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세상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자신처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불쌍해한다거나, 혐오한다거나 하는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그냥 수많은 인간들 중 한 명으로 봤다. 세상에 무심한 듯 보이지만 제게는 다정해서 자신이 걷다가 힘들어하면 발을 맞춰 주거나 안아 주고는 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사람들을 대할 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해서 다정한 사람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리시안셔스가 다정함을 베푸는 대상은 자신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이루는 기본적인 규칙은 지키려고 했다.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거나, 약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쉬이 봐주거나.
……하지만 그런 것들 말고. 내가 리시안셔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뭐지.
“어때? 너도 꽤 혹한 거 같은데.”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궁금하잖아, 리시안셔스의 과거.”
“제, 제가 그런 걸 왜 궁금해하겠어요? 과거일 뿐인데!”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리시안셔스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지금의 그는 자신의 옆에 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이 그의 전부일 것이다. 여기서 더 알아야 할 건 없다. 알 필요도 없다.
분명히 그럴 텐데…….
“너도 봤을 거 아니야.”
“…….”
“리시안셔스의 과거를.”
“무, 무슨…….”
“내가 만든 환각 속에서.”
“……!”
수도에서 디에고에 의해 환각에 빠진 리시안셔스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역시 그때 내가 봤던 건 리시안의 실제 과거가 맞구나.’
그때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보았던 모습들 중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었다. 특히 자신이 아니라 웬 여자를 곁에 둔 그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는데…….
그런데 그 여자의 얼굴이…….
“거기서 혹시, 리시안셔스 말고 익숙한 얼굴을 하나 더 보지 않았어?”
“…….”
“봤구나, 죽은 네 자매의 얼굴.”
천천히 바닥으로 떨궈지던 고개가, 다시금 위로 올라갔다. 스위트피는 그날 자신의 마을을 집어삼켰던 불길처럼 새빨간 머리와 눈을 한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 언니를 언급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드래곤이 언니의 심장을 뽑던 그 순간이 말이다. 그런데 감히 뻔뻔하게 자신의 언니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언급하다니……!
“지금에서야 깨달은 거지, 그때는 네 자매인 줄 몰랐어. 물론 알았대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조용히 해! 우리 언니 얘길 그 입에 담지 마!”
“난 또, 그 여자의 거죽을 뒤집어쓴 닮은 인간인 줄 알았지.”
“시끄러워!”
스위트피가 겁도 없이 디에고의 몸을 마구 때렸다. 물론 타격이 있을 리 없었다.
장난치듯이 킬킬 웃으며 스위트피의 주먹을 받아 주던 디에고는 조금 성가셔지자 단번에 스위트피의 두 손목을 한 손에 붙잡아 제압했다.
“까불지 말렴, 꼬마야.”
“흐으…….”
“난 지금 너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기회?”
“리시안셔스는 네 자매의 얼굴을 몰라.”
“…….”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잘은 모르겠지만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언니와 아주 먼 옛날에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서로 다른 시기에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어쩌면 리시안셔스가 아끼던 그 사람은 그저 언니를 닮은 여자일 수도 있지만…….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가 두 번이나 죽었다고 하면, 그 자식이 어떤 기분일까?”
“…….”
“사랑하는 여자는 죽고, 그 대신 동생이 살아남아서 반려로 연결된 거라면?”
“거, 거짓말하지 마!”
“무슨 거짓말? 리시안셔스가 너의 자매를 사랑했다는 거?”
“언니는 성년이 되지도 못하고 당신 손에 죽었는데……. 근데 어떻게 리시안셔스가 살던 그 시대에서 둘이 만났겠어요? 내게 혼란을 주려고 아무 말이나 지어내는 거죠?!”
마구 따져 대는 스위트피의 말에도 디에고는 웃기만 했다. 승리에 도취된 미소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그가 지금의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리시안셔스의 반응이 궁금하다면 직접 가서 얘기하든가.”
“리시안이 당신 말을 믿을 거 같아요?!”
“나름 증거도 가지고 있거든. 그나저나, 리시안이라고? 꼴에 반려로 연결된 사이라고 귀여운 짓을 하는구나.”
디에고는 버둥거리는 스위트피의 몸을 가까이 당겼다.
“리시안셔스에게 비밀로 해 줄게.”
“…….”
“그가 널 원망하기 전에 날 선택해.”
“그럴 일 없어요!”
“그렇다면, 뭐.”
디에고는 순순히 스위트피를 놓아줬다.
오랫동안 강한 악력에 붙잡혀 있어 아픈 양쪽 손목을 어루만지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디에고를 노려봤다. 물론 디에고는 무서워하기는커녕, 피식 웃을 뿐이었다.
“오늘은 물러나 줄게.”
“뭐라고요?”
“지금 네 상태를 보고 나니, 확신이 생겼거든.”
“…….”
“넌 이미 내 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
“절대 아니에요!”
“결국 네 스스로 내게 오게 될 거야.”
“그럴 일은 절대 안 일어날 거예요.”
