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내가 너무 버릇없게 키웠군.”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스위트피에게서 경제권을 뺏어 올 생각은 없었다. 스위트피는 여전히 당당한 표정이었으나, 리시안셔스가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더는 애칭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식사하고, 씻고, 잠을 잘 준비를 하는 내내 입술을 조금 삐죽거릴 뿐이었다.
“저 잘게요.”
리시안셔스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자기 전 인사는 여느 때처럼 잊지 않고 한 스위트피가 침대에 누웠다.
창가에 기대앉아 있던 리시안셔스는 제게 뒤돌아 눕고서도 잠이 안 오는지 뒤척거리는 스위트피의 뒷모습을 관찰하다 말없이 한숨을 삼켰다. 요새 계속 이런 식이었다. 옛날에는 아주 드물게 자신이 언짢아하면 스위트피가 눈치를 보며 태도를 고쳤지만,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스위트피는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티를 냈고, 저 작고 괘씸하고 영악한 꼬마에게 속절없이 휘둘리는 건 리시안셔스의 몫이었다.
곧 성년이 된다고 들떠서는 아직도 아이같이 구니, 저절로 꼬마라는 소리가 튀어 나갈 뻔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은 뒤통수를 바라보던 리시안셔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허리까지 내려온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줬다.
“답답해요.”
스위트피가 이불을 다시 내리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또 감기 걸리고 싶지 않으면 참아.”
고집스럽게 이불을 다시 목 끝까지 덮어 준 리시안셔스가 이불 위로 스위트피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다가 느릿한 어조로 아까의 얘기를 다시 꺼냈다.
“나는 인간을 부르는 호칭에 의미 따위 두지 않아.”
“…….”
“그런 건 나에게 너무 간지러운 기분만 안겨 줄 뿐이지.”
스위트피가 베개에 파묻다시피 몸을 웅크린 탓에 리시안셔스는 토라진 아이가 말도 섞지 않고 자는 척을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있잖아요…….”
그런데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스위트피가 웅얼거리듯이 말을 꺼냈다.
“어렸을 적에 아빠도, 엄마도, 언니도…. 모두 절 ‘스윗’이라 불렀거든요. 가족들을 잃은 지 오래됐고, 그렇게 안 불린 지도 오래돼서 잊을 만한 애칭인데도…….”
목소리에 졸음기와 함께 서글픔이 묻어 나왔다.
“아직도 종종 저를 불러 주던 그 애칭에 담긴 애정이 생각나서…….”
“…….”
“그리워지고는 해요……. 무리한 부탁 해서 미안해요, 리시안…….”
그러나 결국 밀려오는 수마가 서글픔과 함께 스위트피를 삼켜 버렸다.
“이제 진짜로……, 잘 자요…….”
리시안셔스가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꿈나라 인사를 한 스위트피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깨어 있는 스위트피도 재미있지만, 잠들어 있는 스위트피를 관찰하는 것도 리시안셔스에게는 작은 재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리시안셔스는 잠든 스위트피의 얼굴을 보면 재미보다는 다른 감정이 들었다. 자신을 믿고 푹 잠든 모습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졌고, 가끔은 이런 재수 없는 운명에 휘말린 스위트피가 안쓰럽기도 했다.
어릴 때는 동그랗던 얼굴이 이제는 갸름해져서 제법 어른 태가 나는 스위트피를 내려다보던 리시안셔스가 잠든 제 반려에게 닿길 바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잘 자렴, 스윗.”
꿈나라에 가 있는 스위트피에게 과연 이 목소리가 닿았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스윗? 스윗!”
“으음…….”
“어서 일어나, 스윗.”
익숙하지만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듯한, 아주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애칭이었다.
‘잠깐만, 내 애칭이라고?’
누군가가 자신을 더 이상 누구도 불러 주지 않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자고 있던 스위트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제야 일어났네.”
“…….”
“우리 잠꾸러기, 늦게 일어난다고 엄마한테 혼나겠다. 어서 내려가서 아침 먹고 씻자.”
눈을 뜬 스위트피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에리카의 모습에 아무 말도 못 했다.
“어, 언니야……?”
간신히 입을 연 것은 에리카가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그때였다.
“정말로 언니야……?”
자신이 기억하던 어린 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스윗, 아직 잠이 덜 깼구나?”
“…….”
“어서 내려가자. 마침 너에게 소개시켜 줄 존재도 있었거든.”
