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23화 (23/120)

<23화>

바닥에 생겨나 있던 검은 호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리시안…….”

스위트피는 조금 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바로 눈앞에는 지금 당장 맞서 싸우거나 도망쳐야 하는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스위트피의 예상과는 다르게, 리시안셔스는 고개만 돌려 스위트피를 바라봤다.

그는 아주 개운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물러가 있어, 꼬마야.”

아까 어둠 속에서는 분명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었던 거 같은데……. 깨어나 보니 다시 ‘꼬마’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유롭게 입술을 삐죽일 때가 아니었다. 자신이 곁에 있어도 리시안셔스에게는 방해만 될 뿐이었다.

스위트피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리시안셔스와 디에고에게서 멀어졌다.

“설마, 진짜로 깨어날 줄은 몰랐는데…….”

리시안셔스를 환각에 잠재우기 직전과 달리, 디에고의 목소리에는 옅은 당혹감이 깔려 있었다.

“덕분에, 깨어나지 못할 뻔했지.”

반면에 리시안셔스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길 수 있는 상대를 내려다볼 때의 여유였다.

그 여유를, 그리고 달라진 힘의 중압감을. 디에고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대체 왜? 무엇이 원인이지?

그래도 아직까지는 그의 힘이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자신이 그를 이길 가능성이 컸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숨통을 끊어 놓을 걸 그랬군.’

디에고는 애써 후회를 숨기며 여유로움을 가장했다.

“내가 보여 준 환각이 마음에 안 들었나? 널 위한 내 안배였는데.”

“충분히 마음에 들었어.”

“그럼 평생 그 환각 속에서 살지 그랬어. 그편이 너를 위해서도 더 좋았을 텐데.”

“그럴까도 생각했었지. 그런데…….”

리시안셔스는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의 신경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는 스위트피에게 몰려 있었다.

“내가 사기를 당했더군.”

“……뭐?”

우리의 약속이 불공정했다던 스위트피의 말을 떠올린 리시안셔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서 그 불공정한 거래를 바로잡아야 해서 말이지.”

이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리시안셔스와 디에고는 거의 동시에 인간화를 풀고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다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먼저 달려든 것은 디에고였다. 낮게 날아오르는 디에고의 딱딱한 발과 부딪힌 건물들이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리시안셔스는 방향을 틀어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래로 하강해 디에고의 목을 물어 날아올랐다. 인간들에게, 그리고 저 도시에 숨어 있는 스위트피에게 위험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디에고는 목을 틀었으나 아까보다 강해진 리시안셔스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리시안셔스의 살갗을 긁어 겨우 빠져나온 디에고가 불을 내뿜었다. 그에 맞붙듯이 리시안셔스도 불을 내뿜었다.

두 드래곤이 뿜어 대는 뜨거운 화염이 허공에 맞붙었다. 불길은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채 서로 동등하게 맞붙었다.

‘역시, 아직 힘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닌 거야.’

리시안셔스가 현재의 자신을 넘을 정도로 온전히 힘을 되찾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디에고가 조금 자신감을 되찾을 때였다.

『큭……!』

또 다른 공격이 디에고를 찾아왔다.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를 구하기 위해 검은 호수에 뛰어들기 전 다루던 그 기묘한 힘이 다시금 그를 덮친 것이다. 안 그래도 제게 달려드는 동물과 식물 줄기를 뿌리치느라 얼마나 번거로웠는데……! 자신의 발등을 당기는 나무줄기에 내뿜는 화염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리시안셔스의 화염이 그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러나 디에고는 자신을 당기는 나뭇가지의 힘에 순순히 끌려가, 간발의 차로 불길을 피할 수 있었다. 디에고의 시선이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숨어 있던 스위트피를 발견했다.

* * *

스위트피는 몰래 숨어서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리시안셔스와 디에고의 싸움을 지켜봤다. 아까와 다르게 둘의 힘은 서로 비등비등해 보였다. 그러나 아까처럼 리시안셔스가 밀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디에고는 리시안셔스가 어둠 속에서 다시 돌아온 이상, 이번에는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

‘내가 리시안을 도울 방법은 없을까…….’

그래, 환각에 빠진 리시안을 구하기 직전에 썼던 힘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닌 생명들과 소통이 가능했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생명들의 도움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건 정말 기묘한 기분이었다.

