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스위트피의 몸에 변화가 생긴 건 그다음 날이었다.
아직 따뜻한 날씨인데도 스위트피는 춥다며 몸에 담요를 두르고 다녔다. 불편한 다리로도 뽈뽈, 돌아다니는 스위트피는 춥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특히나 리시안셔스에게 무한한 금이 있다는 사실을 안 후로는 더욱 바빠졌다. 매일 시장에 가서 저녁에 먹을 군것질거리를 사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속 보여서 괘씸한데, 또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는 상황이었다.
“먹을 걸 너무 많이 사는 거 같은데. 그 작은 몸으로 정말 다 먹을 수 있나?”
“물론이죠.”
“욕심이면 버려. 내 앞에서 인간 꼬마가 많이 먹다가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말을 해도 참…….”
스위트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는 성장기라서 어쩔 수가 없단 말이에요.”
“다른 새끼 인간들도 너처럼 먹는단 말이야?”
“그럴걸요? 크리스가 먹는 양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무의식적으로 과거에 자신을 괴롭히던 크리스의 이름을 언급한 스위트피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걘 가끔 제가 마음에 안 들면 일을 제대로 안 하고 농땡이 피웠다며 자기 엄마한테 일러바쳤어요.”
“…….”
“그럼 마고 부인은 저를 하루 종일 굶겼는데, 크리스는 제가 한창 배고플 때 제 앞에 와서 보란 듯이 식사를 하고는 했어요.”
“…….”
“가끔은 바닥에 음식 부스러기를 흘리고서 저보고 주워 먹으라고 하거나, 접시에 남은 소스라도 핥아 먹으라고 하곤 했는데…….”
남의 금을 돈으로 바꿔 쓰면서도 내내 당당하던 스위트피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궈졌다. 그 모습을 보는 리시안셔스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스위트피의 또래치고는 덩치가 상당히 크던 새끼 인간을 너무 쉽게 죽였나.
간혹 살육을 즐기는 잔악한 드래곤들이 있긴 했지만 리시안셔스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자신보다 약한 생명을 지나치게 귀히 여기진 않았지만 우습게도 여기지 않았다. 인간을 죽일 일이 있더라도 가급적이면 큰 고통을 주지 않고 숨을 끊어 줬다. 하지만 제 꼬마 반려의 얘기를 들으니 아주 약간의 후회가 들었다.
그 새끼 인간도, 어미 인간도……. 질 낮은 인간치고는 너무 곱게 보내 준 거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인 스위트피를 보며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위로의 말을 건네주어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달래 줘야 하나. 그런데 이 작은 꼬마를 무슨 말로 달래 주지. 아니,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고개를 들어 올리기 위해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스위트피가 먼저 알아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젠 괜찮아요!”
최악인 경우는 울거나, 못해도 울상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고개를 든 스위트피는 의외로 밝은 얼굴이었다.
“리시안이 제 복수를 해 줬잖아요!”
하마터면 리시안셔스는 되물어 볼 뻔했다.
……내가?
그날의 일은 스위트피를 위해 벌인 일이 아니었다.
제 반려라는 인간 꼬마가 너무 시끄럽게 자신을 불러 대기도 했고, 인간들 사이에서 소외받고 괴롭힘당하는 약한 것에게 작은 연민을 느꼈을 뿐이다. 거기에 추가로 약간의 호기심과 재미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리시안셔스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춰 줬다.
“그래, 내가 너의 복수를 해 줬지.”
“리시안 덕분에 저는 전과 다르게 행복해졌으니까, 더는 슬프지 않아요.”
“…….”
스위트피의 말은 오묘한 구석이 있었다.
이 작은 인간 꼬마는 자신 덕분에 행복해졌다고 말하지만, 정작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행복을 위해 해 준 것이 없었다.
오히려 스위트피 덕분에 즐거워진 건 제 쪽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은인의 재산을 망설임도 없이 마음껏 쓰는구나.”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손에 들린 간식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조금 양심이 찔리긴 했는지, 스위트피가 자신의 뺨을 긁적였다.
스위트피는 정말…….
양심 없고 뻔뻔하고 영악한 구석도 있는 꼬마였다. 그래도 이런 모습은 나름 어린아이다워 웃음이 났다.
“리시안도 신도들이 준 금이라면서요. 똑같이 자기가 번 돈이 아닌 건 마찬가지인데요, 뭘.”
“하…….”
“그리고 그 많은 금을 썩혀 두기만 하면 아깝잖아요.”
자신과 만나기 이전의 구박받던 스위트피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리시안셔스가 아는 스위트피는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는 모습이 어울렸다.
