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33화 (33/120)

<33화>

“내 입장이 되어 보니 어때?”

“허……, 으윽…….”

“화재로 모든 걸 잃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모습으로 고아가 된 심정이 얼마나 힘들고 서러운지, 이제는 너도 알겠지.”

“내, 내가! 네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널 헤아려 주지 못한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네가 잘못한 건 날 헤아려 주지 못했다는 부분이 아니야.”

아직도 크리스는 자신이 뭘 잘못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마 알려 준다고 하더라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원래 돌을 던진 사람은 둘 중 하나였다. 자신이 돌을 던진 걸 기억하지 못하거나, 돌을 던질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주장하거나. 잘못한 게 없는데도 가만히 있다 그 돌에 맞아 죽을 만큼 힘들었던 사람만 억울한 법이었다.

“넌 내가 오갈 데 없는 처지인 걸 이용해서 날 조롱하고, 무시하고, 때렸잖아!”

“그게 내가 이런 꼴이 될 만큼 잘못한 건 아니잖아!”

“나도 너에게 괴롭힘을 당할 만큼 잘못한 적은 없었어. 그런데도 넌 어떻게든 나만 보면 괴롭히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지.”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크리스는 절대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당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절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녀석에게 더 할애할 시간은 없었다. 스위트피는 구석에서 엉엉, 우는 크리스를 내버려 둔 채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아…….”

그런데 문 앞에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리시안셔스가 서 있었다.

“그, 그게…….”

잘못한 게 없는데……. 왜인지 해명해야 할 거 같은 기분을 느낀 순간이었다.

“네가 우리 집에서 사랑받지 못한 건, 전부 너 때문이야!”

문밖에 리시안셔스가 서 있다는 것을 모르는 크리스가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네가 그런 기분 나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리를 저니까! 빈둥대고 게으르니까!”

“…….”

“그래서 네가 우리 집에서 구박받은 거라고!”

지금 크리스가 하는 말이, 자신에게 복수도 하지 못하고 분해서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인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리시안셔스가 저 말을 듣고 있는 것을 보자…….

괜히 억울했다.

리시안셔스가 저 말을 믿을까 봐 무서웠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 기분 나쁘다고? 넌 내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걸 오늘 처음 알았잖아. 다리를 저는 게, 뭐. 내가 원해서 절게 된 게 아니야.

난 게을렀던 적 없었어. 학교 다니면서 공부도 안 하고 놀러 다니던 너와 다르게 난 매일 마고 부인에게 구박받으며 일했단 말이야.

그러나 정작 입 밖으로는 어떤 반박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괜히 말없이 자신만 내려다보며 침묵하는 리시안셔스의 눈치가 보일 때였다.

“얼굴이 부었구나.”

리시안셔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크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리시안셔스의 목소리는 크리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크리스는 밖에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틀어막고 몸을 달달 떨었다. 앉아 있는 자리에 물웅덩이가 생기는 걸 봐선, 소변을 지린 듯했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크리스 쪽에는 관심 한 톨도 없는 듯, 가벼운 시선조차도 주지 않았다. 대신 멍이 든 스위트피의 얼굴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손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조금도 따끔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마치 깃털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당하기만 했어?”

“아, 아니에요! 제가 이겼어요!”

맞은 걸로 따지면 자신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긴 했으나…….

맞아서 퉁퉁 부은 자신의 얼굴이나, 벌에게 쏘여 얼굴이 퉁퉁 부은 크리스나 비슷했다. 그리고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크리스이니, 이쯤 되면 자신이 이겼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응어리는 풀렸니?”

“……네, 어느 정도는.”

“그럼 됐어.”

리시안셔스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웃었다.

“돌아가자, 스윗.”

“네! ……네? 방금, 뭐라고……. 아!”

믿을 수 없는 호칭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보려고 할 때였다.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몸을 평소처럼 안아 들었다.

“혼자 있으니까 저런 벌레 같은 것이 달라붙지.”

“…….”

“가서 약부터 바르자꾸나, 스윗.”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이, 리시안셔스는 또 한 번 스위트피를 애칭으로 불렀다.

