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틀린 말은 아니잖아.”
리시안셔스가 여상한 투로 답했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되묻는다는 태도였다.
‘잠깐만, 리시안이 본인을 내 반려라고 말할 줄은…….’
아까 리시안셔스가 했던 말을 되짚어 보면 되짚어 볼수록 목부터 이마 끝까지 열이 올랐다. 거울은 보지 않았지만 지금쯤 자신의 얼굴은 분명 홍당무처럼 빨개졌을 것이다.
진정하자. 리시안은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야. 내가 리시안의 반려니까, 리시안도 나의 반려가 맞긴 하지. 그래, 맞아. 그것뿐이야. 그것뿐이긴 한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왼쪽 가슴 부근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려 대는 것처럼 쿵쿵, 울리는 소리였다.
“바, 반려……. 그, 그럼 둘이 결혼을…….”
“겨, 결혼은 아직 안 했어요!”
헤이든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스위트피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사람처럼 버럭 외쳤다. 하마터면 머릿속에서 정말 리시안셔스와 결혼식을 올리는 상상을 할 뻔했다.
미쳤지, 미쳤어.
신이 억지로 엮어 반려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뿐, 리시안과 나는 어쩌다 보니 함께하는 사이인데……. 난 왜 자꾸 이러는 거야.
“……그래, 결혼은 안 했지.”
헤이든의 말을 극구 부인하는 스위트피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던 리시안셔스가, 얼굴을 빼꼼 내민 제 꼬마 반려를 등 뒤로 숨기고는 헤이든에게 취조하듯 물었다.
“스위트피와는 언제부터 알았지?”
“어, 어제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서점에서…….”
“오늘은 왜 이 아이의 앞에 나타났지? 해치려고 한 이유는?”
“해치려고 한 거 아닙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로렌 양을 발견했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려다가…….”
헤이든은 자신보다 두 뼘은 더 큰 남자에게 취조받는 듯한 상황에 점점 위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결혼은 안 했지만 반려라는 표현을 쓸 정도면 최소 약혼 관계는 될 것이다. 헤이든이 위축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눈앞의 남자가 예상치 못한 제 사랑하는 여자의 정혼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슨 키가 저렇게 커…….’
아까 마차 안에서도 스위트피와 남자가 함께 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스위트피에게 정신 팔리느라 남자의 외모는 자세히 보지 못했던 터였다. 그가 스위트피를 두고 금방 어디론가 가길래 별 사이 아닐 줄 알았다.
그런데 스위트피의 반려인 것도 모자라 가까이 서 본 남자는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제 누이가 마차 안에서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지만 남자의 외모에도 한 가지 하자가 있기는 했다. 그건 바로 안대를 끼고 있는 한쪽 눈이었다.
키만 멀대같이 크고 얼굴이 곱상하면 무엇하나. 신체에 큰 하자가 있는데. 거기다가 자신은 귀족이었다. 귀족은 귀족끼리만 결혼하니, 스위트피와 반려라는 이 남자도 귀족은 아닐 것이다.
입고 있는 옷의 재질은 꽤 좋아 보였지만 만약 스위트피가 귀족이라면 부모 되는 사람들이 다리가 불편한 딸을 호위 하나 없이 밖에 돌아다니게 두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헤이든이 그렇게 애써 자신감을 충전해 갈 때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려고 고작 두 번째 만남인 숙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군.”
“그건……!”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뭐야!’
갑자기 숨이 막혔다.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첫째로 난 기어오르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
남자가 다가올수록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더욱 옥죄여 왔다.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했다. 살려 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혀끝까지 마비된 몸은 소리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두 번째로 내게는 저 아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한 걸음 더 다가온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네가 내 반려를 다치게 할 뻔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기어오르면…….”
점점 다가오는 손이 흉기처럼 거대해 보였다.
죽는다. 죽게 될 것이다.
원초적인 공포가 곱게 자라 온 헤이든을 집어삼키려 할 때였다.
“헤이든!”
뒤쪽에서 제 누이인 트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사라지자, 마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다던 누이가 나타난 것이다. 아마 이미 멀어진 줄 알았던 남자가 돌아온 것을 발견하고 뒤늦게 나온 것이 분명했다.
“누, 누나…….”
굳어 있던 몸이 풀리며 목소리가 나왔다. 평소라면 얄미워해야 마땅했겠으나, 지금 헤이든에게는 누이의 등장이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죄송합니다, 제 동생이 무례를 저지른 모양이군요.”
“누나, 그게 아니라……!”
저 사람 뭔가 이상해!
