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다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평소에는……!”
평소에는 내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안아 줬잖아요. 그 말은 너무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라서 차마 할 수 없었다. 리시안셔스가 아직도 꼬마라고 놀릴 것을 알면서도 부루퉁한 표정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아까…….”
“아까?”
“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요?”
사실 트리사가 리시안셔스에게 몸을 떼어 낸 순간부터 곧장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대체 처음 만난 사이에 그렇게 가까이 붙어서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리시안은 그걸 왜 가만히 들어주고 있었던 거야?!
마음 같아서는 있는 대로 짜증 내고 싶었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화를 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근데 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스위트피.”
“네.”
“우린 이 마을에 오랫동안 있을 수가 없어.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새삼스러운 사실을 굳이 왜 말하는 거예요?”
“너도 이제 그럴 나이이긴 하다만, 그 남자와는…….”
“…….”
말을 하다가 만 리시안셔스의 미간이 깊게 팼다. 스위트피의 얼굴을 빤히 보던 리시안셔스가 이마를 짚었다.
“다 키워 놓으면 아무 걱정 없어질 줄 알았는데. 다 크니까 새로운 걱정을 안겨 주는군.”
“리시안이 언제 절 키웠어요?!”
“인간들의 기준으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으면, 키웠다고 표현하지 않나?”
리시안셔스의 말은 악의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분했다.
“……저 그렇게 어린애 아니에요.”
“알아. 그래서 다 컸다고 했잖아.”
“계속 어린애 취급하고 있잖아요. 리시안이 절 돌봐 주고 지켜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 아버지라도 되는 것도 아니면서!”
큰 소리를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왜 화가 났지?”
“화나지 않았어요.”
“화났잖아.”
얼굴을 잔뜩 붉힌 채 큰 소리로 쏘아붙여 놓고서 화나지 않았다고 해 봤자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리시안셔스도 똑같이 화를 내면 좋으련만…….
“오늘은 널 놀리지도 않았고.”
리시안셔스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스위트피가 화났을 이유를 추측했다.
“특별히 무심한 말을 하지도 않은 거 같은데…….”
“…….”
“어린아이 취급하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리시안셔스는 미간을 설핏 찌푸리면서도 입꼬리는 올려 웃었다. 사춘기 아이의 투정을 난감해하면서도 받아 주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린아이 취급이 왜 기분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성내지 마.”
“…….”
“네가 자라는 걸 지켜보는 건 내게는 큰 재미였지만, 또 아쉬움이 남아 그런 거뿐이니.”
“…….”
“네가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곧 성년을 앞둔 어른인 건 알고 있다.”
괜히 목소리를 높인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진짜로 화낸 거 아니에요.”
“그래, 그럼 그런 걸로 하지.”
스위트피는 속으로 뻔한 거짓말을 하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런데, 난 왜 화가 난 거지?’
화가 난 이유가 뭘까. 그 여자가 리시안셔스에게 가까이 붙은 게 뭐가 어때서. 리시안셔스는 어떤 이성이라도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였다.
사실 리시안셔스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한 여자들이 이제껏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그의 곁에 있는 스위트피가 키가 크고 성숙해지면서부터는 그런 일이 줄었지만,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어린아이였을 무렵에는 그 빈도가 꽤 잦은 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도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고,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거 같다. 그래서 여자들이 리시안셔스에게 접근할 때면 자신의 다리를 핑계 삼아 그를 끌고 자리를 피하고는 했다.
대체로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아프다고 하면 타인에게 잠시 시선을 주다가도 곧장 원래대로 스위트피에게 집중하고는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신이 성장하고부터는 그런 일이 드물었다가, 오랜만에 리시안셔스에게 접근하는 이성을 목격하자, 순간의 화가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마냥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섭섭해졌다.
‘대체 왜일까.’
스위트피는 몇 년째 지속된 이 감정이 자신의 것이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이 감정의 정체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두렵기도 했다.
“내 꼬마 반려님의 성질이 나날이 더러워지니, 벌써부터 걱정되는군.”
“……꼬마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지금은 그저 서로가 편하고 믿을 수 있는 이 관계를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 * *
“누나, 그 남자 좀 불안해.”
