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마지막 기회다.』
『…….』
『이대로 도망가.』
반려를 잃고 나약해진 드래곤은 리시안셔스를 이길 수 없다. 갓 봉인이 풀린 직후의 나약했던 상태라면 모를까. 리시안셔스는 디에고의 망각에서 빠져나온 이후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원래의 힘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러니 안타깝지만 그가 지금의 자신을 이길 방법은 절대 없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내뿜는 화염도, 날갯짓도, 물어뜯으려는 힘도. 모두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어차피 난 반려를 잃은 몸. 언젠가는 죽는다.』
그럼에도 모든 걸 다 잃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드래곤은 두려울 게 없다는 듯이 리시안셔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마을 사람들은 입구 쪽에서 드래곤을 발견하고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드래곤의 모습에 신기해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지 않게끔 싸우는 드래곤들의 모습에 도망쳐야 하는 것인지, 헷갈려 하는 듯했다.
리시안셔스는 경고의 의미로 마을 입구 앞까지 불을 내뿜었다. 땅에 붙은 불길이 입구와 드래곤들의 중앙 사이에 벽처럼 가로막았다. 리시안셔스가 적의 몸통을 발톱으로 찍어 내리누르자, 결국 나약해진 드래곤의 몸뚱어리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가 정말 마지막 자비로 그에게 떠날 기회를 한 번 주려고 할 때였다.
『그런데 말이야.』
순응하듯이 눈을 감던 드래곤이 갑자기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다 이긴 싸움이라고 해도 그렇지…….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닌가? 그러다가 뒤통수 맞아. 나도 방심하다가 반려를 잃었거든.』
『무슨 뜻이지?』
마치 뜻한 바를 모두 이룬 것처럼 의기양양한 그 모습에 리시안셔스가 불길함을 느낄 때였다. 제 반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시안셔스!”
리시안셔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스위트피는 이미 저만치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드래곤, 디에고의 발에 붙잡힌 채.
리시안셔스는 제 발밑에 깔린 드래곤의 존재도 잊고서 스위트피를 납치한 디에고를 추격하기 위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크윽!』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단번에 디에고를 추격할 수 없었다. 자신을 쫓아 날아오른 드래곤이 자신의 발목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디에고와 손을 잡다니, 어리석은 짓을 했군.』
『너도 반려를 잃는 고통을 똑같이 느껴 봐야지!』
처음부터 이 드래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었다. 디에고가 스위트피를 납치할 수 있도록 주의를 끌었을 뿐이다.
* * *
“이거 놔!”
다른 드래곤의 발에 꼼짝없이 잡힌 스위트피는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내리쳤지만, 거대한 드래곤이 작은 생명의 보잘것없는 공격에 휘청거릴 일은 없었다.
‘힘을 써야 해……!’
인간의 힘으로 상대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바위 뒤에 숨어 리시안셔스가 무사한지 살펴보고 있던 스위트피는 너무 순식간에 낚아채여서 디에고에게서 미처 자신을 방어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한다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디에고를 저지했던 적이 있으니 말이다.
스위트피는 힘을 쓰기 위해 집중했다. 맑은 녹안에 이채가 서리고, 하늘을 날던 새들이 비행하던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날아오려던 그 순간이었다.
“아악!”
디에고가 비늘 덮인 발로 감싸고 있던 스위트피의 몸통을 세게 조였다. 덕분에 정신은 흐트러졌고, 동물들과의 소통도 끊어졌다. 디에고는 이런 식으로 스위트피가 벗어나려 힘을 쓸 조짐만 보이면 몸을 옥죄여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비겁한 놈……!’
비열함에 치가 떨렸으나 스위트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분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아아악!”
나무가 우거진 산에 내려옴과 동시에 스위트피는 디에고에 의해 내동댕이쳐져 바닥을 굴렀다. 스위트피는 옷이 더러워질 정도로 바닥을 구르면서도 기회를 엿봤다.
주변에 식물과 동물이 많은 환경이라면 내게 유리해.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드래곤처럼 길쭉하고 뾰족해진 손톱을 목에 들이댄 인간화한 디에고가 웃으며 협박했다.
