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미리 말하지만, 꼬마야. 나라고 너와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게 마냥 재밌는 건 아니야.”
“누가 뭐라고 했어요?”
괜히 미운 소리를 하는 리시안셔스를 흘겨본 스위트피는 당당하게 리시안셔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가서 돈을 쓸 테니, 지금 달라는 의미였다.
스위트피가 돈주머니를 들고 다니다가 좀도둑에게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로는 리시안셔스가 돈 관리 중이었다.
리시안셔스는 그 뻔뻔함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선선히 스위트피가 쓰고 남을 돈을 쥐여 줬다. 인간들의 천박한 화폐 개념 따윈 알고 싶지 않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지만 스위트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폐 개념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리시안셔스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스위트피는 신이 나서 돈을 주머니에 넣고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나간다는 것치고는, 놀러 갈 생각에 신이 난 모습이었다. 불편한 다리로 절뚝이면서도 용케 빠른 속도로 나간 스위트피를 창가로 지켜보던 리시안셔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말이 많은 스위트피를 귀찮다고 느끼는 것은 몰라도, 스위트피가 자신을 귀찮아한다니. 아니다. 저렇게 신나서 홀로 놀러 나간 것을 보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재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재미가 없다니…….’
리시안셔스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간 스위트피와 지냈던 일상을 되짚어 봤다.
누군가를 재미있게 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스위트피의 모습은…….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 * *
스위트피는 시장으로 나가 리시안셔스에게 줄 선물은 없는지 살펴봤다.
‘뭘 줘도 별로 좋아할 거 같진 않은데…….’
한때 그를 모시던 신전에 금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던 리시안셔스는 그 어떤 것에도 욕심이 없어 보였다. 갖고 싶어 하는 물건도 없었고, 뭘 먹는 모습도 좀처럼 본 일이 없었다. 그나마 자신이 선물해 준 안대는 마음에 드는지 꼬박꼬박 차고 다녔지만…….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리시안셔스에게 줄 선물을 고르던 스위트피는 이내 딴 길로 새었다. 달콤한 냄새가 스위트피를 유혹하고 있었다.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걸어가자, 그곳에는 맛있는 스튜 가게가 보였다. 맛집인지 사람들도 북적거렸다.
스위트피는 홀린 듯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 혼자 왔니?”
문에 달린 종이 울리자 반사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던 종업원이 한참 작은 손님을 보고 허리를 숙여 친절하게 물었다.
“어머니가 바쁘다고 밖에 나가서 따로 끼니를 때우고 오라고 해서요.”
대충 그렇게 둘러대자, 종업원은 스위트피를 귀여워하며 혼자 식사하기 편한 구석진 자리로 안내해 줬다. 이윽고 소고기를 넣은 토마토 스튜가 나오고, 스위트피는 숟가락을 들어 호호 불어 가며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었다.
“요즘 갑자기 드래곤에 관한 얘기가 많아진 것을 보면 말이야…….”
혼자 식사하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얘기가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특히나 드래곤에 관련된 얘기는 스위트피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왜, 아주 오래전부터 드래곤을 봤다고 주장하던 녀석이 있었잖아.”
“아, ‘그 녀석’ 말이지?”
“그래, 이 식당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녀석 말이야.”
“여기 주인장도 참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흉측한 녀석을 일꾼으로 고용할 생각을 다 했대?”
“오갈 데 없어 보여서 불쌍했다더군. 그래도 손님들 눈에 안 띄게 장이나 보거나 무거운 짐 옮기는 일만 시키는 모양이지만……. 가끔씩 마주칠 때마다 징그러워서는, 원.”
갑자기 드래곤에 관련된 얘기를 하길래 신경 쓰였는데, 아무래도 저들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스위트피는 뒤쪽에 앉은 남자 두 명에게서 신경을 끄고 마저 식사를 이어 가려고 했다.
“근데 그 녀석은 어쩌다가 그렇게 전신에 흉측한 화상을 입게 된 거래?”
‘화상……?’
스위트피는 문득 어제 마주쳤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깊은 모자를 눌러쓰고, 전신을 감싸는 옷을 입고 있었으나 체구로 보아서는 제 또래의 남자아이가 분명했다. 그 아이도 옷 밖으로 보이는 피부에 화상 자국이 보였었다.
“본인이 주장하기를……. 마을에 드래곤의 습격이 있었다나 봐.”
