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30화 (30/120)

<30화>

“더 시켜.”

“저 배부른데요?”

“성장기라 많이 먹어 둬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방에 가면 시장에서 사 온 간식도 있잖아요.”

“네 또래 아이들의 평균 키만큼 평균 속도로 따라잡으려면 더 먹어야지. 그리고 아까, 네가 먹고 싶다고 한 메뉴가 있었던 거 같은데.”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놀림에 울컥한 마음 반, 그리고 새 메뉴를 먹고 싶다는 욕구 반으로 음식을 하나 더 주문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새 메뉴가 나왔을 때였다.

“많이 먹고 어서 자라렴, 꼬마 반려님.”

“쿨럭!”

음식을 먹던 스위트피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리시안셔스의 행동에 그만 사레에 걸리고 말았다. 리시안셔스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웃으며 물컵을 가까이 갖다 줬다.

“그러게, 천천히 먹어야지.”

빠르게 먹어서 사레 걸린 게 아니었다. 지나친 다정함이 또 독처럼 되돌아온 것이다.

‘나를 진짜 반려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꼬마처럼 여길 뿐이면서 왜 ‘반려’라고 부른담.

괜히 설레……, 어?

스위트피는 다급하게 생각의 고리를 끊어 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할 뻔한 거람?’

다급하게 고개를 도리질하던 스위트피가 제 뺨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다. 그에 놀란 리시안셔스가 다급하게 스위트피의 손목을 붙잡았다.

“음식이 생각보다 맛없다고 자학하면 못써.”

“아, 그런 게 아니에요!”

제 속도 모르는 리시안셔스가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마터면 리시안셔스를 상대로 이상한 생각을 할 뻔한 스위트피는 포크를 내려놨다.

“……이제 그만 먹을래요.”

“상당히 맛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음식 탓이 아니라니까요…….”

진지하게 음식 탓을 하는 리시안셔스가 슬슬 얄미워지기까지 해서 서둘러 몸을 일으키던 그때였다.

“어……?”

창밖을 내다보던 스위트피는 낯이 익은 어떤 존재를 보고 시선을 고정했다.

“왜 그러지?”

“리시안, 잠시만요!”

스위트피는 다급하게 여관 밖을 뛰쳐나갔다. 여관 밖에서 비둘기 떼들이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었다. 스위트피는 그중에서 살이 쏙 빠진 한 비둘기를 낚아챘다.

구구! 구구! 구구구!

비둘기가 푸드덕거리며 반항했지만 절대 놔주지 않았다.

[어떤 멍청한 인간이 이 비둘기님을 붙잡은 것이냐? 이거 놔라!]

“절대 안 놓아줄 거야!”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에 비둘기는 날갯짓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안은 인간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니, 너는! 그때, 그! 서커스에서! 드래곤에게 죽었던 인간이잖아? 왜 살아 있는 거야?]

“죽긴 누가 죽어?!”

유령이라도 본 듯한 비둘기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그날 리시안에게 내가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고 했었는데…….”

서커스를 구경하던 스위트피가 비둘기를 날려 보내며 했던 부탁이 있었다. 그건 바로 리시안셔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이 비둘기와 상관없이 스위트피의 위기를 알아채고 찾아왔다. 스위트피를 도와준 새들 중에서도 이 비둘기는 보이지 않았던 거 같다.

근방에 있던 동물들이 자신을 도와주러 온 건데, 그렇다면 이 비둘기는……….

“너, 내가 풀어 주자마자 도망친 거지?”

[…….]

“어떻게 그렇게 치사하고 비겁할 수가 있어?”

[나도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서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근데, 인간아. 이것 좀 놔주면 안 될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저 과자 가루 빨리 안 먹으면 사라질 거 같은데…….]

살고 싶어서 도망친 비둘기의 마음도 이해하기에 적당히 따지는 척만 하고 놔주려고 했는데 이 와중에 과자 가루에 한눈을 파는 걸 보니 더욱 괘씸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때마침 기다림이 지루했던 것인지, 리시안셔스가 밖으로 나왔다. 스위트피는 일부러 비둘기 보란 듯이 크게 외쳤다.

“리시안! 제 뒤통수쳤던 비둘기 잡았어요!”

비둘기를 높이 들어 올려 리시안셔스의 눈높이에 맞춰 보여 줬다.

구구! 구구! 구구!

리시안셔스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안 비둘기는 공포에 질려,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크고 동그랗게 떴다.

[사, 살려 줘어어…….]

비둘기는 목숨을 구걸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스위트피는 담요로 비둘기를 덮은 채 그대로 납치했다.

[과자 부스러기 먹어야 하는데……!]

납치당한 비둘기의 절규는 저녁 식사로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 * *

구! 구구! 구구!

다소 조용하던 여관 객실 안에는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비둘기의 수다 소리로 시끄러웠다.

[길거리 생활에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넌 모를 거다! 으음! 정말 맛있구나! 더 다오!]

서커스단 생활을 할 때와 달리 홀쭉해진 비둘기가 안쓰러웠던 스위트피는 자신이 먹을 빵을 잘게 뜯어 나눠 주고 있었다.

