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28화 (28/120)

<28화>

드래곤의 반려가 된 인간과, 반려를 둔 드래곤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시간들 속에서도 항상 긴장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 긴장감을 잃는 순간, 언제 기습당해 반려를 잃고 죽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행복 속에서 긴장감을 잃는 자들은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었다.

“아아악!”

가끔 잔잔한 바람만 불어오던 적막한 숲속에 갑자기 돌풍이 불어왔다. 거대한 힘의 기운에 드래곤은 제 반려를 지키기 위해 몸을 일으켰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제 품 안에 있던 반려가 다른 드래곤의 발에 낚아채졌다.

“안 돼!”

드래곤은 인간의 모습으로 외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본체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그의 반려는 심장이 뽑힌 뒤였다.

신에 의해 억지로 연결된 반려에게 마음을 열지 않다가 이제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날이었다. 그런데 서로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이런 비극이 일어나다니.

그는 길게 자란 잡초 속에 파묻힌 채 미동도 않는 제 반려에게 다가갔다. 그의 본체화는 어느새 풀린 뒤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반려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길은 이미 심장이 사라져서 박동이 사라진 반려에게 닿지 못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을 오롯하게 담던 눈동자의 초점도, 뺨의 생기도, 숨결까지도…….

“으, 으아아아!”

순식간에 다시 본체로 변한 그는 제 반려의 심장을 취하고 하늘을 나는 동족의 뒤를 쫓아 날아올랐다.

눈앞에서 반려의 죽음을 목도한 드래곤은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하필 자신의 반려를 공격한 드래곤은, 그도 알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대체, 왜! 당신은 이 싸움에 관심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그랬지. 지금도 그렇고.』

여전히 신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재밌는 게 생기긴 했지만 이대로 쓸데없이 긴 드래곤의 수명을 모두 만끽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살고 싶었다. 또 살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키지 않아도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한다.

리시안셔스는 반려를 잃고서도 자신을 그대로 보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드래곤을 향해 불을 내뿜었다.

이 불길에 숲이 모두 타들어 갈 것이다. 불필요한 희생은 달가워하지 않는 리시안셔스였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파괴되어 가는 숲도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 * *

“으음…….”

다시 눈을 떴을 때, 스위트피가 느낀 것은 ‘편안함’이었다. 더는 몸이 뜨겁지 않았다. 특히나 심장이 괴롭지 않았다. 고통이 모두 멎은 것이다.

“늦잠 잤네.”

이제 막 눈을 뜬 스위트피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리시안……?”

석양이 들어오는 창문을 가린 리시안셔스가 만들어 낸 그림자였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고생했죠……?”

조금 쉰 목소리로 스위트피가 사과부터 건넸다. 기억이 끊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간호해 주던 리시안셔스의 모습이었다. 능숙한 간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옆에서 열심히 돌봐 준 덕분에 혼자 아플 때 느끼는 설움은 느끼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리시안……?”

그런데 리시안셔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스위트피의 말에도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스위트피가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을 붙잡고 흔들자, 리시안셔스가 몸을 뒤로 물리며 손을 뒤로 감췄다.

“왜 그래요……?”

리시안셔스의 얼굴을 올려다봤지만 아무런 표정이 그려져 있지 않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너무 투정 부렸나…….

혹시 날 간호해 줬던 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다시 귀찮아졌나…….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지배하려고 했다.

“혹시, 화났어요……?”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왜…….”

“네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하길래.”

“네……?”

처음으로 리시안셔스가 웃었다.

“넌 나에게 미안해할 이유가 없어.”

그런데, 어쩐지 조금 슬퍼 보였다.

“왜 그래요……?”

“오늘 처음으로…….”

“…….”

“네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뿐이란다.”

자신이 아팠던 이유를 모르는 스위트피의 얼굴은 지나치게 무구해서 리시안셔스는 차마 그 얼굴을 마음 편하게 마주 볼 수 없었다.

내가 조금만 늦었다면, 넌 죽었어.

그 말을 차마 스위트피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스위트피는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네가 살기 위해 다른 드래곤의 반려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스위트피의 몸이 건강해지자 리시안셔스가 한 일은 바로 스위트피를 데리고 많은 곳을 떠돌아다니는 일이었다.

