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글쎄, 소문 들었어?”
“아, 물론 들었지. 수도에도 나타났다지?”
“떼잉! 이 사람아, 그런 허황된 말을 믿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식당에 앉은 스위트피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척하며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는 대화 주제에 집중했다.
“하지만 수도에서 드래곤이 나타났다잖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던데? 왕궁까지 피해를 봤대!”
“그럼 왕도 드래곤을 봤단 말이야?”
사람들이 본인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도 리시안셔스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메뉴판을 보는 척하던 스위트피가 슬쩍 리시안셔스에게 물었다.
“왕궁도 무너뜨렸어요?”
“그걸 내가 어찌 아니. 내 눈에 인간들이 지은 건축물은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리시안셔스는 다소 황당하다는 듯 한숨 섞인 숨을 토해 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스위트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누가 보면 어린애가 혼자 놀다가 물건 망가뜨린 것처럼 말하는데.”
“알아요, 리시안셔스가 사람들을 구한 거.”
리시안셔스는 생각보다 유치한 구석이 있었다. 그가 사람들을 구했다는 사실에 생각보다 큰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 내가 아니었으면 디에고는 더 많은 희생자들을 냈을 거야. 그 녀석은 그런 놈이니까.”
사람들을 위해 희생정신이 넘쳤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쉽게 죽음을 택하던데요, 라는 말은 애써 꾹 넘긴 스위트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다 리시안셔스 덕분이에요!”
“어째 마지 못해 내 비위를 맞춰 준다는 듯한 표정인데, 내 착각이겠지?”
“그럼요. 지금 진심인데요?”
스위트피는 입이 찢어져라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진심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오래갈 수 없었다. 한참 메뉴판을 들고서 주문을 시키지 않는 스위트피 쪽을 향해 주인장이 눈치를 줬기 때문이었다.
스위트피는 메뉴판에서 가장 저렴한 음식을 시킨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지금 큰일 났어요.”
“다른 드래곤에게 심장이 뽑히지 않게 잘 살려 놨더니, 또 무슨 큰일?”
“네, 네.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데요……. 우린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없다고요.”
“중요한 것?”
“리시안셔스는 인간들의 천박한 화폐 개념이라고 말하지만 저에게는 정말 필요한 거 말이에요.”
“돈?”
“네, 그거요!”
스위트피는 보란 듯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우선 리시안셔스가 디에고와 싸워 준 건 정말 고맙기는 했다.
아니, 정말로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싸움이 이긴 건…….
아니지. 디에고가 도망쳤으니까 완전한 승리라고도 할 수 없지.
하여튼, 그가 싸움에서 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도움도 일정 부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위해 희생정신으로 싸웠다기에, 그는 디에고가 만든 환각 속에 자신을 내버려 두려고 하지 않았던가.
자꾸 장난인지, 진심인지 사람들을 구한 걸로 유치하게 으스대는 리시안셔스와 나누고 싶은 대화는 많았다.
당신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남들에게 숨기던 내 힘을 봤으면서 어째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아무 말도 안 꺼내는 건지.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더 중요한 문제…….
당장 먹고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까.
“이 식사를 하고 나면 당장 여관을 잡을 돈이 없어요. 꽃이라도 또 급하게 내다 팔아야 할까요?”
“하하……. 드래곤 목격담이 한참 들리는 이 와중에 또 꽃을 구하러 내 발등에 올라타겠다는 소리인가?”
전에 종종 들리던 드래곤 목격담은 사람들이 미신이나 헛소문으로 치부하는 정도여서 크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수도에서 드래곤끼리 큰 싸움이 있었고,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나왔다. 수도에 있던 왕궁까지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작 내다 팔 꽃을 구하기 위해 또 리시안셔스를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누가 발견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니까. 거기다가 스위트피는 드래곤끼리 서로 반려의 심장을 취하기 위한 전투를 직접적으로 겪었다. 또 다른 드래곤과 맞닥뜨리지 않도록 몸을 사리고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 어떡해요…….”
의식주가 딱히 필요 없는 리시안셔스는 돈이 없어도 여유로울 수 있을지 몰라도 스위트피는 아니었다.
스위트피는 절인 토마토가 올라간 샐러드를 포크로 뒤적거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리시안은 천박한 인간들의 화폐…….”
“개념에는 물론 관심이 없지.”
아무래도 이 꼬마는 자신이 전에 했던 저 말에 상당히 꽂힌 듯했다.
리시안셔스는 난감해하며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기운이 없던 스위트피의 녹안이 자연스럽게 리시안셔스의 손으로 시선이 따라갔다.
그가 길쭉한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쥐고는 손을 뒤집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손바닥을 내보이자, 그 안에는 크고 반짝이는 것이 들어 있었다.
“어?!”
놀란 스위트피가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리시안셔스의 손에는 금화 한 닢이 들려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이게, 대체…….”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금화를 가져간 스위트피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몰래 금화를 깨물어 봤다.
진짜였다. 진짜 금화였다. 그것도 드래곤의 문양이 새겨진, 아주 오래된 듯한 금화.
“아주 오래전에 인간들이 내게 바치던 거란다. 이 정도면 오늘 묵을 곳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구할 수 있다 마다요! 이런 게 얼마나 더 있어요?”
