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볼을 꼬집고 싶었지만 불필요한 접촉인 거 같아서 관뒀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떨 때는 뻔뻔하고 당돌한 꼬마가 이렇게 의외의 구석에서 순진하게 구는 모습이 꽤 귀여운 것은 사실이었다.
어차피 오래전 제물로 받았던 금이야 문명과 멀리 떨어진 오지의 숲속에 가려진 제 신전에 썩어 나갈 정도로 넘쳐 난다.
얼마든지 써도 상관은 없지만…….
‘자꾸 놀리고 싶어진단 말이지.’
하지만 이런 식의 놀림은 진짜로 빈정이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리시안셔스는 이제 슬슬 적당히 다른 얘기로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먹을 거면 좀 더 많이 먹어야겠지? 진짜 평균적인 속도로, 다른 또래 친구들의 평균 키를 따라잡으려면 말이야.”
“이미 전 평균이라고 했잖아요!”
“물론 나도 믿고 싶지.”
분에 차서 기어이 얼굴이 빨개진 스위트피를 본 리시안셔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스위트피의 뺨을 꼬집었다. 물론 꼬집었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접촉이기는 했다. 거의 스쳐 지나가듯이 약하게 잡고 놓아줬으니 말이다.
“농이니 화 풀어.”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에 더 화가 난 것일까. 스위트피는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역시 놀리는 것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에게 익숙해진 만큼, 마찬가지로 스위트피에게 익숙해진 리시안셔스가 풀어 주려고 한마디를 더 꺼내려고 할 때였다.
“화, 화난 적도 없거든요?!”
새초롬하게 대꾸한 스위트피가 휙, 몸을 돌려서 앞장서 걸었다. 다리를 절뚝이는 스위트피의 속도는 언제든지 따라잡을 수 있으나 리시안셔스는 일부러 스위트피보다 두 걸음 뒤에 서서 따라 걸었다.
한편, 앞장서 걷는 스위트피는 붉어진 얼굴의 열을 식히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중이었다.
‘미쳤지, 미쳤어. 진짜!’
반년 사이, 스위트피에게는 다른 감정의 변화가 있었다. 그건 리시안셔스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굴거나 별 의도가 없는 접촉을 할 때면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오른다는 것이다. 심장 박동도 조금 빨라지는 거 같았다.
리시안셔스가 지나치게 잘생긴 탓일 것이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긴 미남이잖아. 절대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누구라도 저 얼굴을 보면 나 같은 반응을 보일 거야.
실제로도 어쩌다 리시안셔스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던 여자들은 모두 한 번씩 얼굴을 붉히고는 했다. 그러니 자신이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나치게 잘생긴 미남을 대할 때 생기는 반사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앞서 걷던 중이었다. 길을 걷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스위트피의 시선에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추한 옷을 차려입은 한 남자였다. 키는 자신보다 조금 컸다. 검은 모자에 검은 재킷을 입고서, 자신과 똑같이 다리를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시선을 주게 된 첫 계기는 어쩌면 자신과 같은 사람을 또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 사람, 왜 낯이 익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하관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 하관과 옷소매 밖으로 보이는 손에는 화상을 입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 중에 저렇게 화상을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낯이 익은 느낌이었다. 그 남자가 점점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작 세 보 남겨 두고 스위트피는 우뚝, 멈춰 섰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근데 왜…….’
이제 두 걸음 정도 남겼을 때였다. 남자가 재킷 안쪽 깊숙이 손을 찔러 넣었다.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을 때였다.
“아……!”
스위트피의 몸이 번쩍 들렸다. 리시안셔스가 진짜 어린아이라도 들어 올리듯이 ‘읏차’, 소리를 내며 스위트피를 안아 든 것이다. 제게 다가온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리시안셔스에게 안긴 스위트피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내 착각이었나.’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던 거 같아서 민망해졌다. 스위트피는 그 민망함을 리시안셔스에게 풀었다.
“갑자기 들어 올려서 놀랐잖아요!”
“멈춰 서길래 다리가 아프다는 신호인 줄 알았지. 그리고…….”
리시안셔스가 흘끗, 뒤를 돌았다.
“이상한 인간이 접근하는 거 같아서.”
이미 인파 속에 사라진 아까의 그 남자는 사라진 뒤였다.
“그냥 지나가려던 거뿐인데 나랑 리시안이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 같아요.”
