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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34화 (34/120)

<34화>

[오오, 인간아! 무사했구나! 정말 다행이군, 다행이야.]

“둘기야, 네가 왜…….”

[아직 드래곤님이 말씀 안 하셨나? 너를 구한 게 바로 이 몸이란 말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스위트피가 대놓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자 비둘기가 억울하다는 듯 날개를 펄럭거렸다.

[어허!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넌 수도에서 내 부탁도 무시하고 혼자 도망칠 만큼 겁이 많잖아.”

[그땐 무시무시한 드래곤들의 싸움이었으니까 그런 거고! 내가 인간까지 무서워하진 않거든?]

비둘기가 큼큼, 목을 가다듬은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난 취향이 참 고급지지 못한 어느 인간의 낡은 집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어. 그곳에 내 취향의 암컷이 있었거든! 녹빛이 도는 회색 깃털이 참 아름다운 여인이었지…….]

“딴 얘기 할 거면 나가 주라.”

[어허! 자고로 비둘기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

“…….”

[하여튼, 그렇게 열심히 암컷 비둘기에게 구애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보고 만 거지! 덩치만 우람한 웬 인간에게 네가 정신을 잃고 끌려가는 모습을!]

“그래서?”

[그 길로 이 여관으로 찾아와 내 부리가 닳도록 창문을 두드려 댔단 말씀! 내가 아니었으면 드래곤님도 네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몰랐을 거고, 너도 위험했을걸? 보여? 내 부리가 짧아진 거?]

수도에서 자신의 부탁도 저버리고 혼자 도망쳤던 비둘기의 모습을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기는 했다.

그래, 정말로 고맙다.

고맙기는 한데…….

비둘기는 너무 시끄러웠다!

직접 구하러 온 것도 아니면서 영웅담을 풀어 내듯이 끝도 없이 얘길 해대는 비둘기를 견디다 못한 스위트피는 얼른 빵 부스러기를 꺼내 비둘기에게 먹였다. 물론 비둘기는 먹으면서도 떠드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참고 넘어가려고 해도 도가 지나치군.”

[으아아악! 드래곤 님! 살려 주십시오!]

결국 참다못한 리시안셔스가 비둘기를 한 손으로 들어 창문 밖으로 내쫓은 다음에야 스위트피는 자신의 귀에게 휴식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수다스러운 비둘기의 여파는 셌다. 아직도 비둘기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맴도는 듯했다.

“스위트피.”

“네……?”

“난 너로도 벅차.”

“…….”

“다신 저 겁 없는 것을 내 눈에 띄게 하지 말란 뜻이야.”

내가 둘기만큼 시끄럽진 않았던 거 같은데……. 억울한 마음에 반박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을 떼기 전, 가까이 오라는 리시안셔스의 손짓을 본 스위트피는 우선 순순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꼬마라 그런지, 약 바르는 것도 서툴러서는.”

쯧, 짧게 혀를 차면서도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턱을 들어 올리고선 부드러운 손길로 마저 약을 발라 줬다. 정말 한참 어린 아기나, 약한 짐승을 돌보듯 다정하고 담백한 손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리시안셔스가 어린 스위트피의 눈에는 상당히 잘생겼다는 것이다.

“……왜 얼굴이 붉어져? 또 어디가 아픈 건가?”

“아, 아니에요! 제가 혼자 바를게요!”

리시안셔스의 손에서 뺏어 가듯이 약을 가져간 스위트피는 약을 바르겠다면서 침대 이불 속으로 숨어 버렸다. 잘 지내다가도 리시안셔스가 저렇게 지나치게 다정하게 굴거나, 얼굴을 가까이서 볼 때면 얼굴에 열이 오르고…….

“의사를 불러오지.”

“……네? 왜요?”

“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요란스러워.”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아픈 거 아니거든요? 더워서 그래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 스위트피는 다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제 몸의 이상 반응이 진정되려면 아마 한참 시간이 걸릴 거 같았다.

태양은 완전히 저물고, 달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간이었다. 멍투성이 얼굴이 된 스위트피는 자신의 기분을 끝없이 저조하게 만들고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세상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 꼬마가 오늘처럼 얄미웠던 적도 없다.

‘이 꼴이 될 때까지 날 안 부를 줄은…….’

이런 일이 생길 것도 예상 밖이었으며, 이런 위기 상황에 스위트피가 자신을 안 부르고 혼자 힘으로 이겨 낼 거란 것도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스위트피가 가진 힘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안 본다고 생각하면 몰래 꽃과 나무, 동물들과 소통하는 것도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 디에고가 만든 자신의 환각 속에 뛰어들고도 무사한 것도, 평범한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신이 사랑한 인간들은 이런 힘을 축복처럼 선물 받고는 했다. 그러니 이 힘을 타고난 스위트피도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기준은 역시 어려웠다. 리시안셔스가 아는, 신이 예전에 사랑한 인간은 지금의 스위트피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또 이 맹랑한 꼬마를 사랑하신다니.

