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신이 연결해 준 반려를 받아들이다니, 너답지 않은데?」
걸음을 옮기던 도중, 리시안셔스는 문득 봉인이 풀린 후 재회했던 디에고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조그마한 꼬마를 진심으로 자신의 ‘반려’로서 여기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든 자신이 스위트피를 가볍지 않은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 통에도 제 아이나 키우던 동물을 못 버리는 인간들의 심리가 아마 자신과 비슷하지 않을까. 만약 자신이 스위트피를 떠난다면, 그 애가 혼자서 어찌 살아갈지 걱정부터 드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가 스위트피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리시안셔스는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그건 아니라고.
물론 꼬마가 듣는다면 무척 섭섭해할 테니, 되도록 스위트피의 앞에서 이런 속마음을 굳이 꺼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굳이 스위트피가 제게 자신이 소중하냐고 물어볼 일은 없을 거 같지만.
‘디에고, 그 녀석은 무슨 꿍꿍이지.’
디에고는 한때 리시안셔스와 가장 가까운 동족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신에게 버림받은 디에고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노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반려라서 스위트피를 노린 것일 수도.
수도에서의 일 이후로 아직까지 디에고를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언젠가는 다시 디에고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디에고가 자신을 찾아올 테니까.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에고는 예나 지금이나 리시안셔스에게 중요한 존재를 노리고 있었다. 반년 동안 다른 드래곤의 습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을 어느 정도 되찾은 리시안셔스는 약간의 어려움은 겪을지언정, 큰 위기 없이 스위트피를 지킬 수 있었다. 더욱이 먼저 공격한 드래곤 반려의 심장을 취해 스위트피가 죽는 것을 막기도 했다.
물론 죄 없는 인간의 심장을 빼내는 일은 최대한 스위트피에게 들키지 않고 해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동반되기는 했지만.
하지만 디에고는 다른 드래곤들과 달랐다. 디에고는 결코 가볍게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만약 디에고가 자신들을 찾아와 또 공격한다면, 그때는…….
적어도, 아직은 그때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리시안셔스는 유독 달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지상의 존재들과 소통을 끊은 지 오래된 신께 부탁했다. 조금만 더 이 평화로운 날을 지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 * *
대개의 드래곤들은 반려를 잃고, 자신도 바로 죽기 마련이었다. 제 반려의 심장을 취한 적이 슬픔과 분노에 몸부림치는 드래곤을 살려 둘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아주 드물게도 반려를 잃고도 살아남은 드래곤들이 있다.
만약 다른 드래곤의 공격으로 자신은 죽지 않고 반려만 죽은 경우. 그 드래곤은 1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죽어 간다. 마치 반려를 지키지 못한 드래곤을 벌하기라도 하듯이 그 시간은 몹시나 길고 고통스럽다.
깊은 산골짜기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이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다. 반년 전, 제 반려의 심장을 노린 드래곤을 처리한 그는 늦은 밤이라 어쩔 수 없이 반려와 숲속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미 한차례 전투가 끝난 뒤라 방심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새까만 밤하늘을 날면 무엇이 하늘이고 몸체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어두운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그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서 반려의 심장을 뽑아 갔다.
보통은 그러면 반려를 잃은 드래곤의 숨도 끊어 놓건만. 어쭙잖은 자비였을까. 위대한 드래곤들의 아버지라 불리던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살려 두고 사라졌다. 덕분에 그는 반려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1년 안에 맞이할 자신의 죽음이 최대한 빨리 찾아오길 바라면서. 그런데 근래, 산속에만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때마침,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동족의 날갯짓이 만들어 낸 바람이었다. 또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고개를 들자 머지않아 회색 드래곤이 날아와, 인간형으로 변해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디에고.』
디에고는 종종 이렇게 찾아와 반려를 잃은 드래곤에게 의미 없는 위로를 건네고는 했다. 그러나 그도 디에고가 어떤 드래곤인지 알고 있었다.
정말 연민과 선의로 인해 슬픔에 잠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거라고?
비열한 수를 써서 다른 동족을 끌어내리고 고린도(뿔)를 훔친 디에고가?
“내 오래된 친구여. 아직도 슬픔에 잠겨 있나? 어디 보자, 그대가 반려를 잃은 지 이제 반년이 지났나? 앞으로 오래 살아 봤자 고작 반년 더 남은 셈이군.”