[길거리의 비둘기들은 정말 비열하고 난폭했다! 인간들은 이렇게나 따스하고 정겨운데…….]

“…….”

[아니지! 술주정뱅이 인간들은 괜히 지나다니던 날 걷어차고는 했어! 잔인한 인간들, 이처럼 귀엽고 잘생긴 날 어떻게 감히…….]

비둘기는 말이 계속 바뀌었다. 인간들은 음식을 나눠 줘서 착하다가도, 괜히 약한 동물에게 행패를 부리는 인간들을 언급하며 욕하기도 했다.

비둘기가 칭찬하기도 하고 욕하기도 하는 것은 모두 인간들이 가진 양면적인 모습이니, 말이 바뀐다고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비둘기의 푸념은 아무리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끝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스위트피.”

“네?”

“그 미물은 이제 내보내도록 하지.”

[아직 빵 부스러기 다 안 먹었는데!]

내보내고 싶은 건 자신도 리시안셔스와 마음이 같지만…….

스위트피는 부스러기가 남았다며 객실 안에서 날아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비둘기 때문에 한숨을 쉬었다.

[끄아아악!]

다행히 보다 못한 리시안셔스가 살기를 담아 노려보자 비둘기가 더는 날지 못하고 얌전해졌다는 점이었다.

“다음에도 나눠 줄게.”

오들오들 떠는 비둘기를 데리고 창문을 연 스위트피가 다음을 기약했다.

[정말?!]

“응. 물론 넌 내가 음식을 나눠 줘도 전혀 고마워할 줄 모를 거 같긴 하지만…….”

[무슨 뜻이냐, 인간? 나도 은혜를 아는 비둘기란 말이다! 비둘기를 모욕하지 말라!]

“다음에 보자, 둘기야.”

스위트피는 비둘기를 내쫓고는 급하게 창문을 닫았다. 비둘기는 불만스러운 듯 창문을 부리로 콕콕 찔렀지만, 리시안셔스가 언짢음을 담아 쳐다보자 지레 겁을 먹고 날아가 버렸다.

“내가 본 미물 중 가장 소란스러운 놈이군.”

“좀…… 정신없는 친구이긴 해요.”

“그 정신없는 녀석을 굳이 안으로 들여 식사까지 챙겨 준 건 바로 너지.”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도와준 것도 아니고, 겁에 질려 부탁한 것도 저버리고 도망친 비둘기에게 빵을 나눠 준 것이 불만스러운 듯했다.

“시끄러운데 은혜조차 모르는 것에는 마음 쓸 가치가 없어.”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해요. 저랑 만난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무슨 의리로 목숨 걸고 제 부탁을 들어주겠어요.”

“하지만 넌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상대에게 꽤나 마음을 주잖니.”

지금 리시안셔스가 얘기하는 대상은 아마도 바이올렛과 저 비둘기를 포함해서 하는 얘기일 것이다.

“넌 너무 정이 많아.”

“언제는 저보고 영악한 꼬마라면서요?”

리시안셔스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눈으로 스위트피를 바라보긴 했으나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당부의 말을 남겼다.

“스위트피.”

“네.”

“내일 저것의 빵을 챙겨 줄 생각이라면 나가서 줘. 저 소란스러운 것을 또 마주하기 싫으니.”

리시안셔스가 이렇게까지 피곤해하는 대상은 자신 이외에는 저 비둘기가 처음이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비둘기임은 틀림없었다.

* * *

거의 하루 종일 한 사람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스위트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맹랑하기도 하고 철없기도 한 그 발언에 리시안셔스도 지지 않고 답했다.

“네가 귀찮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전 리시안이 귀찮다고 말한 적 없어요. 혼자 있고 싶다고 한 건데 왜 그렇게 말해요?”

“내가 귀찮으니 혼자 있고 싶다는 거 아닌가.”

“그런 뜻 아니에요.”

전날 먹다 남은 빵을 입에 문 스위트피가 자신의 기분을 설명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사람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요. 드래곤은 안 그래요?”

리시안셔스는 좀체 스위트피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위트피는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서 관찰해도 재미있기만 했다. 물론 가끔은 말이 너무 많아 귀찮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리시안셔스의 입장에서 혼자 있고 싶다는 스위트피의 발언은 자신이 귀찮다는 얘기와 비슷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은 혼자서 여러모로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고…….”

“그럼 생각해.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해돼요…….”

언제 다른 드래곤의 습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건 이해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이렇게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서 산책하고 올게요.”

“철없는 소리 하지 마.”

“바로 요 근처예요. 그리고, 제가 부르면 리시안이 단번에 날아올 거잖아요.”

어차피 돌아다녀 봤자 같은 마을 안이었다. 스위트피가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부른다면 리시안셔스는 들을 수 있었고, 스위트피가 짧은 시간 동안 돌아다닐 수 있는 거리는 리시안셔스가 단번에 찾아오고도 남을 거리였다.

리시안셔스는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스위트피가 답답해하는 것이 보였는지 결국 마지못해 허락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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