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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27화 (27/120)

<27화>

“돌아올게.”

“언제요?”

“이 집요한 꼬마야.”

“…….”

“난 구차한 거짓말은 안 해.”

망설이던 리시안셔스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게 약속을 뜻하는 인간들의 수신호라지?”

그 손을 뚫어져라 보던 스위트피가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아파서 그런지, 감정을 통 못 숨기는 눈치였다. 그게 아니라면 부정적인 감정이 지나치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거나.

“약속을 하고서도 어기는 사람들은 많아요.”

이 고집스러운 꼬마는 믿음을 주려고 손가락을 걸어 놓고 거짓말하는 이들이 제일 나쁜 거라며,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진짜로 자신이 버리고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아파서 유독 어리광을 피우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리시안셔스도 꽤 억울한 입장이었다.

“물론 그런 부류도 있지만, 난 아니야.”

“…….”

“난 내가 한 약속은 지켜.”

리시안셔스가 보란 듯이 내민 새끼손가락을 흔들었다. 삐죽 내민 입술은 그대로였지만, 이번에는 스위트피도 선선히 손을 뻗어 자신보다 훨씬 길쭉하고 두꺼운 리시안셔스의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꼭 돌아와요.”

리시안셔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 * *

불안해하던 스위트피의 반응이 무색하게도, 리시안셔스는 정말 약속대로 돌아왔다. 그것도 의사와 함께.

의사는 스위트피의 몸 상태를 체크하더니 가벼운 감기가 맞는 거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를 이곳까지 끌고 오다시피 한 리시안셔스에게 환자를 돌보는 방법과 함께 약을 처방해 줬다.

리시안셔스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스위트피가 춥지 않게 이불을 꼭 덮어 주고,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을 이마에 올려 주고 얼굴을 닦아 줬다. 그리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스위트피가 거부하는데도 깨워서 따뜻한 수프를 먹이고 약도 함께 먹였다.

“미치겠군…….”

물론 모든 처음 하는 것이라 서툴기는 했다.

“커흑! 헙!”

먼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은 덜 짜서 얼굴을 닦는 내내 새어 나온 물이 코와 입으로 들어갔다.

표정의 변화라고 해 봤자 다정함을 담은 가벼운 미소나 언짢음을 담은 표정이 전부였던 리시안셔스의 눈이 보기 드물게 커졌다. 허공을 배회하던 메마른 손이 다급하게 스위트피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기를 닦았다. 그 손길마저도 거칠어서 앓는 소리를 내자, 그제야 멈칫하며 손을 뒤로 물린 그였다.

제정신이었다면 이런 리시안셔스의 모습을 실컷 놀렸겠으나, 앓아누운 스위트피는 서투른 간호에 더욱 고통받고 있는 중이었다.

고문으로 변질된 리시안셔스의 병간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뜨, 뜨거……!”

뜨거운 수프를 식히지도 않고 먹여 혀와 입천장을 데게 만들기까지 했다.

자신이 한낱 인간을 상대로 이 짓을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리시안셔스는 종종 한숨을 도로 삼키거나, 눈썹을 찌푸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래도 좋다…….’

누군가에게 병간호를 받아 본 게 얼마나 오랜만이지.

마고 부인은 스위트피가 아프면 크리스에게 병을 옮기지 말라며 방에 감금시켜 놓고 소량의 물과 음식만 갖다 주곤 했었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저렇게 쓸모없을 수가 있나! 으휴, 식충이가 따로 없다니까?! 크리스, 병 옮지 않게 당분간 저 계집애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괜히 지난날에 대한 서러움이 몰려오는 기분에 스위트피는 눈가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엄마랑 아빠 보고 싶다. 언니도…….

「우리 귀여운 아가.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 엄마가 대신 아플 테니까 우리 아가는 아프지 마라…….」

자신이 감기라도 걸리면 엄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밤새 곁을 지켜 주고는 했었는데…….

부디 꿈속에서라도 만날 수 있기를.

스위트피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스위트피는 꿈속에서 가족들을 만날 수 없었다.

* * *

스위트피의 병색이 심상치 않았다. 리시안셔스는 새벽에 여관 주인장이 소개시켜 줬던 의사를 다시 찾았다.

“거참 이상하군요……. 약도 먹었다면 이쯤 되면 조금은 나아져야 하는데 더 심하게 앓고 있다니…….”

그냥 단순히 열이 깊어진 정도가 아니었다. 새벽 내내 스위트피는 발작을 일으키듯이 몸을 구르며 끙끙 앓았다. 답답한 건지, 아픈 건지, 왼쪽 가슴 부근을 마구 긁어 대기도 했다.

리시안셔스는 잠시 새 약을 처방해 주는 의사를 빤히 보며 그를 의심했다.

‘진짜 의사가 맞나?’

