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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32화 (32/120)

<32화>

「누가 네 어미야? 다리만 저는 줄 알았더니……. 머리도 모자라면 곤란해!」

애써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려 했지만, 얼마 안 가서 스위트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의 쉬지 않고 일했다. 한 번은 하도 굶어 쓰러진 적이 있었다.

「남의 집안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몸도 불편한 어린애인데 굶기지는 말아야지.」

입이 무거운 편이던 마을 의사가 보다 못해 건넨 한마디에 마고 부인의 얼굴이 민망함에 굳어지던 모습은 스위트피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다행히 그 뒤로 점심시간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늘어났고, 쉴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일하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행동이 느리다 싶으면 마고 부인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는 했다.

「은혜도 모르는 것이 잔꾀만 늘어 가지고! 빈둥대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일하라고 했지?!」

스위트피는 마고 부인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하지만 스위트피를 괴롭히는 것은 마고 부인뿐만이 아니었다.

「너희들! 아까 쟤랑 얘기 나눴지?」

「혼자서 심심해 보이길래, 우리는 같이 놀아 주려고…….」

「우리 집 식충이한테 너희가 뭔데 관심을 가져? 쟨 내 거야!」

크리스는 스위트피가 마을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친해지려고 하면 길길이 날뛰고는 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 수법은 더욱 교묘해졌다. 처음에는 스위트피와 어울린 아이들에게 달려가서 난동을 피우더니, 나중에 가서는 그 아이들에게 스위트피에 관련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렸다.

「쟤 다리 저는 거 병이라나 봐. 가까이 가면 너희도 다 옮는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었지만 진실을 분간하는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대부분 그 말을 믿었다. 또한 크리스는 스위트피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거 같으면 멍이 들 정도로 볼을 꼬집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는 했다.

아이들도 자신을 피할뿐더러, 자신도 크리스가 무서워서 다른 아이들과 가까워질 수 없었다. 스위트피는 그렇게 마을 안에서 고립되어 갔다. 가끔 크리스는 스위트피에게 억지로 웃으라고 시키거나, 모욕을 주며 즐거워하는 표정을 짓고는 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게 크리스에게는 일종의 취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저주했던 거 같다. 그들이 아팠으면 좋겠고, 자신만큼 괴로웠으면 좋겠고…….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싶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불태우고, 날 데리고 떠나 줘요.」

그때, 자신의 드래곤에게 그런 부탁을 했었다.

“…….”

스위트피의 눈썹이 잘게 흔들리더니, 이윽고 천천히 눈꺼풀이 올라갔다.

‘여기가 어디지…….’

스위트피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통조림과 밀가루가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이 식료품 창고인 거 같았다. 아직 해가 저문 것은 아닌지, 어두운 창고의 벽 틈에서는 밖에서부터 햇빛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그때와 비슷한 상황인 거 같았다.

자신이 마고 부인에게 맞고서 창고에 갇혀 있던 그때가…….

“일어났어?”

생각이 거기까지 닿던 스위트피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잘게 떨었다. 잊고 지낸 지 오래였는데. 다시 듣게 되자, 바로 어제 들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스위트피 로렌.”

“……크리스.”

크리스는 햇빛도 스며들지 않아서 가장 캄캄한 구석 쪽에 있는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운이 좋았어. 네가 그 괴물을 떼어 놓고 혼자 외출할 줄이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언제부터 날 지켜본 거야?”

“어제 우리, 길에서 마주쳤었잖아?”

“…….”

자신이 어제 크리스를 처음 본 순간, 크리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목격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어. 널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 사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지.”

“…….”

“우리 엄마를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내 몸을 이따위로 만든 널 만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

“…….”

“그 괴물이 널 보호하니까!”

크리스의 음성이 높아졌다. 스위트피는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잠시 숨을 고르던 크리스가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를 이어 갔다.

“그 괴물과 함께 즐거워하는 듯 보이는 널 보자,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뭐, 결국엔 실패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으니, 역시 난 운이 좋은 편이야. 그렇지?”