“흐음……. 이상하네. 나는 감이 좋은 편인데.”
아마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와 다르게 그 오해를 풀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이 마을에서도 그리 오래는 못 지내겠군.”
“안 돼요! 오늘은 피곤해서 더 이동할 수 없어요. 그리고 아까 잡아 놓은 그 여관……. 침대가 진짜 크고 푹신했단 말이에요!”
“……그래, 알겠다.”
리시안셔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스위트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저녁이 되자,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는 숙소로 돌아갔다. 여관의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스위트피는 우연히 테이블 위에 있는 신문을 발견했다.
“드래곤의 사진이…… 찍혔네요.”
애써 덤덤하게 말하며 리시안셔스에게 해당 기사를 보여 주었다.
이번에도 드래곤 두 마리가 전투를 벌였고 마을 하나가 초토화되었다는 목격담이 담긴 기사였다. 물론 이번 목격담은 특별했다. 사진까지 찍혔으니 말이다.
반년 사이에 각국에서 드래곤 목격담이 쏟아져 내렸다. 또한, 반려의 심장을 취하기 위한 드래곤들의 전투에 희생된 사람들도 어마어마했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은 드래곤의 존재를 믿었다. 하지만 아직도 드래곤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물론 이전과 다르게 드래곤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 비해 부정하는 사람들은 소수였지만.
지금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가 있는 마을은 드물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드래곤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또한 다른 지역에 가면 모두 드래곤의 존재로 시끌벅적하며, 언제 드래곤이 나타날지 몰라 두려워하는 데 반해 이곳은 드래곤보다는 다른 얘기들이 더 화제인 듯했다.
아직 이 마을과 인근 지역에는 드래곤이 출몰하지 않아 드래곤이 실존한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딱히 놀라울 일은 아니야. 반년 사이에 대다수의 드래곤들이 반려가 생긴 듯하니, 그만큼 전쟁이 더 치열해지겠지.”
그에 따라 많은 인간들이 드래곤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은 이제 당연한 수순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괜히 가슴이 따끔거리고는 했다.
“사람들은 드래곤을 반기지 않아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드래곤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드래곤이 자신들이 사는 터전에 나타나지 않길 바란다. 인간화된 리시안셔스와 함께 다른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자신들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을 속이는 느낌이라 썩 달갑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 할 필요 없어.”
마치 스위트피의 속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리시안셔스가 단호하게 일갈했다.
“제 목숨을 제일 중요시 여기던 내 꼬마 반려는 어디로 간 거지?”
아무래도 리시안셔스는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듯했다.
“제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면?”
“리시안이…….”
이런 말을 했다가 불쾌해하면 어쩌지?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리시안셔스의 눈치를 살폈으나, 리시안셔스는 여전히 스위트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후, 내쉰 스위트피가 결국 속마음을 털어놨다.
“리시안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처럼 느껴지는 게 속상한 거예요.”
물론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드래곤인 리시안셔스와 함께 사람들의 사이에 껴 있다는 죄책감도 있기는 했다. 그보다 더 마음이 불편한 것은 드래곤이 인간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리시안은 나에게 좋은 드래…….”
‘드래곤’이라는 단어를 말하려던 스위트피는 힐끗,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좋은 사람인데.”
“다른 인간들이 나쁘게 보는 게 싫다?”
“네.”
리시안셔스는 잠시 말없이, 속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음식을 쉬지 않고 먹는 스위트피를 관찰했다.
“참 기특한 생각이야.”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난 괜찮아.”
“그렇지만…….”
“인간들이 드래곤을 무서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야. 드래곤끼리 전투가 벌어지면 인간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
“리시안은 다른 드래곤들과 다르잖아요.”
“내가? 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건지 궁금해지는데.”
“그야……, 리시안은 신이 될 욕심이 없는걸요.”
리시안셔스는 말문이 턱, 막혔다.
“다른 드래곤들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노리는 걸 방어할 뿐인데…….”
“…….”
“리시안도 다른 드래곤들처럼 나쁜 드래곤 취급받는 게 싫어요.”
반년 동안 스위트피와 지내면서 여러 차례 다른 드래곤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도 스위트피 몰래 다른 드래곤과 그의 반려를 습격한 지도 그만큼 되었다.
그러니까 누가 더 나쁘고 좋냐를 따질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 부분까지 스위트피에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리시안셔스는 괜히 지나가는 점원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