스위트피가 아무리 부정해도 디에고는 이미 확신에 차 있었다.
“결국 드래곤과 반려는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던데, 보아하니 넌 아직 작아서 사랑 같은 감정은 모르겠군.”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사랑을 알기 전에 내게 와.”
그럴 일 없다고 쏘아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디에고가 더 빨랐다.
“그럼, 오늘은 이만.”
그는 정중한 신사처럼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상체를 숙였다. 신사를 흉내 내면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디에고와 눈이 마주친 찰나였다. 디에고는 순식간에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스위트피를 낚아챘다.
“으앗!”
그러고는 아까 지상에 내동댕이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힘으로 스위트피를 내던졌다.
“아아아악!”
마치 튕기고, 던지며 노는 공이라도 된 것처럼 스위트피는 멀리 날아갔다. 몸이 날아가는 탓에 느껴지는 거센 바람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던 스위트피의 흐린 시야로 거대한 바위산이 보였다.
‘부딪힌다……!’
충돌을 예감한 스위트피가 눈을 질끈 감던 그 순간이었다.
“…….”
거칠게 날아가던 스위트피의 몸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바위산과 충돌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조심스럽게 실눈을 뜨자, 자신의 몸통을 낚아챈 또 다른 드래곤이 보였다.
이번에는 안심할 수 있었다. 믿고 기다렸던 자신의 드래곤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시안.”
리시안셔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리시안셔스……?”
그 대신 스위트피는 어마어마한 분노를 느꼈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가 아니었다. 리시안셔스가 현재 느끼고 있는 분노였다. 평온하던 날갯짓은 잠시뿐, 리시안셔스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리시안! 그만요!”
스위트피는 그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지금 리시안셔스의 귀에는 스위트피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리시안!”
『왜 말리는 거지?』
스위트피가 그를 한참 부르자, 그제야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목소리에 답을 했다. 물론 여전히 속도는 늦추지 않은 채였다.
『내가 그놈에게 질 거 같아서 그런가?』
“그게 아니라, 저……. 더는……. 우욱……!”
결국 스위트피는 드래곤에게 붙잡혀 하늘 위에서 구토를 하고 말았다.
* * *
사람이 없는 지상에 내려 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속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 줬다.
“못 볼 꼴 보여서 미안해요……. 근데 진짜 어쩔 수 없었어요…….”
“괜찮다. 너 같은 꼬마를 배려 못 한 내 잘못도 있지.”
“꼬마라고는 하지 말고요…….”
평소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간 리시안셔스와 이동할 때는 그가 적당한 속도로 날아 주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디에고는 리시안셔스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자신을 데리고서 최고 속도로 날았고, 그뿐만 아니라 산에 내려놓을 때도 바닥을 굴렀다.
그걸로도 모자라 디에고는 리시안셔스의 추격을 한 번 더 따돌리기 위해 자신을 미끼처럼 멀리 던져 버리기까지 했다. 인간의 몸으로 드래곤이 속도와 힘에 이리저리 휘둘리니 몸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옷에 토 묻었는데……, 미안해요…….”
“더럽지만 닦으면 되니, 괜찮아.”
“빈말로도 더럽지 않다는 말은 안 하네요…….”
이따가 이동할 때 리시안셔스를 타게 될 텐데, 자신의 옷에 토가 묻어 있었다. 애써 장난으로 넘어가고 있긴 하지만 이런 더러운 모습을 보여 준 게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괜히 고개를 숙인 채 입술만 우물거리던 스위트피를 보던 리시안셔스가 가까이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오늘 일은 내 잘못이다.”
“네?”
“내가 부주의했어.”
“…….”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도록 하마.”
지금 리시안셔스가 자신에게,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 그를 알게 되었을 때를 떠올리면 믿기지 않을 상황이었다. 조금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직도 머릿속에 디에고가 했던 말이 맴돌았지만 애써 기억 저편으로 밀어낸 스위트피가 베실베실, 웃었다.
“앞으로도 리시안이 저 지켜 줄 거예요?”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제가 재미없어져도요?”
“넌 가만히 있어도 재미있으니 안심해도 돼.”
“그럼 제가 어른이 될 때도 리시안이 곁에 있겠네요?”
“그래.”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요?”
“아직 어른도 안 된 꼬마가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는구나.”
진짜로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가 자신의 곁에 있어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미지수지만, 굳이 그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하는 거예요.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지켜 주기로.”
“어른이 된 다음에도 지켜 드리죠, 꼬마 반려님.”
스위트피의 새끼손가락에 리시안셔스의 새끼손가락이 걸렸다. 디에고에게 들은 말이 계속 신경 쓰였지만 눈앞의 리시안셔스가 제게 너무 다정해서, 스위트피는 아무 말도 듣지 않았던 것처럼 웃을 수 있었다.
리시안셔스가 함께 있어 준다고 하니, 어른이 된 후의 미래가 기대되었다. 그리고 그 기대했던 미래는 스위트피의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