크리스는 덜덜 떠는 스위트피의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물론, 스위트피 또한 이 상황이 두려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덜 두렵기도 했다. 납치당한 상황이고, 물리적으로도 자신이 크리스에게 질 수밖에 없지만…….

어릴 때는 체구 차이 때문이었을까. 크리스가 크다고 느꼈었는데…….

“네가 운이 좋았다면 그렇게 온몸에 화상을 입는 신세가 되진 않았겠지.”

크리스는 여전히 자신보다 컸지만,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는 작았다. 그리고, 크리스가 아무리 커 봤자 드래곤만큼 크는 것은 불가능했다.

“뭐? 네가,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크리스가 기억하는 스위트피는 언제나 그의 괴롭힘을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약자였다. 그의 말대로 스위트피는 절름발이 고아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흉측한 모습을 하게 된 고아.

“우리 마을이! 우리 엄마가! 내가! 왜 이렇게 됐는데! 누구 때문인데! 다 너와 그 드래곤 때문이잖아!”

“무슨 소리야, 크리스? 그날 마을에 화재가 난 건 축제 때 붙인 불이 번져서였잖아.”

“지, 지금 뭐라고……. 무슨 말을…….”

스위트피는 크리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줬다.

“축제를 열다가 마을을 전부 태울 정도로 큰 화재를 일으키다니. 그런 멍청한 마을에서 태어나서 너도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스위트피의 마을은 드래곤의 습격으로 인해 화재가 난 거였지만 세간에는 다르게 알려져 있었다. 크리스도 진실을 모르면서 저런 말들로 스위트피의 상처를 후벼 파고는 했다.

“너, 너……!”

증오에 눈이 시뻘게진 크리스가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육중한 몸으로 스위트피를 덮쳤다. 머리가 바닥에 쿵, 부딪혔다.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크리스가 스위트피의 어깨를 흔들었다.

“인정해! 우리 마을을 불태운 게 너란 걸 인정하란 말이야! 그리고 사과해!”

몸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와중에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스위트피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너와 마고 부인에게 감히 사과를 바랄 수도 없었어.

그런데 넌 내게 사과를 바라는구나.

“……미안해.”

스위트피가 순순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진짜로 사과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크리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소년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비쳤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사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와 마고 부인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에게는, 진심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스위트피의 사과는 크리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 모친을 제외한 다른 마을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

“이 나쁜 계집! 사특한 마녀! 은혜도 모르는 절름발이!”

크리스가 주먹에 육중한 무게를 실어 스위트피를 내리쳤다.

“죽어!”

“윽! 아!”

자신과 크리스의 덩치 차이는 거의 두 배라서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물리적으로는 절대 크리스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굳이 부르고 싶지 않았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더라도, 스위트피에게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다시 한번 스위트피를 내리치기 위해 주먹을 억세게 쥔 크리스는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기묘한 촉감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찍, 찍찍-

“으아아악!”

이렇게 어둡고 사방이 꽉 닫힌 창고에 부를 수 있는 동물은, 창고 안에 살고 있는 쥐나 벌레밖에 없었다. 쥐들이 크리스의 붉은 피부를 물었고, 창고의 가는 문 사이로 들어온 벌들이 크리스의 피부에 마구 침을 꽂았다.

“너, 너……! 그때도, 으윽! 그때도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고는 했었지?!”

크리스의 폭력이나 괴롭힘이 심해질 때면, 스위트피는 이렇게 힘을 써서 달아나고는 했다. 그래 봤자 크리스를 넘어뜨리거나, 자신이 도망칠 수 있게 시간을 버는 정도였을 뿐이다.

눈가에 멍이 든 건지,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인중이 간지러워 손으로 문지르자 피가 묻어났다.

정말 크리스에게 많이 얻어맞았다. 그런데도 스위트피는 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크리스가 벌과 쥐를 피해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입 속으로 벌이 들어갈까 봐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스위트피는 간단한 손짓으로 자신을 도와준 벌과 쥐를 내보내고는 가까이 다가가, 크리스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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