“꼬마, 네 눈이 지금 상당히 불순해 보인다는 건 알고 있니……?”
리시안셔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스위트피는 당당했다.
“이런 금화가 있었으면, 있었다고 진작에 얘기했어야죠! 그동안 말도 안 하고 한참이나 어린 절 착취해서 번 돈으로 생활하고…….”
“착……취라고…….”
리시안셔스는 뒷골이 얼얼한 기분이었다.
“네게 말을 안 한 것은……. 그래, 내가 치사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군.”
리시안셔스는 노숙을 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드래곤은 인간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둘이서 묵을 숙소를 1인실로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스위트피는 언제나 2인실을 잡아야 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스위트피의 입장에서는 꽤 억울했을 수도 있다.
사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굳이 제게 금화가 있다는 사실을 말할 필요를 못 느꼈다. 오래전에 신도들이 바치던 금화나 보석은 리시안셔스의 머릿속에서 단번에 떠오를 정도로 큰 가치가 없었던 데다가……. 자신이 먹고 잘 돈은 스스로 버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제 딴에는 돈 좀 벌어 보겠다고 노력하는 생명력 넘치던 모습이 지켜보기에 좋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런 게 있으면서 그동안 양심 없이 제가 번 돈으로 호의호식할 수가 있어요?”
“……양심이 없다고.”
이쯤 되면 억울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리시안셔스는 해명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금화의 출처를 밝혔다.
“오래전 신도들이 바치던 것들 중 하나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인간들 사이에서 금의 가치는 변하지 않은 듯하니, 화폐 개념을 잘 아는 네가 잘 써 보도록.”
“그러면 리시안을 위해 세워진 신전에 가면 이런 금화가 더 있겠네요?”
“내게 바쳐진 제물이라 원하면 이렇게…….”
리시안셔스가 다시 주먹을 쥐었다 피자, 그의 손에 또다시 금화가 생겨났다.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는데……. 그 눈빛이 참으로 부담스럽구나.”
“……리시안.”
“왜 그러지?”
“우리 오늘 최고로 좋은 숙소에서 묵어요.”
“…….”
“옷도 좋은 걸로 맞추고요. 수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옷이 많이 더러워졌거든요. 리시안도 눈에 띄게 역사서에나 나올 법한 옷 말고 제대로 된 옷을 좀 갖춰 입고요!”
말을 끝내고 음식을 먹으려던 스위트피는 문득 생각난 듯 ‘아’, 짧은 감탄사를 내며 다시 리시안셔스를 빤히 쳐다봤다.
“꼬마, 또 뭐가 문제지?”
“그런 돈이 있었으면서…….”
“…….”
“제가 옷 살 때 돈 때문에 망설였을 때도 아무 말 안 했던 거예요?”
“그건…….”
“저처럼 작고 어린애가 옷 살 돈도 부족해서 마음고생 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을 산 어른이 도와주지도 않고…….”
“……!”
그 말은 리시안셔스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리시안셔스가 한참 지내던 때만 하더라도 어른이 아이를 도와줘야 한다는 개념은 지금과 똑같이 성립되지 않았다. 아이도 어른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아이도 할 수 있는 만큼 노동을 했고, 그게 당연한 시대였는데……. 지금 시대의 인간들은 어른이 아이를 도와줘야 한다는 개념이 있는 모양이었다.
졸지에 양심 없이 어린아이를 착취한 어른이 된 리시안셔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
“네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마다 꺼내마.”
스위트피가 원했던 대답이었다.
만족스럽게 웃은 스위트피는 가게 주인장을 불렀다. 그리고 진짜 먹고 싶었던 음식을 망설이지 않고 주문했다.
* * *
식사를 하고 나온 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데리고 시장으로 향했다. 아까 음식점에서 얘기한 대로 자신과 리시안셔스의 옷을 사기 위함인 듯했다. 스위트피가 본인의 옷을 사는 것까지는 별문제가 없이 순탄했다.
문제는 리시안셔스의 옷을 살 때였다.
“어머나! 손님, 이 옷도 한 번 입어 보시지 그래요?”
“그래요, 리시안! 앞으로는 옷을 살 기회가 별로 없을 텐데!”
옷가게의 젊은 여주인은 그럴 수 있다. 하나라도 더 팔아야 이득일 테니까. 그런데 이 영악한 꼬마는 옷을 사는 것에 제 돈이 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자, 인형 놀이라도 하듯이 리시안셔스에게 다양한 옷을 입히려 들었다.
어차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옷을 사 봤자 들고 다닐 수도 없을 텐데 말이다.
어린아이 장단 맞춰 주려던 리시안셔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무 옷이나 빠르게 계산을 마친 다음 스위트피를 끌고 나왔다.
“아, 왜요! 어차피 사는 김에 더 입어 보고 사지!”
“어떻게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자마자 이렇게 태도가 확 바뀌는지…….”
“내 옷 사는 것도 아니고 리시안의 옷을 사는 건데요, 뭘.”
“그렇다 해도…….”
“신전에 수북하게 쌓여 있을 정도로 많다면서, 뭘 그렇게 아껴요?”
스위트피가 영악한 꼬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맹랑함에 리시안셔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