그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이윽고 제 쪽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는 리시안셔스의 눈치를 살핀 헤이든은 조용히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제 이름은 트리사 모러예요. 숙녀분과 신사분께 제 동생의 무례에 대해 대신 사과드리죠.”
“…….”
트리사는 노골적이라는 감상이 들 정도로 리시안셔스를 빤히 응시했으나, 정작 리시안셔스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괘, 괜찮아요!”
리시안셔스를 대신해 트리사 모러의 사과를 받은 건 스위트피였다.
“저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럴 수야 없죠.”
그제야 트리사도 스위트피를 보며 대화를 이어 갔다. 아마 원만한 대화를 나누기에 리시안셔스보다 스위트피가 더 좋은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저희 모러 가문은 빚을 지면 꼭 갚아야 한다고 배웠답니다. 오늘 제 동생이 저지른 무례에 대한 보상을 꼭 해 드리고 싶어요.”
“그럴 필요까지는…….”
“다리가 불편한 약자를 함부로 대했으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죠.”
“…….”
느낌 탓일까. 분명 상대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사과하고 있는데, 어쩐지 말에 뼈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 자격지심이겠지…….’
스위트피는 괜히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자신을 속으로 꾸짖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된 것도 인연인 듯하고……. 저희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사과도 드릴 겸, 오늘 저희 가문의 파티에 오시겠어요?”
“저희는 정말 괜찮은…….”
“정말 재밌을 거예요. 머무시는 곳을 말씀해 주시면 마차를 보낼 테니…….”
“거절하지.”
스위트피의 거절에도 못 들은 것처럼 계속 강권하던 트리사가 짤막한 리시안셔스의 대답에 말을 멈췄다. 계속 말을 거는 트리사를 응시하면서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꾸도 안 하던 리시안셔스가 여자에게 내뱉은 첫마디는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트리사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무척 즐거운 파티가 될 거예요.”
“당사자가 싫다고 하지 않나. 집요한 권유는 강요일 뿐이야.”
트리사는 잠시 입을 다물고 리시안셔스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리시안셔스의 등 뒤에 있던 스위트피와 눈이 마주친 트리사가 생긋, 웃고는 리시안셔스에게로 몸을 가까이 붙였다. 그러고는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보다 키가 작은 트리사가 고개를 치켜들고 리시안셔스의 뺨에 입이라도 맞출 듯 가까이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이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잘 알지 못하는 상대에 대해서 쉽게 재단하는군.”
얘기가 끝난 건지 트리사가 떨어지자, 리시안셔스가 굳이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곁에 있다고 해서 전부를 아는 건 아니죠. 이름 모를 신사분께서는 여자의 섬세한 마음에 대해서 둔감하신 거 같네요.”
평범하게 다가오던 첫 모습과 다르게 얼굴에 짓고 있는 미소가 야릇했다.
“마차를 빌려드릴 테니, 타고 가세요.”
“필요 없…….”
“리시안!”
겉보기엔 잘 어울리는 듯한 두 남녀의 모습에 자꾸만 억누르던 불쾌함이 최고조에 달하자 결국 스위트피가 나섰다. 아까 리시안셔스가 헤이든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던 것처럼, 여자와 리시안셔스의 사이에 끼어든 스위트피가 조르듯이 옷깃을 잡아당겼다.
“다리 아파요. 빨리 가요, 네?”
평소답지 않게 초조하고 다급해 보이는 스위트피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던 리시안셔스가 가볍게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답했다.
“마차를 빌리도록 하지.”
오늘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헤이든 모러와 마주친 것도, 그의 누나라는 여자가 나타난 것도, 파티에 초대받고, 리시안셔스가 순순히 다른 인간의 마차에 타겠다는 것도.
왜지? 자신은 여관에 빨리 가자고 한 거뿐이고, 여관은 조금만 걸어가면 나오는데.
굳이 마차를 왜 빌리는 거지?
머릿속이 톱니바퀴처럼 바쁘게 굴러갔다. 하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스위트피는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들어 올린 리시안셔스로 인해 턱이 높은 마차 안에 들어간 상태였다.
타인이 빌려준 마차인데도 별 감흥 없이 마차에 올라탄 리시안셔스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모러 남매는 마차 밖에서 손짓하며 인사했지만 리시안셔스는 물론이고, 스위트피도 같이 인사하진 않았다.
“왜…… 마차를 빌린 거예요?”
“빨리 가고 싶다며.”
“걸어가면 될 일이잖아요.”
스위트피의 불만 섞인 질문에 리시안셔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