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25화 (25/120)

<25화>

“보통 네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순수함이라는 걸 가지고 있던데, 너는…….”

스위트피의 영악함을 꾸짖으려던 리시안셔스는 말을 이어 가려다가 말았다.

생각해 보면, 스위트피가 순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것만 해도 그러했다. 리시안셔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스위트피에게 그리 잘해 준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도 스위트피는 아주 잠깐 함께했던 순간의 정 때문에 자신을 구하러 위험 속에 뛰어 들어왔었다.

무식할 정도로 용감하고 겁이 없는 행동이었다. 어차피 금화가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스스로 금화를 쓸 일은 없을 테니, 이대로 두면 반짝이는 쓰레기만 될 뿐이었다.

그럴 바엔 누구라도 그 금화를 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어차피 스위트피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배곯지 않게 할 만큼 금화는 남아도니 말이다.

홀로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리시안셔스는 문득 자신이 한 생각에 황당함을 느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무의식적으로 스위트피가 늙어서 육체적인 생명이 다할 때까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작 그때까지 이 꼬마가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데다가 자신도 이 꼬마가 노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줄 생각은 없는데 말이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것도 아니다.”

깨끗한 새 옷으로 환복한 두 사람은 시장을 돌아다녔다. 스위트피는 숙소에 가서 먹을 거라며 간식거리를 잔뜩 산 것이다.

자기 스스로 꽃을 팔아 돈을 벌 때는 그렇게 돈을 아끼려 애쓰더니…….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이중적인 모습에 혀를 찼다. 하지만 저리 신나서 간식을 포장하는 스위트피의 모습을 보자,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도 양심이 찔리는 거 같았다.

저렇게 여관에 가서 간식을 먹을 생각에 행복해하는 아이인데…….

진작에 금화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 줄 것을 그랬나?

하지만 자신의 시대 때는 어린아이들도 부모를 도와 농작물을 가꾸고는 했었는데…….

자신의 힘으로 노동해서 돈을 버는 게 인간들 사이에서의 규칙 아니었던가?

아니지. 생각해 보면 자신은 너무 오랜 시간 긴 잠에 빠져 있었다.

그사이에 인간들의 규칙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나이가 많은 인간이 저보다 어린 인간을 지켜 주는 게, 인간들 사이의 규칙인 거 같았다.

하지만 스위트피는 마냥 지켜 줘야 할 어린아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똑 부러졌다. 금화를 보석상에 가서 화폐로 교환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처음 하는 일이라 그런지 헤매기는 했지만, 스위트피는 현명하게 돈을 쓸 줄 알았다.

리시안셔스가 생각할 땐 스위트피는 사막 한가운데에 떨궈도 알아서 잘 살아남을 아이처럼 보였다. 물론 그가 스위트피를 사막 한가운데에 떨굴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보호해 주어야 할 ‘반려’이니 말이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스위트피를 관찰하던 리시안셔스는 신나서 앞서 걷던 스위트피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 안 가, 스위트피의 걸음이 리시안셔스보다 뒤처지기 시작했다. 전이었다면 걸음을 맞춰 줄지언정, 스스로 걸어오게끔 했을 텐데…….

“스위트피.”

리시안셔스는 잠시 멈춰 서서 스위트피의 이름을 불렀다. 뒤따라오던 스위트피도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리시안셔스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팔을 벌렸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그 손짓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 채 그에게 물었다.

“팔은 왜 벌려요?”

“들고 가려고.”

“음식을요?”

“너를.”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스위트피의 눈이 더욱 크고 동그래졌다. 자신이 다리를 절뚝거려도 걸음을 늦춰 주는 것 말고는 배려해 주는 일이 없던 리시안셔스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은 탓이었다.

물론 스위트피는 걸음을 맞춰 주는 리시안셔스의 배려로도 충분히 좋았지만…….

“좋아요!”

다리가 불편한 자신을 안고 이동해 주겠다는 말을 굳이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리자,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가벼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무릎 뒤쪽을 팔로 받쳐, 스위트피가 자신의 팔에 걸터앉을 수 있도록 해 줬다.

“그런데, 리시안. 다음부터는 ‘안아 주겠다’고 말해요. 제가 물건도 아니고 들고 간다는 표현은 너무하잖아요.”

“들고 가는 것이나 안고 가는 것이나 비슷한 표현 아닌가.”

“전혀 달라요.”

“다음부터는 유의하마.”

정말로 차이를 몰랐던 것인 듯 리시안셔스는 별다른 대꾸 없이 선선히 수긍했다. 리시안셔스의 어깨를 짚어 몸을 지탱한 스위트피는 별다른 말 없이 자신이 말했던 여관으로 걸어가는 리시안셔스의 얼굴을 관찰했다.

리시안셔스가 드래곤일 때는 그의 몸을 타고 이동하는 게 당연했고, 높게 날아오르느라 무섭기는 했지만 그 외의 감정은 안 들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되게 어색하고 불편하고, 근데 마냥 싫지 않은 이 기분은 뭐지?

외향 차이로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라버니와 동생으로 보일 법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정말로 영악한 면이 있는 ‘꼬마’ 정도로 대하는 듯했다.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럼 리시안셔스가 날 마냥 어린아이 취급은 못 할 텐데…….

