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전날에 분명히 거절했었는데.”
“그래도 두 분께 결례를 저지른 게 많이 죄송하셨는지, 꼭 초대에 응해 달라 전하라 하셨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리시안도…….”
스위트피는 이 상황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리시안셔스를 흘끗, 쳐다보다 슬쩍 그의 핑계를 댔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렇죠, 리시안?”
최근에야 시내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자신 때문에 아무 말 없이 체념하고 같이 가 준다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 돌아다니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명이 화려하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호화스러운 파티라니.
‘리시안이 좋다고 할 리가 없잖아.’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입에서 나올 말을 확신하고 있었다.
“스위트피, 넌?”
그런데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의견을 물어보고 있었다.
“전 안 가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네.”
리시안셔스의 표정이 모호했다. 자신의 속내를 떠보는 거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하는 거 같기도 하고, 언짢아하는 거 같기도 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 이제는 그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그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리시안이 파티에 가고 싶은 걸까?’
스위트피의 머릿속에 다시금 리시안셔스에게서 가까이 다가가 무어라 속삭이던 트리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여자가 뭐라고 했길래 저러지…….’
지금까지 리시안셔스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리시안셔스가 만약 처음으로 여자에게 관심이 생긴 거라면.
“리시안 마음대로 해요.”
안 그러고 싶은데 입에서 저절로 볼멘소리가 튀어 나갔다.
“전 안 가도 괜찮고, 가게 돼도…….”
실은 가기 싫었다. 파티에 가게 되면 트리사 모러가 또 리시안셔스에게 지나치게 친한 척을 할 거 같았다. 그런데 왜 괜한 오기가 생기는지 모르겠다.
‘가기 싫다고 말해요, 리시안. 제발…….’
스위트피는 힐끗, 리시안셔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필이면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지만.
“……가지.”
안타깝게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마음은 전달되지 않는 법이었다. 자신이 위급한 순간에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을 때 그가 듣고 응답하는 것처럼, 매사의 모든 마음이 전달되고 통하지는 않았다.
“진짜로 가려고요?”
“이렇게까지 초대하는 정성을 보이는데, 굳이 안 갈 이유는 없으니까.”
“…….”
“난 그 녀석이 마음에 안 들고, 인간 여자아이들의 감성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저 때문에 가려는 거면 괜찮은데…….
그러나 그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말을 꺼내려던 순간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정말 나 때문에 트리사 모러가 초대한 파티에 가려는 걸까? 그냥 리시안이 가고 싶은 건 아니고?
지금까지 그가 인간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는 건 알지만, 예외라는 건 늘 존재하니까. 처음에는 자신을 귀찮아하고 떼어 놓으려던 리시안셔스가 지금은 자신을 지켜 주며 함께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치장은 저희가 돕겠습니다.”
마차를 타고 함께 온 사람들이 스위트피를 데리고 여관의 다른 방을 빌렸다. 리시안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며 치장을 거부했지만, 결국 그들의 설득에 파티에 갈 옷은 받았다.
스위트피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손길을 받으며 혼자 입기 힘들 만큼 화려한 옷을 입었다. 짧은 단발머리도 양쪽으로 땋아 내리며 뒤로 반묶음을 한 채 리본을 달았다.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그리고 상황이 조금 달랐다면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에 들떴을 것이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거울 속에서 평상시와는 다르게 화려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기분이 좋기는커녕,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왜 표정이 좋지 않으세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에요, 다 마음에 들어요. 기분이 안 좋은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치장을 마친 스위트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뚝거리며 몇 걸음 걷자, 치장을 해 주던 모러가의 하녀가 허둥거리며 지팡이를 찾아왔다.
“죄송해요, 미리 곁에 놔뒀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모습에 외려 불편함을 느꼈지만, 스위트피는 밝은 미소 뒤로 어두워지려는 감정을 숨겼다.
