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39화 (39/120)

<39화>

길거리에는 드래곤을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드래곤들이 긴 동면에서 깨어났으며, 그들이 하나둘씩 반려가 생기고 신이 되기 위한 전쟁이 점점 심화되어 갔다.

처음에는 미신처럼 퍼지던 드래곤에 관한 소문이, 수도를 포함한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고, 드래곤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도 늘어 갔다. 이제 사람들은 드래곤의 존재 여부로 설왕설래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드래곤이 더는 신화 속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드래곤으로 인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곳이 점점 늘어나, 이제 드래곤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 마을은 드물게도 아직까지 한 번도 드래곤이 출몰하지 않은 마을이라고 했다. 그로 인해 수도에 밀집되어 있던 귀족들이 요양과 휴가를 핑계로 이 지역에 많이 내려와 있다나.

“예쁜 아가씨, 사과 하나 사세요.”

귀족들이 북적거리는 덕분에 외지인의 등장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다행인 일이지만.

“죄송해요, 가 볼 곳이 있어서요.”

스위트피는 얼마 전 리시안셔스와 함께 맞췄던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자신을 과보호하는 탓에 혼자서 외출에 나선 건 정말 몇 년 만이었다.

그래 봤자 해가 진 다음에 돌아가면 뭐라고 할 테니…….

‘서점만 들렀다가 바로 돌아가야지.’

딸랑-

종소리와 함께 목재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우리 가게에서는 보기 힘든 손님이구먼.”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적막하던 공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스위트피가 고개를 돌리자 천장까지 쌓여 있는 책 무덤 아래에서 얼굴만 튀어나온 노인이 보였다.

“이리 와서 이 늙은이 좀 꺼내 주겠나?”

“아, 네……!”

스위트피는 지팡이로 지탱하는 것도 잊고 허겁지겁 절뚝거리며 달려가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끙끙거리며 책 더미 사이에서 빠져나온 노인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책 정리를 하다가 그만 이 꼴이 되고 말았다네.”

“얼마나 이러고 계셨던 거예요?”

“어디 보자……. 한 다섯 시간쯤 되었나?”

“그렇게나 오래요?”

“워낙에 손님이 없는 가게라서 말이지. 재수 없으면 아내가 날 찾으러 오는 저녁까지 꼼짝없이 책에 파묻혀 있을 뻔했지 뭔가.”

안경을 치켜올린 노인이 스위트피의 모습을 잠시 훑더니,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젊은 처자가 이 오래되고 낡은 서점에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책 냄새가 좋아서요.”

진심이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깨끗한 책보다는 오래된 책이 주는 낡은 종이의 질감과 냄새가 좋았다. 또한 이렇게 사람들에게 잊힌 서점에서야말로 남들이 찾기 힘든 귀한 책을 찾을 수도 있는 법이었다.

“천천히 둘러봐도 괜찮을까요?”

“맘대로 하게. 어차피 오늘은 처자 말고 다른 손님은 없을 듯하니.”

노인은 이제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로 손을 아무렇게나 내저었다. 오히려 그런 노인의 성정 덕분에 느긋하게 책을 둘러볼 수 있을 듯했다.

스위트피는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갔다. 밖에서 볼 때는 무척 작아 보였는데, 서점 안은 생각보다 공간이 넓었다.

“할아버지, 오래된 신화에 관련된 책은 어디서 찾을 수 있어요?”

“가장 안쪽에 있는 책장을 살펴보면 되네! 난 이제 책 정리를 해야 하니, 알아서 찾았으면 좋겠는데…….”

“알겠어요, 방해하지 않을게요.”

스위트피는 노인이 말한 대로 가장 깊숙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벽과 붙어 있는 넓은 책장 전체가 신화와 역사에 관한 책으로 가득했다. 드래곤의 존재가 퍼지면서 사람들은 드래곤에 관한 책을 많이 찾고는 했다. 그러나 서점에서 나온 책들은 대부분 최근에 나온 책들로, 드래곤으로 인한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한 내용이 한가득이었다.

드래곤은 악마라는 얘기부터, 드래곤을 사냥하는 법, 혹은 드래곤을 신으로 찬양하며 없는 이야기를 지어 내는 등등……. 그나마 얼마 전, 기대하지 않고 들렀던 오래된 서점에서 그나마 괜찮은 책을 구했던 기억이 있었다.

리시안셔스도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드래곤의 신화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의 기억 하나로 스위트피는 오늘도 쓸 만한 책이 있을까 싶어 이 낡은 서점에 들른 것이었다. 또 학교를 다니지 않은 탓에 공부할 책도 필요했고 말이다.