그런 생각에 홀로 입술을 삐쭉거리던 스위트피는 새삼 리시안셔스의 잘생김에 홀로 감탄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봐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한쪽 눈을 가리고 다니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완벽했다.

사람들이 그리는 아름다운 미남자의 조각상에서 볼 법한 이목구비를 감탄하던 스위트피는 이윽고, 여관 앞에서 멈춰 선 리시안셔스로 인해 얼굴 감상을 끝내야 했다.

“꼬마, 너…….”

스위트피가 말한 여관 앞까지 온 리시안셔스는 건물 외관을 보고 혀를 찼다.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씀씀이가 좋아질 수 있는 것일까. 누가 보더라도 이 지역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고급 여관인 게 눈에 보였다.

“아까 옷가게에서 아주머니한테 물었거든요. 하루 묵고 갈 여관 중에 제일 좋은 여관이 어디냐고요!”

“우리 꼬마 반려님의 씀씀이가 이렇게 클 줄 몰랐는데…….”

“원래 남의 지갑을 열 때는 통이 커져야 한댔어요.”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마고 부인이요!”

그 인간 여자는 이 어린아이를 학대한 걸로 모자라서 무슨 그런 돼먹지 않은 것을 가르친 건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이런 생각을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 줘야 하나, 고민했다.

근데, 굳이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스위트피가 늙어 죽을 때까지 먹이고 재울 재산은 충분했다.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또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꼬마가 늙어 죽을 때까지 곁에 있어 줄 것도 아닌데, 무슨 허튼 생각인지…….’

리시안셔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서 내려온 스위트피는 안으로 들어가 당당하게 2인실 방을 잡았다. 2층에 있는 방에 들어간 스위트피는 따뜻한 물에 씻고는 신이 나서 시장에서 샀던 음식을 풀었다.

입에 식은 빵을 넣는 스위트피를 보던 리시안셔스는 창가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드래곤은 인간처럼 숙면이 필요하지 않지만, 하루 종일 인간 꼬마를 따라다니다 보니 조금 지치는 거 같았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눈치도 안 보고 홀로 음식을 모두 처리했다. 이제는 먹으라는 권유도 하지 않았다. 권유해 봤자 리시안셔스가 먹지도 않을뿐더러, 먹는다고 하더라도 맛있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조그만 몸으로 그 많은 양이 다 들어간다니……. 참 신기해.”

“전 한창 자라날 나이잖아요.”

“그걸 본인 입으로 얘기하는 어린애는 못 본 거 같다만.”

“사실인데요, 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 먹은 음식 포장지를 치운 스위트피는 창가에서 휴식 중인 리시안셔스를 흘끔, 살피더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스위트피는 그런 리시안셔스의 앞에 있는 의자에 올라가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귀찮아서 스위트피가 뭘 하든 모르는 체하려 했는데 이미 그른 거 같은 예감에 리시안셔스가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스위트피는 검은색 끈을 들고서는 멋쩍게 웃었다.

“뭐야?”

“뭐긴요. 선물이에요!”

“……선물?”

“아까 리시안이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잠깐 앞에 나가서 산 거예요.”

스위트피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검은 안대였다.

“맨날 불편하게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다니잖아요. 차라리 편하게 이걸 쓰면 좋을 거 같아서요.”

얼떨결에 스위트피에게서 안대를 받은 리시안셔스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굳이 지우지 않았다.

“안 쓸 거예요……?”

스위트피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러나 리시안셔스에게서는 곧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쓰지 못하게 된 눈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이 눈에 대해서 특별히 타인을 의식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남이 볼 땐……. 이 꼬마가 볼 때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인간에게 제물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건, 아주 오랜만이야.”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눈을 가리던 천을 푼 리시안셔스의 한쪽 눈이 드러났다. 눈매에 약간의 흉터 자국이 남았고, 회색으로 빛을 잃은 눈 색이 보였다. 리시안셔스는 그 눈을 스위트피가 준 안대로 가렸다. 안대는 생각보다 리시안셔스에게 잘 어울렸다.

“저한테 할 말 없어요?”

“할 말?”

“제가 리시안에게 선물을 줬잖아요.”

“……내가 준 금화로 산 거 아닌가?”

“정확히는 리시안이 준 금화를 화폐로 바꿔서 산 거죠.”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스위트피가 너무 당당해서, 리시안셔스는 정말로 자신이 잘못한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물을 받은 인간은, 선물을 준 인간에게 뭐라고 말하더라……. 짧은 순간 깊게 고민하던 리시안셔스가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맙다.”

그 말이 뭐가 재밌는지 스위트피는 눈을 반달로 접으며 말간 소리를 내어 가며 웃었다.

의자에서 내려간 스위트피는 다시 낮아진 눈높이로 리시안셔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 이제 진짜로 리시안이 편해진 거 같아요.”

“…….”

“그러니까 리시안도 정말로 삶이 즐거워졌으면 좋겠어요.”

어찌 보면 별거 아닌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리시안셔스는 왜인지 그 말에 삶의 재미는 모르겠지만, 간만의 평온함이 찾아드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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