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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40화 (40/120)

<40화>

아마 다리를 저는 사람은 처음 봐서 악의 없이 당황한 걸 테다. 자신의 걷는 모양새를 보고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랬으니까.

스위트피는 일부러 밝게 웃으며 남자를 돌아봤다.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아, 아닙니다. 신사로서 당연한 일을 한 거뿐인데요, 뭘! 하하!”

“저 대신…… 할아버지한테 혼난 것도 고맙고요. 또 죄송해요.”

“그런 말씀 마세요! 요정님을……!”

“…….”

“아니지. 로렌 양을 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남자는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리시안셔스에게 뻔뻔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 스위트피였지만, 지금은 남자의 부담스러운 반응에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찾을 책이 있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이제 슬슬 가 봐야 할 거 같아서요…….”

스위트피가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바라봤다.

“그렇다면 제가 댁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그럼 마차를 잡는 걸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머무는 곳이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아서 괜찮아요.”

“하지만 다리가 불편하시잖아요.”

나름 자신을 배려한다고 이러는 걸 테지만……. 때때로 원치 않는 과도한 배려는 미묘하게 불편한 기분으로 다가오고는 했다.

“짧은 거리도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에요.”

생긋, 웃은 스위트피는 그 말만 남기고는 헤이든 모러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고 서점을 나섰다. 여기서 더 늦으면 정말로 리시안셔스한테 혼날 테니, 이제 진짜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스위트피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여관 입구로 향하던 스위트피는 자신의 뒤에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뒤를 돌았다.

“……스위트피.”

“까, 깜짝이야……. 언제부터 여기에 서 있었어요?”

“1시간쯤 되었지.”

“제가 약속 시간을 어긴 것도 아니잖아요.”

여관 입구에서부터 무려 1시간이나 자신을 기다렸다는 리시안셔스와 객실로 들어가는 내내, 둘은 티격태격했다.

“이쯤 되면 과보호가 아니라 집착이에요.”

스위트피의 말에 리시안셔스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집착? 집착이라고 했나?”

그러다 이내 낯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린 장골이 좋은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은 타인이 보기엔 무서울 수 있겠지만, 스위트피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절대 해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는 이 말싸움에서 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를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이 너의 심장을 노린다는 걸 잊었나 보지? 내 앞에서 납치당한 적도 있으면서.”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그래요!”

“바로 며칠 전에 다른 드래곤의 습격이 있었던 건 잊었나 보지?”

“결국 리시안이 이겼잖아요. 그 드래곤은 반려도 잃고, 결국 죽었고요…….”

익숙해진 일상에 경각심이 없어 보이는 스위트피에게 경고를 주려던 리시안셔스는 외려 자신의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다른 드래곤의 습격이 있을 때마다 스위트피의 눈을 피해 그들의 반려를 찾아 심장을 취하고는 했다. 그런데 하필 이번에는 그 장면을 스위트피에게 들키고 말았다.

14일 이내에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모르는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일부러 그랬다는 것도 모른다. 신이 될 욕심이 없는 리시안셔스가 다른 드래곤의 인간 반려를 죽인 일이 순전히 실수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드래곤 개체가 많이 줄어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이전보다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해서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요?”

몇 년간 인간들이 전부 드래곤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밖에 없을 만큼, 드래곤들 간의 전쟁은 치열했다.

그로 인해 개체 수가 많이 줄어들긴 했으나 그들 모두 리시안셔스와 같은 처지였다. 반려를 살리기 위해서는 14일 이내에 다른 반려를 죽여야 한다. 개체가 줄어든 만큼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찾는 일은 힘들어지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나설 것이다.

……물론 스위트피는 그것조차도 모르겠지만.

‘내가 어쩌다가 이 작은 것에게 스며들어서는.’

더 이상은 버리고 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제 곧 성년을 앞두고 있는데도 제 눈에는 이렇게 한없이 작아 보이니, 진짜로 이 아이가 노인이 될 때까지 곁을 지키고 있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언제나 재앙은 방심했을 때 일어나는 법이야. 넌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알겠으니까 잔소리는 그만해요.”

아무래도 여기서 더 말해 봤자 이 꼬마의 반발심만 부추길 거 같았다. 리시안셔스는 하는 수 없이 오늘은 이 얘기를 그만하기로 했다.