거기다가 자신과 반려로 묶어 놓은 것도 우습다면 우습고, 잔인하다면 잔인한 일이었다. 불쾌하기도 했다. 굳이 똑같은 힘을 가진 아이를 자신의 반려로 연결 지어 준 것에 대해서.

하지만 희한하게도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내버려 두고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제게 의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보호해야 할 거 같은 책임감이 드는 존재는 이토록 무겁게 제게 스며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시안셔스는 오늘 스위트피를 보호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당분간 네가 혼자 외출할 일은 없을 거다, 꼬마야.”

답답한 과보호가 심해질 예정인 것도 모르고 잠든 스위트피의 얼굴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정작 그 멍든 얼굴을 보는 리시안셔스의 기분은 썩 좋지 않은데 말이다.

잠든 스위트피를 두고 돌아선 리시안셔스는 여관을 나섰다. 스위트피가 속이 시원하다고 했으니, 그걸로 된 일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싸움에 어른이 끼어드는 것은 영 아닌 일이었다. 거기다가 자신은 그냥 어른도 아니고 스위트피와 그 새끼 수컷 인간보다 몇 세기는 더 살아왔으니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옳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스위트피는 어린아이가 맞다지만, 그 덩치 큰 새끼 수컷도 어리다고 할 수 있나? 덩치는 스위트피보다 두 배던데. 하는 짓도 어린아이치고는 음습하고 교활했다.

그 어미는 자신의 꼬마 반려를 학대했고, 그 자식은 제 어미를 믿고 그 아이에게 폭력을 행하고 오늘은 복수랍시고 납치까지 했다.

‘이 정도면 그냥 어린아이로 생각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지.’

리시안셔스가 향한 곳은 뒤쪽에 스위트피가 감금되어 있던 커다란 창고가 있는 스튜 가게였다.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 지금은 영업이 끝났는데…….”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던 소년은 상대를 쳐다보지도 않고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알아.”

그러나 리시안셔스의 짧은 대답에 거품이 묻은 팔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던 소년이 천천히 몸을 펴 리시안셔스를 돌아봤다.

“흐, 흐으……!”

자신이 낮에 본 그 얼굴인 것을 확인한 크리스가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놓쳤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접시 조각이 사방에 튀었다.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두려움에 떨며 벽에 달라붙은 크리스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코앞까지 다가간 리시안셔스가 소년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야지.”

“읍! 으읍! 흐브읍!”

“그 애가 괜찮다고 했으니 그냥 넘기려고 했지만, 역시 안 되겠어.”

“흐읍! 읍!”

“네 덕분에 안 그래도 못난 내 꼬마의 얼굴이 더 못나졌잖아.”

객관적으로 보자면 스위트피의 얼굴은 예쁘장한 편이었지만, 리시안셔스의 말을 지적해 줄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네가…… 그 아이를 절름발이라고 놀려 댔다지?”

“으으읍! 으읍!”

자신의 무릎이 꺾이는 동안, 크리스는 마음껏 비명을 내지를 수도 없었다.

“다신 그 아이의 앞에 나타나지 마. 알겠니?”

크리스는 고통에 버둥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대답하지 않으면 다리가 완전히 찢겨질 수도 있을 거 같다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착한 아이구나. 다리는 의사에게 보이렴.”

스위트피와는 다르게 네 다리는 치료받으면 나을 수 있을 테니까.

다정한 듯한 목소리로 차가운 표정을 한 리시안셔스가 크리스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크리스는 가까스로 비명을 참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소리를 지르면 저 괴물이 자신을 해칠 것만 같았다.

“치료 잘 받길 바란다.”

자신의 다리를 망가뜨린 남자는 산뜻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흐윽……. 흐아아아!”

그제야 크리스는 바닥을 뒹굴며 마음껏 고통에 찬 소리를 뱉을 수 있었다.

* * *

저 멀리서 인간 소년의 비명인지, 울음소리인지 경계가 모호한 소리가 들려왔다. 리시안셔스의 입장에서는 저 새끼 인간이 울든 소리를 지르든 상관없지만.

리시안셔스는 본인이 좋아하는 고급 여관에서 깊게 숙면을 취하고 있을 스위트피를 떠올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는 건 역시 불안하니, 어서 잠든 꼬마의 곁을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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