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42화 (42/120)

<42화>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꼬마래…….”

리시안셔스는 아직도 자신을 너무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일부러 들리게끔 중얼거렸는데도 리시안셔스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태도가 자신을 진짜로 어린아이로 대하는 거 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

‘나도 이제 곧 어른인데…….’

거기다가 겉모습만 봐서는 리시안셔스와 자신의 나이가 별반 차이 나 보이지도 않았다. 속상해하는 스위트피의 마음도 모르고 가까이 다가온 리시안셔스가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어딜 나갈 예정이니?”

“그건 왜 물어요?”

“어제 얘기했던 우리 꼬마의 다가올 성년을 기념할 선물을 사려고.”

습관처럼 선물은 필요 없고 애칭으로 불러 달라고 얘기하려던 스위트피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꿈속에서 다정하게 자신을 애칭으로 부르며 반려를 뺏어 갔다 주장한 언니가 떠올라서,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 * *

“진짜야, 누나! 요정이었다니까?”

“시끄러워, 헤이든.”

마차 안에 앉아 부채질을 하던 트리사는 결국 시끄럽고 철없는 제 남동생에게 조용히 하라고 일갈했다.

백작 가문의 후계자면 후계자답게 이제 좀 철이 들어야 할 텐데. 헤이든은 조금만 외모가 자신의 취향이면 쉽게 사랑에 빠져 버리고는 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헤이든이 사랑에 빠진 인물들은 대체로 신분이 낮거나 수준이 떨어지는 격식 낮은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또래의 같은 귀족에게 사랑에 빠진 거면 이김에 밀어붙여서 결혼시켜 버릴 텐데. 그것도 아니라 난감했다.

“이번엔 진심이야.”

“그렇겠지. 넌 언제나 진심이었잖아?”

“누나는 나한테 여자 문제로 나무랄 자격이 없어.”

트리사는 언제나 남동생의 여자 문제로 지적을 해 왔으나, 사실 트리사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헤이든은 제 나름대로 순수한 사랑에 빠졌다면, 트리사는 방탕했다.

벌써 염문을 뿌린 남자만 해도 다섯 명째였다. 물론 같은 핏줄이 아니랄까 봐 미색이 빼어난 남자들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신분도 직업도 공통점이랄 것이 없었다.

“나와 넌 달라. 넌 우리 가문의 후계자잖아.”

“누나는 결혼해야지!”

“난 이미 결혼하기 글렀어. 신문 기사에 스캔들로 오르내리는 여자를 누가 데려가고 싶어 하겠니.”

결혼하기 싫은 것이 트리사의 솔직한 속마음이기도 했다. 가문의 재산이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남자들을 취하며 즐길 수 있는데 정략혼으로 원치 않는 취향의 남자와 함께 살 생각은 없었다.

기사에 뜬 것만 다섯 번째이지, 내부적으로는 셀 수도 없이 더 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건 하도 많은 남자들을 만나 트리사의 눈이 점점 높아져 이제는 만날 남자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 외지고 사람 없는 지방에 데리고 놀 만한 미색의 남자가 있을 리 없었다.

영지에서 드래곤들끼리 전투가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던 모러 가문은 드래곤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별로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까지 드래곤의 피해를 받지 않았다는 이 시골구석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었다.

드래곤을 두려워하던 귀족들에게 이 지역이 안전지대라는 소문이 돌아서 많은 귀족들이 내려와 있는 덕에 매일 파티를 열며 따분한 시간을 견디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이 지루함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야 내놓은 자식이니 괜찮지만, 넌 무사히 가문을 이어받고 싶다면 이상한 여자 만나지…….”

헤이든에게 훈계를 하던 트리사는 우연히 보고 말았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붐비는 길거리에서 눈에 띄는 한 남자를.

“어? 요정이잖아!”

“……뭐라고?”

“저기, 옷 가게 앞에 있는 여자애! 내가 반했다는 그 요정이야!”

남매가 첫눈에 반한 사람들이 나란히 같은 거리에 서 있다니. 나름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장면인 거 같았다. 거리를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스위트피는 옷 가게에서 혼자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 말고 여분의 옷이 없어 마침 사야 할 때이기도 했다.

리시안셔스는 드물게도 스위트피의 곁에 없었다. 길을 걷다가 서점에서 사고 친 이야기를 하자, 리시안셔스는 서점 주인에게 책값을 물어 주겠다며 잠깐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어림도 없지만 서점이 바로 근처라 잠시 떨어져도 괜찮을 거라 판단한 거 같았다.

‘내가 책을 훼손한 것도 아닌데…….’