기분이 상한 건지 입술이 튀어나온 스위트피를 빤히 보던 리시안셔스가 조심스럽게 어깨 밑까지 내려온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끝을 쓰다듬었다.

“머리가 많이 길었어.”

“…….”

“잘라 줄까?”

“……그러든가요.”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어색한 화해 신청을 못 이기는 척 받아 줬다. 돈을 내고 머리를 자르던 스위트피가 갑자기 드래곤의 습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드래곤으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면서 날카로운 가위가 스위트피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곁에 있던 리시안셔스가 바로 스위트피를 보호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그는 스위트피의 머리를 타인에게 맡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스위트피를 앉혀 놓고 머리카락을 한 번 자르는 데에 가위를 들고 손을 떨어서, 결국 사고라도 날까 봐 겁에 질린 스위트피가 그에게 머리를 맡기는 걸 거부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여차여차해서 머리를 잘랐지만 아예 쥐 파먹은 머리로 만들어서 그 뒤로도 그의 손길을 두세 번에 걸쳐 거부했던 적도 있긴 했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 덕분에 최고의 미용사가 되었다.

거울 앞에 스위트피를 앉힌 리시안셔스는 익숙하게 스위트피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능숙한 가위질 소리가 스위트피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스위트피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홀로 노랫소리에 맞춰 발을 흔들었다.

“스위트피, 가만히 있어.”

“치…….”

“그보다, 선물은 생각해 봤나?”

고작 며칠 후면 성년이 되는 스위트피에게 리시안셔스는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해 보라고 했었다. 인간들끼리는 성년이 되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어디선가 들은 모양이었다.

“선물 말고, 소원 들어주면 안 돼요?”

“또 무슨 이상한 소문을 빌려고…….”

“엄청 쉬운 일이에요.”

머리카락을 자르던 리시안셔스가 애써 한숨을 삼키는 모습이 거울로 보였다. 스위트피는 웃음을 꾹 참은 채 리시안셔스의 의사와 상관없이 제 소원을 얘기했다.

“이제부터 이름 말고 애칭으로 불러 주세요.”

“그런 부탁은 지치지도 않나.”

사실 스위트피는 예전부터 꾸준하게 리시안셔스에게 자신을 애칭으로 불러 달라고 조르고는 했었다. 리시안셔스는 그때마다 한결같이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었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잖아.”

“옛날에 크리스의 앞에선 제 애칭을 불러 줬잖아요.”

“그건…….”

리시안셔스는 말을 하려다 말았지만, 스위트피도 그가 왜 그랬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을 거라는 크리스의 앞에서 자신을 감싸 준 것이다.

“리시안은 처음에도 절 ‘꼬마’라고만 부르다가, 이젠 이름으로 부르잖아요. 그러니까 애칭도 부르다 보면 습관이 될 거예요.”

“왜 그렇게 애칭에 집착하는지 모르겠군. 그보다는 물질적인 선물을 받는 편이 낫지 않나. 너는 예쁜 옷을 좋아하니까.”

“물질적인 선물은 제게 아무 가치도 없어요.”

머리를 다 자른 리시안셔스가 목덜미에 묻은 머리카락까지 깔끔하게 털어 주자, 스위트피는 거울로 다가가 다시 단발이 된 자신의 머리를 확인하고는 마저 하려던 말을 이어 갔다.

“이미 리시안의 금화는 제 것이나 다름없잖아요.”

“…….”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리시안의 금화로 사면 되는데 물질적인 선물이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말의 내용은 물론, 말투와 표정까지.

어쩜 저렇게 뻔뻔한 말을 하면서 당당할 수가 있는지.

리시안셔스는 영악하다 못해 얼굴도 두꺼운 제 꼬마 반려의 모습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스위트피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리시안셔스의 금화도, 그 금화를 화폐로 바꿔서 관리하는 것도, 모두 스위트피의 역할이긴 했다.

스위트피가 원하면 리시안셔스는 얼마든지 자신의 신전에 있던 금화를 소환해 손에 쥐여 주고는 했다. 그는 인간들의 화폐 시장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물질적인 제공이 필요한 것들은 스위트피이니 당연하다 생각했다.

언제 드래곤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사람들은 드래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심이 팍팍해졌다. 그런 와중에 스위트피가 아픈 다리로 또 꽃을 팔게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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