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저도 어른이 되면 좀 더 클걸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뭔데요?”
“네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이만하면 어떡하지?”
“리시안!”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는데.
아무래도 꼬마의 귀에는 마냥 놀리는 소리로만 들린 모양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씩씩거리는 스위트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괜히 머리 쪽에 과하게 힘을 줘 눌렀다가는 안 그래도 작은 키가 더 작아질까 봐 관두기로 했다.
그 대신, 스위트피가 들고 있는 가방을 낚아채듯이 들고는 앞서 걸었다. 스위트피는 앞서 걷는 리시안셔스를 따라잡기 위해 불편한 다리로 서둘러서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일정하지 못한 박자의 발소리를 들은 리시안셔스가 잠시 멈춰 서서 스위트피를 기다려 줬다.
작은 몸이 곁으로 다가오자, 리시안셔스는 자연스럽게 팔을 벌렸으나 스위트피가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서 걸을 수 있어요.”
리시안셔스는 어느새인가부터 자연스럽게 스위트피를 안아 들고 이동했다. 본연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일 때도 말이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유해지는 리시안셔스의 모습이 좋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스위트피는 때때로 리시안셔스와의 접촉에 마음이 불편해지고는 했다.
‘심장이 아프다고 해야 하나…….’
리시안셔스가 예상치 못하게 웃거나, 저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 보게 되면 추운 날씨에도 열이 오르며 더워지고는 했다. 아직 이 현상의 병명에 대해 스위트피는 아는 게 없었다. 그리고 왜인지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날 여러 번 구해 줬고, 항상 내 곁에 있어 주니까.’
그러니까 내가 리시안을 보고 가슴이 간지럽다면 그건 가족 같은 의미로 좋아서 아닐까.
옛날에 예쁜 우리 언니가 날 보고 웃어 줄 때마다 기분이 좋았던 것처럼.
그렇게 리시안셔스는 모르게 혼자서만 자신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들은 어느새 마을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외진 곳에 있는 규모가 작은 마을이라 이동하는 시간이 짧은 덕이었다.
이제 사람들이 없는 언덕에 올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리시안셔스와 함께 이동하면 되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어둠이 드리워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화창하던 날씨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휘이이이-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부류의 돌풍이 불어왔다.
“스위트피.”
리시안셔스가 이제는 익숙하게 스위트피의 이름을 불렀다.
“마을로 돌아가 있어.”
“네? 하지만 그러면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요.”
“지금 네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지금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나무 하나 없이 사방이 뚫려 있는 언덕과 마을뿐이었다. 나무라도 우거져 있다면 모를까, 그나마 스위트피가 작은 몸을 숨길 곳은 마을뿐이었다.
“안 돼요, 리시안. 마을 사람들이 다칠 거예요.”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전에는…….”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예요!”
아마 지금 리시안셔스가 하려는 얘기는 그것일 것이다. 스위트피가 마고 부인과 함께 살던 시절에 리시안셔스에게 마을을 통째로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던 일 말이다. 그때는 타인의 죽음과 희생을 생각하지 않던 아이가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만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라.’
그때는 당장 자신의 상처와 분노에만 눈이 멀어 타인을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내가 그때 얼마나 이기적이었고 나쁜 짓을 한 건지 알고 있어요.”
“…….”
“그때의 나는 내 상처와 분노만 중요해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때의 내 잘못을 알고 있고, 그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다른 사람을 생각지 못했는데…….”
“…….”
“지금 제 옆에는 리시안이 있잖아요.”
지금은 내 옆에 당신이 있어 타인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요령 없는 자신의 말이 리시안셔스에게 전달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을 지키자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일로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지 않게 하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자세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저 멀리서, 드래곤의 형체가 보였다.
“언덕으로 달려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보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언덕 밑에 있는 바위 뒤에 숨어 있어.”
스위트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상황에 허둥대지 않고 서둘러서 언덕을 올랐다. 스위트피가 언덕을 오르는 사이, 리시안셔스의 몸은 점점 인간의 가죽 위로 비늘이 돋아나며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본체로 돌아간 리시안셔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모든 것이었던 하나의 존재를 잃고, 더는 두려울 것이 없어진 드래곤이 자신을 부추기는 디에고에게 물었었다.