그냥 책을 떨어트린 게 전부였다고 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마 리시안셔스의 머릿속에는 스위트피가 정말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어마어마한 진상을 피우고 온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대체 언제까지 어린아이 취급할 거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리시안셔스를 떠올리자, 괜히 또 기분이 저조해졌다.

“에헴!”

한참 리시안셔스에 관한 생각을 하던 스위트피의 주의를 돌린 건 바로 뒤에서 들린 웬 남자의 헛기침 소리였다. 처음에는 기침 소리가 참 유별나게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신경을 끄고 마저 옷을 고르는데…….

“에, 에헴!”

“…….”

“크흠.”

“…….”

“으흠!”

느낌 탓인가.

자꾸 부담스럽게 등 뒤쪽 가까이에 서서 기침인지, 추임새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거 같은데.

영 신경이 쓰여서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스위트피가 돌아섰을 때, 발견한 이는 낯설지 않은 얼굴의 주인이었다.

“그쪽이 왜…….”

“어? 어라? 우, 우연이군요!”

헤이든은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반가워했다.

“네, 우연이긴 하네요.”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야…… 옷을 사러 왔죠……?”

너무 당연한 것을 묻는 말에 스위트피가 다소 황당해하며 답하자, 자기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헤이든의 귀 끝이 붉어졌다.

“로렌 양은 다리도 불편할 텐데 참 씩씩하게 잘 다니는 거 같아요. 오래 걸으면 다리가 아프지 않나요?”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전 괜찮아요.”

자기 딴에는 아픈 다리로도 잘 돌아다니고 씩씩해 보이는 스위트피를 칭찬한 말이겠지만 썩 달가운 칭찬은 아니었다. 타인에게 자신의 다리 장애에 대해서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평가를 듣고 싶지 않고 말이다.

“그러는 그쪽은 이곳에 왜 오신 거예요?”

“헤이든 모러입니다. 헤이든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아, 괜찮아요.”

“아니요! 로렌 양이 제 이름을 불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일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곳에 오래 정착할 일이 없는 스위트피의 상황상, 굳이 타인과 이름을 부를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어릴 적 순진했던 시절에 고작 하루 동안 같이 있었던 여자애를 친구라고 믿었을 때처럼 상처받는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잠시 바이올렛을 떠올리며 조금 가라앉는 기분을 느낀 스위트피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헤이든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조용히 옷을 사고 나가기엔 이미 그른 것 같았다.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옷 가게를 빠져나갔다.

“잠깐만요, 로렌 양!”

그러나 사고는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법이었다. 스위트피가 지나쳐 옷 가게를 나가자 빠르게 달려 나온 헤이든은, 다급한 마음에 스위트피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문제는 첫 번째로 스위트피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과 두 번째로는 하필이면 지팡이를 붙잡고 있는 쪽 어깨를 당겼다는 것이다.

지팡이를 놓친 스위트피의 몸이 옆으로 휘청거렸다. 다리 때문에 넘어지는 일이 잦았던 스위트피는 익숙하게 다가올 고통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얼마 가지 않아 스위트피는 한 가지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한눈을 팔면 늘 이 모양이군.”

“……리시안?”

그건 리시안셔스를 만난 후 넘어지는 일을 겪은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늘 넘어지기 직전에 리시안셔스가 잡아 줬으니까. 스위트피를 일으켜 세운 리시안셔스가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주워 스위트피의 손에 쥐여 줬다.

“다친 곳은?”

“넘어지지도 않았는데요, 뭘.”

습관처럼 다친 곳이 없는지, 스위트피의 몸을 훑어보던 리시안셔스가 그사이 가까이 다가오려던 헤이든을 막아섰다.

“죄, 죄송합니다, 로렌 양. 일부러 그런 것은…….”

“죄송하면 꺼져.”

리시안셔스의 입에서 꺼지라는 말이 나온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괜히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던 스위트피가 헤이든에게 괜찮다는 말을 대신하려고 할 때였다.

“저는 로렌 양에게 사과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는 댁은 누구시길래 로렌 양과 제 사이를 막고 있는 겁니까?”

“나?”

리시안셔스가 다정해 보이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저 미소가 진심으로 성가셔 하는 상대를 인내심으로 참아 줄 때의 그가 짓는 미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대충 남매라고 둘러대겠지.’

혼자 그렇게 지레짐작했지만, 리시안셔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스위트피의 예상을 빗겨 나갔다.

“이 아이의 반려지.”

“바……!”

“……반려요?!”

헤이든은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고, 스위트피는 놀라서 길거리에 울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