리시안셔스와 스위트피에게 마차를 빌려주고 다른 마차를 빌려 탄 모러 남매는 자신들이 꽂힌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반려라는 기가 막힌 우연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헤이든. 라이벌이 지나치게 잘생겨서 겁먹은 거니?”
“아,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 자식이 나한테 다가오는데 숨을 쉬기 힘들었다니까? 진짜로 숨이 막혀서 죽을 거 같은 느낌? 이해하지 못하겠어?”
“쉽게 얘기하면 너무 잘난 상대에게 위축되었다는 거잖아.”
“그런 게 아니라……. 아, 그런가……?”
누나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게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평범한 사람이 제게 다가온다고 질식사할 거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게 말이 되나.
그녀의 말대로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라이벌이 너무 잘생겨서 당황한 마음에 위축되었던 걸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헤이든은 자존심이 상하는 걸 느꼈다.
그래 봤자 애꾸눈인데다가 나보다 신분도 낮은 놈인데!
“너무 잘난 라이벌이 두려워서 네가 반한 여자를 그대로 뺏길 거니? 결혼한 사이도 아니라며.”
“물론 그렇긴 한데, 근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불쌍하고 한심한 내 동생.”
트리사가 혀를 쯧쯧, 찼다.
“걱정하지 마. 판은 내가 다 깔아 놨으니까.”
“하지만 나보고 신분 낮은 여자들과 노는 건 이제 그만하라며?”
“그 말은 일시적으로 취소하겠어. 어차피 넌 사랑에 빠지는 속도만큼이나 금방 헤어 나오잖아? 그리고…….”
오랜만에 들뜬 얼굴의 트리사가 누굴 떠올리고 있는지는, 그녀를 오래 지켜본 혈육으로서 모를 수가 없었다.
“괜찮겠어? 그 남자는 누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파티에 올 리가 없잖아. 거기다가 스위트피 로렌 양에게 푹 빠져 있는 거 같던데…….”
“눈치 없기는. 내 눈에는 사랑에 푹 빠진 남자가 아니라 보호자에 가까워 보이던데?”
“……그런가?”
“파티는 걱정하지 마. 결국 오게 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말했잖아. 이미 판 깔았다고.”
트리사는 제 아버지를 떠올렸다. 여러 스캔들로 인해 모러 백작은 그녀를 내놓은 자식처럼 결혼에 대해서는 손을 놔 버렸지만, 기본적으로 첫째 딸에게 꼼짝 못 하는 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는 게 제 아버지였다. ‘반려’라고 칭하면서도 연인보다는 보호자처럼 여자를 보호하던 리시안셔스를 회상하며 트리사는 키득, 거리며 웃었다.
헤이든은 제 누이의 얼굴을 질린 표정으로 쳐다봤다. 트리사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무언가 기대되는 것이 있거나 잔뜩 설렜을 때나 짓는 얼굴이었다.
“동맹이야, 헤이든. 내가 그 남자를 떼 놓는 대신, 넌 그 절름발이 여자애를 떼어 놓아야 해. 알겠지?”
“로렌 양에게 절름발이라고 하지 마!”
“다리가 멀쩡한 애는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누나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라, 헤이든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트리사가 자신의 편인 건 아주 좋은 징조였다. 젠틀하지만 멍청하다는 평가를 받는 자신과 다르게 트리사는 머리를 쓸 줄 아니 말이다.
* * *
거대한 마차가 조용하던 여관 앞에 멈춰 선 것은, 모러 남매와 만났던 다음 날 점심때 일어난 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을 실은 데다가 어느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마차이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스위트피는 그 마차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모러 남매에게 빌린 마차에도 이와 똑같은 문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련님과 아가씨께서 스위트피 로렌 양과 ‘리시안’ 씨를 파티에 초대하고 싶어 하십니다.”
스위트피는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리시안’이라는 호칭에 표정이 굳었다. 자신만 부르던 그의 애칭이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게 싫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어째서 리시안의 애칭을 알고 있는 거지.
“아…….”
홀로 의문을 떠올리던 스위트피는 이내 그 정답을 알아챘다. 자신이 트리사의 앞에서 리시안이라고 부르던 걸 그녀가 듣고 이름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 같았다.
‘불쾌한데…….’
이번에도 역시 스위트피는 자신이 불쾌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