병들고 다친 인간을 치료할 줄 아는 인간은 옛날부터 귀했다. 그래서인지, 기본적인 상식이 조금도 없으면서 의사를 사칭하며 사람을 속이는 간사한 인간들도 꽤 있었던 터였다.

리시안셔스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의사도 그런 부류는 아닐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차도가 없을 리가 있나…….

“그럼, 전 이만…….”

“만약에.”

리시안셔스는 나가려던 의사를 불러 세웠다.

“이번에도 아무런 차도가 없으면.”

“…….”

“넌 죽어.”

“예, 예?”

스위트피가 특별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괘씸하지 않나. 의사도 아니면서 아픈 인간들을 등쳐 먹으려고 하는 저 사기꾼이.

다짜고짜 협박당한 의사는 리시안셔스의 서슬 퍼런 눈빛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흐으…….”

“꼬마, 정신이 들어?”

“……스, 스…….”

“……스위트피.”

이 와중에도 일관적인 스위트피의 고집에 리시안셔스는 작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웃는 것도 잠시뿐. 끙끙 앓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스위트피의 모습에 리시안셔스는 다시 웃음기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리, 리시……. 리시안…….”

“그래, 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말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픈 인간은 어떻게 돌보지? 왜 낫지를 않지? 정말 저 의사가 문제인가?

그렇다면 괘씸한 의사를 죽이고 진짜 의사를 찾아봐야 하나.

“심장이…….”

“뭐?”

“심장이, 흐윽……. 아, 아파요…….”

“…….”

“너무, 뜨거워요……. 흡, 흑……. 타 죽을 거 같아요…….”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이내 스위트피의 병명이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지금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지.

속으로 스위트피가 반려로 각성하고 함께 지낸 시간들을 계산해 봤다.

‘13일…….’

스위트피가 반려로 각성하고 함께 알고 지낸 지 13일째였다. 그리고 드래곤 전쟁의 규칙 중, 반려가 있는 드래곤이 다른 드래곤 반려의 심장을 14일 이내로 취하지 못하면…….

자신의 반려가 죽는다.

즉, 오늘을 넘기면 스위트피가 죽는다.

“쿨럭!”

스위트피가 기침하자 반동으로 허리가 앞으로 숙여졌다. 쏟아진 피가 하얀 이불을 적셨다. 항상 조잘대기를 좋아하던 시끄러운 인간의 아이. 불편한 다리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던 제 꼬마 반려. 피를 토해 내는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아는 스위트피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스위트피를 위해 굳이 다른 드래곤과 싸워 가며 인간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이 아이가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잊고 지낸 것이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점차 팔을 타고 올라가 리시안셔스의 몸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다. 스위트피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제 몸을 떨게 할 만큼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꼬마가 죽는다는 것을 상상하자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미안한데…….”

수건으로 피 묻은 스위트피의 얼굴을 닦아 낸 리시안셔스가 억지로 꾸며 낸 다정한 목소리로 혼자 있기 싫어하는 소녀에게 말했다.

“또 나가 봐야 할 거 같아.”

“흐윽……, 큿…….”

“이번엔 좀 오래 걸릴지도.”

그래 봤자 오늘을 넘기진 않겠지만.

완전히 고통에 잠식되어 누군가의 말을 들을 정신이 아닌 스위트피의 새끼손가락에 홀로 제 손가락을 건 리시안셔스가 여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돌아올게.”

밖으로 나선 리시안셔스는 여관 주인에게 스위트피를 부탁했다. 스위트피가 관리하는 돈주머니에서 높은 금액을 쥐여 주며 갔다 오면 더 값을 쳐서 주겠다는 말에 여주인은 내심 기쁜 마음을 숨기며 스위트피를 돌보러 올라갔다.

처음엔 스위트피가 피를 토했다는 말에 전염병이라도 있는 환자가 온 줄 알고 기겁하더니. 돈을 주니 인자하고 푸근한 사람으로 돌변했다.

스위트피에게 배운 대로 돈을 제대로 이용한 리시안셔스는 그 길로 인간들이 없는 산속으로 올라갔다. 본체로 돌아가 날개를 펼친 리시안셔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래곤이 제 반려의 곁을 비우는 건 사실상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아픈 스위트피를 데리고 나갔다는 다른 의미로 위험해질 수 있었다.

무작정 날아오르긴 했지만 자정이 넘기 전까지 드래곤의 반려를 찾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신께서 도우시길 바라는 수밖에…….

리시안셔스는 이제껏 긴 세월을 살면서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찾지도 않았던 신을 찾았다. 자신은 신이 만든 이 게임에 관심도 없고 신이 될 욕심도 없으며 그를 경배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으나…….

그러나 이번에는 부디 자신의 손을 들어 주시기를.

그렇게 속으로 신을 찾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졌다. 리시안셔스는 방향을 틀어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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