공부를 먼저 제안한 리시안셔스로 인해 시작한 지는 2년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줄 알고 속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리시안에게 고마운 일이지.’

여관에서 불퉁한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리시안셔스를 떠올린 스위트피가 쿡,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갈무리하며 다시 차분하게 책장을 훑기 시작했다.

* * *

구부정한 허리로 책을 하나씩 들어 분류하고 정리하던 노인은 뒤에서 들리는 작은 종소리에 다시 뒤를 돌았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이 오는구먼.”

“실례합니다만, 어르신. 드래곤에 관한 책을 찾고 있는데요.”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게.”

“감사합니다.”

딱 보아도 귀족으로 보이는 행색이건만, 오랫동안 이 지역을 떠나지 않아 근래 들어서나 귀족 구경을 해 본 노인의 말투에는 굽신거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남자도 노인의 태도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원하는 책을 찾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다지 청결하지도 못하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서점의 깊숙한 곳. 그곳에서 남자는 요정을 목격하고 말았다. 어깨 밑으로 살짝 내려오는 곱슬곱슬한 금발을 가진 요정이 사다리를 올라타고 있었다.

“어어……?”

한쪽 발로 마저 위로 올라가려던 요정은 사다리를 헛디디더니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쿠웅-!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이미 스위트피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 스위트피를 구하러 달려간 것이다.

“으윽…….”

그러나 이제까지 무거운 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남자는 스위트피를 멋있게 안아서 받쳐 주기는커녕, 스위트피의 아래에 깔린 신세가 되었다.

“괘, 괜찮으세요?”

한편, 아픈 다리가 중심을 잃고 아래로 추락하는 순간부터 고통을 기다리던 스위트피는,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밑에 깔린 남자 때문에 허둥거렸다. 덕분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자신 때문에 다쳤을 수도 있다.

“저, 저기…….”

그런데 남자는 스위트피가 몇 번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자신만 올려다볼 뿐이었다.

혹시, 머리를 다친 건가? 진짜로 머리를 다쳤으면 일이 커지는데.

스위트피는 난감함에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 거참! 안 그래도 저 책 더미 때문에 골머리 아파 죽겠는데, 왜 얌전히 책 구경은 안 하고 어지럽혀?”

때마침 노인이 큰 소리가 들리자 가까이 다가오며 호통을 쳤다. 스위트피가 떨어지면서 실수로 함께 떨어진 몇 개의 책을 보고서 하는 소리였다.

“죄송…….”

“죄송합니다, 어르신.”

스위트피 대신 말을 자르고 사과를 건넨 건, 이제 막 상체를 일으킨 남자였다.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려다 제가 실수하고 말았네요. 알아서 정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휴, 그렇게 안 생겨서는…….”

남자는 스위트피의 실수까지 자신이 대신 덮어썼다. 노인이 혀를 차며 다시 물러가자 먼저 몸을 일으킨 남자가 아직도 주저앉아 있던 스위트피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거의 하루 종일 리시안셔스와 붙어 있다시피 하다 보니 제 또래의 낯선 남자와의 이런 접촉은 처음이었다. 스위트피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남자…….

‘왜 얼굴을 붉히는 거람.’

스위트피는 의아함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나 관자놀이까지 얼굴을 붉힌 남자는 고개를 황급히 돌리느라 못 봤을 것이다.

“제 이름은 헤이든 모러라고 합니다.”

스위트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진 책을 대신 주운 남자가 스위트피에게 대답을 바라듯 빤히 바라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상대가 먼저 통성명을 했으니, 나도 알려 줘야 맞겠지.

스위트피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스위트피 로렌이에요.”

“어,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름이시군요!”

“……감사해요.”

“어찌 연약한 숙녀분께서 직접 이 험한 사다리를 오르셨습니까?”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요.”

이 서점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노인과 자신뿐인데, 바닥에 떨어진 책을 줍는 것도 버거워하는 듯한 노인에게 사다리를 올라가 책을 꺼내 달라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헤이든 모러라는 남자의 말처럼 이 사다리가 여자가 올라타기에 그리 험한 것은 아니었다.

제 다리가 문제라서 그렇지.

스위트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전, 잠깐 책장에 세워 놓았으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지팡이를 줍기 위해 몇 걸음 걸었다. 남자는 스위트피가 걷는 모양새를 보며 ‘아……’,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임새를 길게 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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