한곳에서 일주일 이상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와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반년이나 넘게 해야 했다. 스위트피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툴툴거리고는 했지만, 리시안셔스는 역으로 추적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번은 스위트피가 이런 말을 물었다.

「리시안은 신이 될 욕심이 조금도 없나 봐요.」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자신에게 모든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한 점도 없는 듯했다.

「다른 드래곤들은 신이 되겠다고 다른 반려들을 찾아 죽이고 다니는데, 리시안은 안 그러잖아요.」

그건 비단 신이 되겠다는 욕심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욕심을 가진 자도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는…… 그들이 사랑하게 된 반려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할 뿐이었다.

리시안셔스도 이전까지만 해도 스위트피를 지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찾지 않았던 거뿐이고 말이다. 그러나 진실을 모르는 스위트피는 너무 해맑게 웃으며 리시안셔스를 향한 믿음의 눈빛을 보냈다.

「리시안은 정말 좋은 사람……. 아, 아니지.」

「…….」

「좋은 드래곤 같아요.」

리시안셔스는 처음으로, 제게 조금의 영향도 주지 않는다 생각한 소녀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신에게 의지하는 스위트피에게 모든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은 채, 14일이 지나면 죽을 아이를 방치한 것. 그리고, 현재 이 아이를 위해 죽인 목숨과 앞으로 죽일 목숨에 관해서 여전히 숨기고 있는 것도.

반년의 시간 동안 가까워진 관계를 왜인지 모르게 망치고 싶지 않았던 리시안셔스는 그저 웃으며 제 꼬마 반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시안! 이 마을에서 제일 비싸고 고급진 여관은 저기 빵집이 있는 모퉁이를 꺾어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나온대요!”

반년 전과 지금의 스위트피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한결같이 스위트피는 돈을 좋아했고, 비싼 여관에서 묵는 걸 좋아했다. 리시안셔스가 생각할 때는 좋은 여관을 하나씩 거쳐 가는 것이 떠돌아다니는 삶에서 스위트피가 가진 유일한 취미인 거 같기도 했다.

속물적인 꼬마.

리시안셔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제 금화로 바꾼 현찰을 아낌없이 쓰는 스위트피를 내려다봤다.

“리시안도 한 입 줄까요?”

그런 리시안셔스의 시선을 뻔히 알면서 스위트피는 부러 모르는 척했다.

“참 희한한 일이야. 이렇게 많이 먹으면서…….”

리시안셔스가 정말 의아하다는 듯 스위트피가 한 아름 안고 있는 종이봉투로 고개를 내렸다가, 다시 자그마한 정수리로 시선을 옮겼다.

“어떻게 키는 이렇게 땅딸막할 수 있지?”

“저 평균 키거든요?!”

요즘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걸로는 놀려도 꿈쩍도 않던 뻔뻔한 꼬마가 키 얘기만 나오면 발끈하는 탓이었다.

“그리고 키 진짜 많이 컸어요. 옛날이랑 비교하면 한 뼘이나 자랐다구요!”

매일 손으로 자신의 발끝에서부터 손가락을 갖다 대며 키를 재던 스위트피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물론 리시안셔스는 코웃음을 쳤다.

“한 뼘만 자란 건 아니고?”

“리시안이 인간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래요. 저는 제 나이 또래의 평균 키를 갖고 있고, 평균적인 속도로 자라나고 있는 거예요!”

“이거야, 뭔……. 내가 아는 인간이라고는 너 하나니, 어디 가서 확인해 볼 수도 없고.”

“거짓말 아니에요!”

“나도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단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라니까요?!”

사실 리시안셔스의 입장에서는 스위트피가 평균 키인 것도, 평균적인 속도로 자라나고 있는 것도.

다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스위트피를 놀리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니 말이다.

이런 짓궂은 리시안셔스의 마음도 모르고 스위트피는 씩씩거리기 바빴다.

“스위트피, 설마 내게 화가 난 건 아니겠지?”

“리시안이 절 놀렸잖아요!”

“어허, 오늘 너에게 일용할 양식을 준 것은 누구지?”

“…….”

“네가 좋아하는 제일 비싼 여관에서 머물게 해 준 것은?”

할 말을 잃은 스위트피가 분에 차서 입술을 꾹 다무는 것을 보며, 리시안셔스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