“드래곤?”
“웬 마녀가 드래곤을 부려서 자기 마을을 불태웠다더군.”
쨍강! 숟가락이 떨어졌다. 뒷자리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스위트피에게 닿았으나, 이내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저들끼리 대화를 이어 갔다.
“괜찮니? 금방 새 숟가락을 갖다 줄게.”
어린 스위트피에게 친절하던 종업원이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 주워 줬다. 하지만 스위트피는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화상, 불, 마을, 드래곤, 마녀.
스위트피의 머릿속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마고 부인의 밑에서 지내던 시절, 그리고 리시안셔스와 처음 만나고 그의 반려로 각성했을 때, 마고 부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창고에 갇혀 그를 애타게 불렀던 그때가…….
‘나가야 해.’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어서 나가야 해.
여기서 서둘러 나가야 해.
스위트피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숟가락 가져와…….”
새 숟가락을 들고 다가오던 종업원이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스위트피는 불편한 다리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식당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때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바깥쪽에서 문이 열렸다.
“…….”
스위트피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
“식료품점에서 장 본 거, 뒤쪽 창고에 저장했습니다.”
“수고했다, 크리스. 저녁까지 쉬다 와도 좋다.”
모자 밑으로 드러난 화상 때문일까.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덕분에 스위트피를 보지 못한 거 같았다.
‘분명히 크리스라고 불렀지…….’
괜찮아, 자연스럽게 나가면 돼. 눈치 못 챌 거야.
조심스럽게, 자연스럽게, 소리도 내지 말고 나가자.
다행히 음식은 선불로 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스위트피는 그와 몸이 닿지 않게 조심하며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딸랑. 다시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시 닫혔다.
“하아…….”
가게 밖으로 나온 스위트피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스위트피는 절뚝거리면서도 걸음을 서둘렀다. 하필이면 식당은 외진 골목 쪽에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우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면, 괜찮을 거야. 좀만 더 나가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큰 거리였다. 스위트피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큰 거리를 앞두고 골목 옆에 있던 모퉁이 사이로 누군가가 튀어나온 것은 스위트피의 예상 밖의 일이었다.
“…….”
놀라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 우리.”
“…….”
“내가 널 못 알아볼 거라 생각했어?”
그 아이였다. 마고 부인의 하나뿐인 외아들이자, 자신을 애완동물처럼 여기며 집착하고 못살게 굴던 아이.
“너 같은 다리 병신을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잖아.”
크리스가 하필 이곳에 있었다. 스위트피는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리시…….’
그와 동시에 속마음으로 리시안셔스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크리스가 더 빨랐다.
“억……!”
화상으로 인해 피부가 우둘투둘한 크리스의 주먹이 스위트피의 명치를 찍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눈앞이 뿌예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크리스의 얼굴이었다.
* * *
너무 오래전의 일이지만, 스위트피는 아직도 자신이 마고 부인의 집으로 처음 가던 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지겹게 듣던 그 명칭 그대로, 자신은 ‘다리 병신’이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다른 아이들 틈에서 절름발이인 아이를 데려가려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넘쳐 나는 고아원 입장에서 나날이 자라나 필요한 것이 늘어가는 아이를 계속 떠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으로서의 아이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생 싼값에 부려 먹을 수 있는 노예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떠맡기면 되니까.
보통 몸에 불편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의 경우, 입양자가 고아원에 돈을 내고 아이를 데려가고는 했다. 소위 팔려 간다고도 할 수 있었다. 스위트피도 그런 식으로 마고 부인에게 팔려 간 것이었다.
너무 어렸고, 갑자기 달라진 주변의 환경이 낯설고 두려웠던 스위트피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고 부인의 손에 의해 팔려 가면서도, 스위트피는 자신이 팔려 가는지도 몰랐었다.
자신을 물건 품평하듯이 위아래로 훑어보고, 눈앞에서 고아원 원장에게 돈을 주는 것을 봤으면서도 스위트피는 현실을 부정했다.
나는 입양된 거야. 그러니까 이분이 오늘부터 내 양어머니인 거야.
「여기가 오늘부터 네가 지낼 방이다.」
창고용으로 쓰던 다락방을 받으면서도 스위트피는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걸었다.
「가, 감사해요, 어머니…….」
하지만 조심스럽게 ‘어머니’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스위트피는 세상이 핑 도는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