하루 종일 작은 꼬마를 상대해 줄 뿐인데, 이게 이렇게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한 일일까. 이제는 그냥 말없이 스위트피를 관찰하기만 해도 재미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스위트피를 관찰하던 리시안셔스의 눈에 유독 붉게 달아오른 뺨이 들어왔다.
“……근데, 꼬마야.”
“이름으로 불러 줬으면서, 이제 와서 또 ‘꼬마’예요?”
“그래, 스위트피.”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놀란 건지, 스위트피는 얼굴을 뒤로 물렸으나 이내 순순히 제 얼굴을 맡겼다. 스위트피의 뺨에 손등을 갖다 댄 리시안셔스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열이 나는군.”
아침부터 유독 춥다고 담요를 두르더니 신경 안 쓰고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를 향해 손짓했다. 보통 스위트피를 안아 올릴 때 하는 손짓이었다.
“저, 진짜 괜찮은데…….”
“쓸데없는 고집 부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어.”
스위트피는 조금 더 시장을 둘러보며 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리시안셔스는 단호했다. 결국 스위트피가 마지못해 다가가 팔을 벌리자, 리시안셔스가 작은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제 팔에 스위트피가 걸터앉게 했다.
“몸이 조금 춥긴 한데, 그거 말고는 멀쩡해요.”
“하지만 무리하면 앓아눕게 되겠지.”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어요. 저 보기보다 튼튼하거든요.”
“과거에 없었다고 현재에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단다, 꼬마야.”
“저 꼬마 아니에요…….”
“그래? 그거참 이상한 일이네.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게 영락없는 꼬마가 맞는데…….”
어떻게든 자신은 아프지 않다고 주장하는 스위트피와 더 아프기 전에 숙소로 데려가려는 리시안셔스의 말싸움은 결국 리시안셔스의 승리로 끝났다.
“다 낫고 내일 또 구경하면 되니 아쉬워할 필요 없어.”
“그렇긴 한데…….”
의식하고 나니, 스위트피의 얼굴과 목에 점점 더 열이 올라 불그스름해지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리시안셔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매 순간이 아쉬워서요…….”
그 말에 평소답지 않게 걸음을 서두르던 리시안셔스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그게 무슨 뜻이지?”
“아, 그게……. 그러니까…….”
“말해.”
“……다른 드래곤들이 언제 제 심장을 취할지 모르니까…….”
“…….”
“오해하지 말아요! 리시안이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죽으면 리시안도 죽으니까, 절대 쉽게 안 죽을 거고요! 그리고 저는 시간을 되돌려도 리시안을 구하러 갈 거예요!”
리시안셔스가 환각에 빠져 있던 그때를 말하는 듯했다. 만약 그때 스위트피의 심장이 뽑히기 전에 리시안셔스가 먼저 죽었다면, 스위트피는 반려의 운명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것은 가정일 뿐, 어쩌면 반려가 죽으면 드래곤이 죽는다는 규칙처럼, 드래곤이 죽으면 인간 반려 또한 죽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전자의 경우가 맞다고 해도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구하러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리시안셔스는 뒤늦게 드래곤의 반려가 된 평범한 인간 소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듯했다.
“넌, 그 작은 머리로 참 생각이 많아.”
……그래, 그랬구나.
너는 살려고 내게 매달렸지만, 또 나로 인해 죽을 수도 있겠지. 아마 이번에 디에고의 습격으로 그 사실을 더욱 깨달았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 소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구하러 왔다.
빚을 진 셈이었다.
비록 자신이 원치 않은 구원이었다고는 하지만, 다시 눈을 떠서 지금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널 죽게 놔둘 생각은 없으니까.”
적어도 당분간은.
어째 안고 있는 몸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리시안셔스는 여관에 도착해 침대 위에 스위트피의 몸을 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아픈 인간을 돌본 적이 없는데.
“꼬마야.”
“……스위트피.”
이 와중에 고집하고는.
“스위트피,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쉬고 있어.”
그 말을 남긴 리시안셔스는 서둘러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옷소매가 덥썩, 붙잡혔다.
“어, 어디로 가려고요……?”
힘없이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스위트피가 반쯤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언제, 언제 올 거예요? 저, 모, 몸 괜찮은데……. 같이 나가요……!”
“……설마 내가 널 버리고 갈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이 꼬마는 대체 자신을 어떻게 보는 걸까.
리시안셔스는 머리를 짚으며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그러고는 스위트피의 이마를 검지로 가볍게 누르며 다시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