애틋하면서도 낯설고 당혹스러운 가운데, 스위트피는 에리카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언니는 자신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아니라,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건 언니가 자신에게 소개시켜 줄 이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자, 잠깐만!”
“응? 왜 그러니?”
“언니가…… 나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누구인데……?”
“나의 반려.”
에리카는 여상한 태도로 말했다.
‘언니의 반려…….’
누구를 말하는 거지? 언니가 죽던 날 구하러 왔던 푸른 비늘의 드래곤일까.
아니면…….
“네가 가지고 있잖아.”
“어……?”
무언가 이상했다. 에리카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만들어진 것처럼 인위적이었다.
“내 반려.”
스위트피보다 계단 두어 개 아래에 있던 에리카가 덥석, 스위트피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절로 인상이 쓰일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네가 뺏어 갔잖아.”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리카가 붙잡고 있던 스위트피의 손목을 당겼다. 미처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스위트피의 몸은 경사진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 * *
“헉!”
다시 눈을 떴을 때, 스위트피는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아, 하아…….”
일어나자마자 머릿속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언니는 왜 내 꿈에 나타난 거지?
아니지.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니까 내가 언니를 무의식중에 그리워했나 봐. 어제 잠들기 직전에 리시안에게 가족들의 얘기를 꺼내기도 했으니까.
근데, 그건 무슨 얘기야.
내가 언니의 반려를 빼앗았다니…….
아니야. 더 생각하지 말자. 꿈일 뿐이잖아. 진짜로 언니가 내게 한 얘기도 아니고, 꿈에 나온 사람이 한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스위트피는 애써 꿈에 의미를 두지 않고 에리카에 대한 생각을 지워 내려고 했다.
‘그런데 리시안은…….’
자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면 언제나 곁에 있던 리시안셔스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리시안셔스는 자신과 함께 돌아다닐 때가 아니면 혼자서 움직임이 많지 않은 이였다.
“어디로 간 거지…….”
방에서 가만히 기다리면 어차피 금방 돌아올 걸 알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이 불편했다. 죽은 언니가 나온 꿈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리시안셔스의 얼굴을 봐야 마음이 놓일 거 같았다.
스위트피가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아래로 두 다리를 내릴 때였다.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깨어나……, 얼굴이 왜 그 모양이지?”
리시안셔스의 손에는 간단한 아침 식사가 올려진 작은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땀에 젖은 창백한 얼굴의 스위트피를 본 리시안셔스가 협탁 위에 트레이를 올려놓고는 한 손은 스위트피의 얼굴에, 또 한 손은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댔다.
스위트피가 알려 준 열을 재는 방법이었다.
“그 방법은 소용이 없어요, 리시안. 드래곤이 인간보다 몸에 열이 많잖아요.”
“하지만 너의 평상시 체온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지.”
본체일 때나 인간화일 때나 스위트피를 자주 안아 드는 게 리시안셔스이니, 정말 단순하게 평상시 체온을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스위트피는 어쩐지 그 말이 부끄럽게 들렸다.
“악몽을 꿨을 뿐이에요…….”
“악몽?”
“그게…….”
꿈에 언니가 나왔어요. 그런데 언니가 내가 당신을 뺏었다고 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된 과거에 언니와 당신이 서로 알고 있었던 거 같아요.
“…….”
“스위트피?”
“……어제 서점에서 무서운 책을 읽은 탓인가 봐요.”
끝내 하고 싶은 말을 숨긴 스위트피가 다시 평상시처럼 웃자, 그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던 리시안셔스가 이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릎 위에 식사를 올려 줬다.
“직접 식사를 가지러 내려갔던 거예요?”
“그래.”
“제가 내려가도 되는데…….”
“코까지 골며 자는데 깨울 수가 있어야지.”
“저는 코 안 골아요!”
“자고 있는 당사자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밤에 그 소음을 견디는 나만 괴로울 따름이지.”
“거짓말쟁이!”
화를 내면서도 스위트피는 속으로 반신반의했다. 리시안셔스의 말대로 정작 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코를 고는지, 안 고는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내가 진짜 코를 고는 거면 어떡하지……?’
그리고 이제까지 리시안셔스가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면…….
저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창피한 마음에 2층인 이 방의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말이 맞아.”
“……네?”
“거짓말이야.”
“…….”
“그러니 창피해 말고 마저 식사나 하렴, 꼬마야.”
울컥해서 화를 내고 싶었지만, 악몽의 여파 때문인지 그럴 기운도 없었다. 대신 스위트피는 빵을 잘게 뜯어 씹으면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