“네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 순간, 널 바로 죽일 테니까.”
“…….”
“그럼 너의 드래곤이 참 슬퍼할 거야. 그렇지?”
“거, 거짓말!”
스위트피는 금방이라도 이 날카로운 손톱이 자신의 목을 그어 버릴까 봐 두려웠지만, 억지로 용기를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어요!”
“오호,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모든 것은 자신의 예상일 뿐이라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쓸데없이 용감하게 구는 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마을을 파괴한 이 드래곤에게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날 죽일 거였다면 여기까지 굳이 끌고 오지도 않았겠죠.”
마른침을 삼키며 억지로 디에고와 눈을 맞추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다른 드래곤이 리시안셔스의 주의를 끄는 사이에 바로 내 심장을 뽑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리시안셔스에게 추격당할 걸 알면서도 굳이 날 따로 끌고 온 건……, 내게 다른 목적이 있어서잖아요.”
“똑똑한 아이구나.”
“칭찬할 필요 없어요. 수도에서 당신이 다 알려 줬던 거니까.”
자신의 마을이 파괴되었던 그 날 이후, 수도에서 다시 만난 디에고는 제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난 정말 너를 해칠 생각이 없어. 네 심장에도 관심이 없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죽지는 않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드래곤, 그리고 다른 드래곤의 반려. 이 둘 사이에 있는 접점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는 자와 심장을 뺏으려는 자라는 거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심장이 목표가 아니라면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자신을 노리는 거지?
“나한테 왜 이래요? 원하는 걸 말해요!”
“그보단, 내가 너한테 뭘 해 줄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하지 않아?”
디에고는 여전히 스위트피의 목에 들이밀고 있는 흉기와도 같은 손톱을 거두지 않은 채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스위트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말 말고 이러는 이유나 말하라고요!”
“안 되지. 그러면 협상이 안 되거든. 내가 원하는 것만 말하면 넌 거절할 게 분명하니까.”
아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만 해대는 디에고가 두려웠다. 점점 두려움을 숨기는 게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네가 날 돕는 대가로 가질 수 있는 것부터 말해 줘야지.”
회유라도 하듯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무엇보다 살벌한 협박이었다.
“날 도우면 넌 내 옆에서 많은 걸 누릴 수 있어. 말만 해. 금은보화는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이 네 발밑에 고개를 조아릴 거야.”
“…….”
“네가 내게 손을 내밀어 주기만 한다면.”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제가 그쪽을 도울 마음도 없지만, 돕는다고 해도 뭘, 어떻게 도우라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아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넌 날 도울 수 있어. 왜냐하면 너는…….”
마저 설명하려는 듯하던 디에고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으음……. 아니야. 굳이 그런 거까지 지금의 네게 얘기해 줄 필요는 없겠지.”
스위트피는 약간은 제정신이 아니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게 집요한 집착을 보이는 듯한 디에고를 살피며 머릿속을 열심히 굴렸다.
내가 디에고를 도울 수 있다고?
서로 반려로 묶인 관계도 아닌데.
일개 인간인 내가, 리시안셔스도 이기지 못한 드래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생각만 한다고 해서 머릿속의 이 혼란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말해요.”
도울 생각이 생긴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디에고가 제게 이러는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당신이 내게 주겠다는 것들 관심 없으니까, 자꾸 얘기 빙빙 돌리지 말고 얘기하라고요. 내게 원하는 게 뭔지.”
“……그래. 슬슬 대화가 재미없어지긴 하더라.”
스위트피의 목을 노리던 손톱을 거둔 디에고가 여상한 태도로 얘기했다.
“그럼 새로운 협상을 제시하지. 이번엔 네가 진짜로 혹할 만한 얘기야.”
“……이봐요.”
제게 원하는 걸 말하라고 했더니만, 또 자신을 꼬드기려고 쓸데없는 말을 하려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든 관심조차 없는데.
“리시안셔스에 대해 더 알고 싶지 않아?”
……분명 그랬을 텐데.
“제가……, 리시안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할 게 있나요?”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신도 이제 리시안셔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다정했으며, 인간이 아니라 그런 거겠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