모러가의 저택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탄 뒤로, 스위트피는 그런 억지로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가는 내내 말 없는 스위트피의 표정을 관찰하던 리시안셔스가 결국 한숨과 함께 먼저 말을 걸었다.
“스위트피. 가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가도 상관없고, 안 가도 상관없다니까요.”
“난 인간이 아니고, 어린아이였던 적도 없어서, 어리고 인간인 네 마음을 알아 주는 것엔 한계가 있어.”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또 어린애 취급해요? 저도 이제 내일이면……!”
말을 이어 가던 스위트피는 또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린아이 같은 행동만 골라서 하면서 어린애 취급은 말라니. 어이가 없군.”
리시안셔스도 이번에는 제대로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그가 토라진 스위트피에게 저렇게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가, 언제 어린아이 같은 행동만 했다고…….”
“지금 네 꼴을 봐.”
“…….”
“원하는 바를 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
“어르고 달래 봐도 이유조차 말하기 싫어하면서 내게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있지.”
“그건…….”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 하지만 넌 세 살배기 새끼 인간들보다 더 못난 짓을 하고 있어.”
부정하고 싶어도 정확한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리시안셔스가 하는 말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런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것쯤은. 알면서도 이상하게 심술부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눈두덩이가 무거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핑 돌 거 같았다.
“네가 지금 내 말을 알아들을 정도의 수준은 된다면, 이제 그만 입 다물고 얘기해 봐.”
“…….”
“뭐가 그리 기분이 나쁘고, 지금 어떻게 하고 싶은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줬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지금 사실대로 얘기하면 파티에는 가지 않아도 된다. 숙소로 돌아가 푹 쉬고, 다가오는 여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리시안셔스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파티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 말까지는 꺼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은 이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파티에 가면 트리사 모러가 또 리시안셔스에게 접근할 거고, 자신은 그 모습이 정말 끔찍하게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절대 리시안셔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혼자 우울한 생각이 끝을 달릴 즈음, 때마침 마차가 모러가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스위트피는 창밖으로 파티에 초대된 또 다른 사람들을 발견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도 지팡이 없이 두 발로 서 있는 사람들을 보자,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자신이 불완전한 절름발이라는 사실이었다.
한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점점 어두워지는 스위트피의 얼굴을 지켜보던 리시안셔스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이 꼬마가 더 이상 땅굴을 파고 들어가게 두면 안 될 거 같았다.
“스위트피?”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을 재촉했다. 결국 스위트피는 아주 약간의 진실만 털어놨다.
“저렇게 잘난 사람들 앞에서 다리를 절고 싶지 않아요…….”
사실을 털어놓자 마차 안에는 약간의 적막이 감돌았다. 때마침 마차가 멈춰 서고 마부가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이 약간 열렸을 때쯤, 리시안셔스가 한 손으로 다시 문을 닫아 버렸다. 밖에서 당황한 마부의 모습이 보였지만 리시안셔스는 당황한 인간을 신경 써 주는 섬세한 드래곤은 아니었다.
“한쪽 다리를 전다는 사실에 대해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자신도 원래는 신경 쓰지 않았었다. 가끔 도망치거나, 잘 넘어질 때, 오래 걸으면 무릎이 아플 때에는 제 다리가 원망스럽고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다리 때문에 스스로가 싫어지지는 않았다.
“저 사람들은 너무 잘났잖아요.”
“무엇이?”
“그야 저 사람들은 귀족이고…….”
“신의 허락 없이 자기네들 마음대로 신분을 나눈 거뿐인데, 그것이 저들의 대단한 점이라도 되나?”
“다들 예쁘고…….”
“내 눈엔 다 똑같은 얼굴이야.”
“저만 다리를 절잖아요…….”
“그리고 나만 유일하게 한쪽 눈을 가리고 있지.”
리시안셔스에게서는 위로하려는 노력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있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진 이해가 안 가지만.”
“…….”
“내게는 이 중에서 네가 가장 완벽해 보여.”
“…….”
서러워서 눈물을 참느라 붉어졌던 얼굴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