『…….』
“그만 우울해하고 짧은 생을 잠시라도 즐겨 보는 게 어때? 같은 동족으로서 안타까워하는 말이야.”
그동안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야 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서 상대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계속 끈질기게 찾아오는 것을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용건이 뭐지?』
“말했잖아? 난…….”
『넌 그 누구에게도 연민을 느낄 줄 모르지. 선의라는 것이 네게 존재하긴 하나?』
악담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오히려 디에고는 웃음기를 띠었다. 마치 이제야 만족스러운 반응을 이끌어 냈다는 듯이.
『내게 접근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
그제야 디에고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제의를 꺼냈다.
『심장을 빼앗긴 반려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디에고의 발언은 반려를 잃은 드래곤에게는 유혹적이었다. 죽기 전에 단 한 가지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반려의 복수만을 원했다.
“둘기야, 안녕.”
멍투성이의 스위트피는 가방을 챙긴 채, 창문 앞에서 비둘기에게 마지막으로 빵가루를 나눠 줬다.
[안녕이라니? 아침 인사 ‘안녕’이냐? 반갑다는 ‘안녕’?]
“작별의 인사야.”
[인간아, 그게 무슨 말이냐. 작별이라니?]
애초에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다른 드래곤들에게 쫓기는 삶이 일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습격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는 항상 길어 봤자 3일을 넘기지 못하고 많은 지역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니 우연히 이 마을에서 재회한 비둘기와도 이제 작별할 때가 된 것이다.
[인간아!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 법이 어디 있어? 나는, 나는…….]
사람들은 비둘기의 표정을 읽지 못했지만, 스위트피는 비둘기가 인간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표정이란 것을 알아챘다.
그동안 많이 까불긴 했으나, 역시 비둘기도 제게 정이 든 모양…….
[앞으로 내 빵은 누가 챙겨 준단 말이야?!]
……이 아니었던 듯했다.
애틋한 착각에 빠져 있던 스위트피는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인간아, 그러지 말고 나도 함께 너의 동료로 받아다오.]
“동료?”
[길거리 생활은 서커스단에서 최소한의 노동만 하며 귀하게 살아온 나와는 맞지 않는다. 거리의 비둘기들은 너무 야만적이야!]
“그래서 널 거둬서 앞으로도 빵 부스러기를 아낌없이 내어달라, 이 말이야?”
스위트피의 빈정거림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비둘기가 눈동자에 비굴함을 가득 담은 채 말을 바꿨다.
[빵 부스러기 따위는 상관없다. 난 널 친구로 생각한단 말이다!]
……친구 같은 소리 하네.
스위트피는 비둘기를 흘겨보며 창문을 닫으려 했다.
[안 돼! 마지막 남은 빵이라도 다 내놓고……, 악!]
진짜 마지막이라는 것을 느낀 비둘기가 결국 음흉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나, 창문 사이로 침투하려던 비둘기는 리시안셔스에 의해 목이 잡힌 채 버둥거렸다.
“네가 얼마나 작고 쉬워 보였으면 이따위 미물도 널 만만히 대하겠니.”
가벼운 동작으로 비둘기를 창문 밖으로 던지다시피 한 리시안셔스가 혀를 차며 타박했다.
“그게 제 탓인가요?”
“네 탓이지.”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불필요할 정도로 친절해.”
“친절한 사람은 사랑받는 법이랬어요.”
“저 비둘기에게 사랑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보지?”
“……저렇게 배은망덕한 놈까지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비둘기의 인성은 좋게 쳐 줄래야 쳐 줄 수가 없었다. 미운 정도 정이랬지만 스위트피는 약간의 정 때문에 비둘기를 두둔해 주진 않았다.
“그리고 넌 너무 작아.”
“제 키가 안 자라는 게 어떻게 제 잘못이에요?”
그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긴 했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바로 어제의 사건 이후에 리시안셔스가 든 생각은 스위트피가 작아도 너무 작다는 점이었다. 아직 새끼 인간이니 작은 건 당연한 거겠지만.
스위트피의 또래라던, 같은 마을 출신의 그 소년은 거의 스위트피의 두 배나 키가 컸었다. 그 소년이 특별한 경우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작고 약하니,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지.’
진심으로 스위트피의 몸이 조금 더 커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