‘리시안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른 거 같은데…….’

원래도 목소리가 나지막한 편인데다 놀리는 목소리도 조곤조곤하게 말해서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라는 느낌을 주긴 했으나……. 지금 내뱉는 목소리는 마치 일부러 더 다정하게 꾸며 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스위트피는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리시안셔스는 아까 크리스가 한 말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우리 집에서 사랑받지 못한 건, 전부 너 때문이야!」

일부러 크리스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사랑받고 있다고. 상처를 걱정해 주고, 기분을 헤아려 주고, 지친 몸을 안아서 데려다주고, 애칭으로 다정하게 불러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고.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은 괜히 이상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슬프지 않은데 서러운 거 같기도 하고, 속이 간지러워 가슴께를 긁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기도 했다.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리시안셔스는 지친 듯한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기꺼이 그 투정을 받아 줬다. 그러나 다정하고 온화했던 분위기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대번에 바뀌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스위트피는 거울 앞에서 멍든 얼굴에 약을 바르며 리시안셔스에게 추궁당해야 했다.

“날 불렀나? 안 불렀겠지. 왜 안 불렀지?”

“혼자 힘으로 나올 수 있어서, 리시안을 번거롭게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번……!”

“…….”

“……거로운 적 없어.”

그는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은 듯, 한숨을 내뱉는 동시에 말했다.

……거짓말. 내가 귀찮게 군다고 매번 그랬으면서.

“그러는 리시안은, 이 마을에 크리스가 있는 거 알고 있었어요?”

“한 번 스치듯이 본 인간을 일일이 기억할 만큼, 인간에게 관심이 많진 않아.”

그와 크리스가 만난 횟수는 정확히 두 번이었다. 물론, 리시안셔스의 말대로 두 번의 만남 다 스치듯이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시장에서는 크리스가 제 몸에 닿기 전에 절 안았잖아요.”

“안 좋은 기운을 풍기는 인간이 가까이 다가오길래 널 보호했던 거뿐이야.”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는 말이 이토록 기분 좋은 말일까.

“왜 입꼬리를 씰룩거려?”

리시안셔스가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스위트피는 괜히 간지러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내린 채 억지로 무표정을 만들었다.

“걱정 끼친 건 미안해요……. 근데 크리스 정도면 저 혼자서도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거 같았어요.”

“네가 가진 특별한 힘이 있으니까?”

“…….”

지금까지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가 가진 힘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었다. 분명 그가 디에고와 전투를 벌일 때도 자신이 힘을 써서 그를 도왔는데 말이다. 그래서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정신이 없어서 자신이 쓰는 힘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어릴 때부터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들 중 대다수가 제게 호의적이었고요. 저 말고도 이런 힘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요?”

“아주 먼 옛날에, 있었지.”

“근데 왜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너 때문에 잠시 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을 내 입으로 언급하며 떠올리고 싶지 않았거든.”

“왜요? 리시안이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싫어하지 않아.”

리시안셔스답지 않게 빠르고 단호하게 나온 대답이었다.

‘내가 너무 눈치 없이 굴었나…….’

리시안셔스는 이 얘기를 계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 같은데…….

괜히 그에게 불편한 얘기를 꺼낸 거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힘은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야. 집중하고 가꾸면 너를 충분히 지킬 수 있게 될 거다.”

“……네.”

리시안이 불편해하지 않을 얘기를 꺼내야 하는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릴 만한 얘기가 뭐가 있을까…….

스위트피는 고민 끝에 마땅한 얘깃거리를 찾아냈다.

“크리스한테 맞으면서도 리시안을 안 불렀는데, 제 위치는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리시안셔스는 대답 대신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푸드덕, 소리와 함께 비둘기 한 마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참! 이제야 열어 주면 어떡…….]

“…….”

[……합니까, 드래곤 님. 추워서 제가 잠깐 미친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리시안셔스에게 까불다가 고개를 숙여 기죽은 모습을 보이던 비둘기가 스위트피를 발견하자마자 다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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