「한데, 리시안셔스가 반려와 함께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아낼 생각이지?」
가까운 곳에 있는 동족의 기운을 느끼는 거까지는 가능하다. 강한 힘을 가진 드래곤은 분명 인간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지상을 지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간들과, 그들에 비해 소수인 드래곤은 그 기운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드래곤의 존재를 운 좋게 느낄 수 있는 것일 뿐.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드래곤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디에고는 아무런 걱정 말라는 듯이 씩,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이 뿔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 잊은 거야?」
디에고는 고린도(뿔)을 통해 리시안셔스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에고는 그가 말했던 대로 리시안셔스를 찾아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도망치는 반려를 보호하기 위해 코앞까지 빠르게 날아오른 리시안셔스가 있지 않은가.
『……그날 이후로 오랜만이군.』
그도 설마 반려를 잃은 드래곤이 복수하기 위해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 그가 조금이라도 감정의 동요를 보였으면 좋겠다. 어차피 끝은 똑같은 복수지만, 그래도 그가 죄책감이든, 위기감이든, 감정의 동요를 보였으면 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
리시안셔스에게서 나온 첫마디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나를, 기억 못 해……?』
자신의 앞에서 제 반려를 무참히 죽인 첫 번째 드래곤은, 자신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지?!』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포효한 드래곤이 리시안셔스를 향해 돌격했다. 리시안셔스는 날갯짓을 통해 돌풍을 날려 보내 제게 달려들려는 드래곤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그가 뿜어 대는 불꽃도 리시안셔스의 돌풍 때문에 그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반려가 없군.』
리시안셔스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반려를 만나지 못한 드래곤은 아닌 거 같았다. 그는 자신을 만난 적 있는 것처럼 굴 테니까.
물론 모든 드래곤은 자신을 알 테고, 한 번씩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드래곤들에게 잠들기 이전의 그는 드래곤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첫 번째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저 드래곤은 봉인되기 이전의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분명 봉인 이후를 말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제게 이렇게까지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정도면, 그의 반려는 아마도…….
『내 반려는 죽었다.』
자신이 죽인 걸 테다.
『내 눈앞에서 그 아이의 심장을 뽑았지!』
……역시.
『내가 미안해야 하나.』
기어코 돌풍을 뚫고 날아온 동족을 향해 리시안셔스가 조금의 동요도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는 리시안셔스의 목덜미를 물었다. 비늘이 날카로운 이빨에 의해 긁히며 피가 흘렀다. 이런 복수가 조금의 화풀이나마 된다면, 조금은 당해 줄 수 있었다. 그것이 리시안셔스가 반려를 빼앗아 간 제 동족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아량이었다.
리시안셔스는 화염을 내뿜었다. 다시 한번 리시안셔스에게 달려들려던 드래곤은 정면으로 불꽃을 맞고 날갯짓에 힘을 잃어 추락할 뻔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너도 반려가 있으면서!』
그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외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리시안셔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되묻는 말이다. 너 또한 네 반려를 지키기 위해 다른 반려의 심장을 취했을 텐데.』
그도 본인이 최종까지 살아남아 신이 되기 위해서든, 반려를 위해서든. 동족의 반려를 죽이고, 눈앞에서 그 반려의 심장을 뽑았을 것이다. 그래 놓고 역으로 자신이 당해 반려를 잃자, 크나큰 죄를 지은 것처럼 분노하며 복수하려 하고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재미로 인간을 밟아 죽이는 잔인한 성향을 가지진 않았다. 그에게 인간은 그저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작은 존재들일 뿐이었다. 마음이 내킨다면 그들에게 자애롭게 굴며 지켜 줬지만, 지나치게 거슬리거나 필요하다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게 생명을 앗아 갈 수도 있었다.
인간들이 작고 귀여운 소동물을 때로는 지켜 주다가도 필요하면 죽여서 잡아먹거나 미끼로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봉인되기 이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건대, 대다수의 드래곤들은 두 가지의 성향으로 나뉘었다. 리시안셔스처럼 인간에게 호의도 적의도 갖고 있지 않은 드래곤들과, 때때로 재미로 인간들을 죽이는 드래곤이 대다수였다.
물론 그는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한 명의 인간에게만 예외를 뒀었지만.
그런데 지금에 와서 드래곤들이 자신의 반려인 인간을 지키고, 결국엔 잃자 이토록 슬퍼하는 모습이라니. 기묘하고도 낯선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