알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그때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길길이 날뛰며 부정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때문이었다.

리시안셔스와 결혼한 사이라니. 전혀 사실이 아닌 타인의 오해라지만,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얼굴이 타들어 갈 것처럼 열이 오르고 심장이 빨리 뛰어서 의도치 않게 더 격한 반응을 보이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리시안셔스가 타인의 앞에서 먼저 그를 자신의 반려라고 소개할 줄은 몰라 더욱 놀랐던 것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는 있을 듯했다.

리시안셔스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다른 사람이 오해하는 건 상관없지만 적어도 그는 그런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리시안셔스는…….

“리시안, 저는…….”

스위트피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리시안.”

스위트피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리시안셔스의 애칭이 나왔다.

“어디 있나 한참 찾았는데, 여기 계셨네요. 로렌 양도 만나서 반가워요.”

한껏 차려입은 트리사 모러의 모습은 밖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으며 스위트피에게는 없는 성숙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리시안은…….”

트리사에게 딴지를 건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리시안은 애칭이에요. 가까운 사람만 부를 수 있는.”

“아, 그래요. 그럼 아직 가깝지 않은 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리시안셔스라고 불러요. 그게 이름이니까.”

사실 트리사가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한 심술이란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거기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미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한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리시안셔스에 이어 트리사도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거 같아서 기분이 불쾌해졌다.

스위트피는 저도 모르게 리시안셔스의 옷깃을 주름이 질 정도로 세게 붙들었다.

“아, 그렇지. 로렌 양은 역시 제 동생을 보러 온 거겠죠?”

때마침 저 멀리서 헤이든이 스위트피를 발견하고는 반가워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트리사는 동생의 등을 스위트피를 향해 밀었다.

“헤이든, 로렌 양에게 우리 저택의 아름다운 정원 구경이라도 시켜 주렴.”

자신을 헤이든에게 넘기고 리시안셔스와 둘만 있으려는 트리사의 수작이었다.

“로렌 양,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떨까요? 누이의 말대로 저택의 정원이 무척 아름답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스위트피는 헤이든과 둘이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이상한 오기와 심술이 솟아올랐다.

‘리시안도 저 여자가 다가오는 걸 내치지 않잖아.’

그런데 왜 나만 헤이든을 밀어내야 해?

이름뿐인 반려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속상함이 밀려왔다.

“스위트피는 여기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리시안셔스가 입을 열 때였다.

“알겠어요.”

스위트피가 먼저 자신의 앞에 뻗어진 헤이든의 손을 잡았다.

“정원을 구경시켜 주세요.”

헤이든은 대놓고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다소 뻣뻣한 몸짓으로 스위트피를 이끌고 홀을 나섰다. 스위트피는 그렇게 리시안셔스를 스쳐 지나갔다.

리시안셔스는 제게서 멀어지는 스위트피의 뒷모습을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응시했다. 꼬마가 저 인간 남자에게 호감을 품었다면 존중해 주어야 마땅할 테지만.

……기분이 썩 내키진 않았다.

* * *

정원은 트리사와 헤이든이 말한 대로 무척 아름다웠다. 그러나 드래곤의 발등에 앉아 하늘을 나는 것이 익숙한 스위트피는 이런 인공적인 풍경 말고 진짜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반면 스위트피와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기쁜지 헤이든은 상기된 얼굴로 묻지도 않은 꽃과 정원에 대해서 설명하기 바빴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정원이 참 아름답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물론 제 눈에는 로렌 양이 더욱 아름답지만요. 하하하!”

전혀 영혼이 담기지 않은 칭찬이란 걸 눈치채지 못한 헤이든이 호탕하게 웃었다.

스위트피는 제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이 역력한 헤이든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부담스러웠다. 그가 싫은 건 아니지만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둘만 있게 되었으니, 싫더라도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적당히 대화를 이끌어 갈 필요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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