먼저 하나씩 다가가 소통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스위트피의 위기를 알아채고 본능처럼 달려온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고작 해 봐야 크리스에게서 도망칠 때 그의 발목을 멈춰 세우는 것이 전부였던 스위트피는 아직도 자신이 그런 힘을 낼 수 있다는 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와닿지 않아도 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리시안셔스가 위기에 처할 테니까.

스위트피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이 근처에 있을…….

인간은 아니지만 생명력을 가진 모든 것들을 불렀다. 그 결과,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아까 스위트피를 돕다가 디에고에 의해 뿌리째 뽑힌 나무였다. 나무의 길쭉한 가지가 다시금 하늘에 있던 디에고의 다리를 붙잡아 추락시켰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위기의 시작이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라 그런지, 디에고는 아까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미 뿌리가 뽑혀 힘이 전과 같지 않은 나무의 줄기를 잘라 낸 그는 망설임 없이 스위트피를 향해 날아왔다.

스위트피는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늦었다. 디에고의 날카로운 발톱이 스위트피를 낚아채려 하던 그 순간이었다.

『제길!』

디에고는 스위트피를 놓쳤다. 스위트피의 부름에 뒤늦게 응답한 새들이 날아와 디에고의 시야를 가린 탓이었다. 스위트피는 그사이에 달려 나왔고, 리시안셔스가 도망치던 스위트피를 낚아 그나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첨탑의 지붕 위에 내려 주었다.

“고마…….”

미처 고맙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리시안셔스는 날아갔다. 그리고 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디에고의 목을 물어뜯었다.

『크아아아!』

디에고의 울음소리에 스위트피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만큼이나 온 세상을 울리는 소리였다.

스위트피는 지붕 위에서 간신히 몸을 지탱한 채 아래 상황을 살폈다. 리시안셔스는 피를 철철 흘리는 디에고를 죽일 생각인지 다시 한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안 돼!”

그때 나타난 것은, 스위트피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디에고!”

이제까지 숨죽인 채 숨어 있던 바이올렛이, 디에고가 진짜 죽을지도 모르자 뛰쳐나온 것이다. 디에고는 바이올렛을 버렸지만, 바이올렛은 디에고에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다. 아직도 그가 자신의 신이며, 자신은 그의 반려이고, 디에고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려 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올렛의 허튼 희망이 깨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인간이 달려오자 디에고를 공격하려던 리시안셔스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디에고는 그 틈을 노려 리시안셔스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뒤늦게 그를 쫓으려는 리시안셔스를 향해, 바이올렛을 물어서 들어 올려 던져 버렸다.

자신을 향해 던져진 죄 없는 인간으로 인해 리시안셔스가 공격을 주춤하는 사이, 디에고는 불길을 뿜었다.

“바이올렛!”

디에고의 공격으로 리시안셔스에게 던져졌던 바이올렛은 몸에 불이 붙어 괴로워했다. 스위트피는 바이올렛을 애타게 불렀으나 첨탑의 지붕 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여차하면 죽을 위기에 처한 리시안셔스도 가엾은 인간을 돌봐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기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디에고는 더 이상 불을 뿜어내지 못했다.

『저 인간은 너의 반려가 아니었나?』

『신에게 버려진 자식에게, 신이 연결해 준 반려가 있을 리가.』

디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이올렛을 철저하게 속였다. 가족을 향한 맹목적인 그리움에 철저하게 이용당했던 가엾은 소녀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괴로워했다.

리시안셔스는 바이올렛이 신경 쓰여 디에고를 온전히 경계하기 힘들었다. 인간 한 명이 죽는다고 큰 감흥이 일진 않지만 웬만하면 작고 약한 것을 죽이지는 않는다.

인간들이 일부러 개미를 밟아 죽이진 않지만 실수로 밟아 죽였을 때 짧게나마 안타깝게 생각할지언정,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과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꼬마가 슬퍼하겠군.’

리시안셔스가 더욱이 바이올렛에게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스위트피가 저 애를 꽤나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죽을 거라면…….

디에고에게 불을 내뿜어 시간을 끈 리시안셔스는 바이올렛이 더는 괴롭지 않도록, 날카로운 발톱으로 소녀의 심장을 찔러 죽였다. 숨이 끊어진 바이올렛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불길은 생명을 잃은 소녀의 몸을 여전히 태우고 있었다.

리시안셔스의 시선이 그도 모르는 사이, 스위트피가 있는 첨탑 위로 향했다. 스위트피는 바닥에 쓰러져 타들어 가고 있는 바이올렛의 시신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싸움은 이쯤하고 꼬마나 달래 줘.』

『도망이라도 치는 건가.』

『다음을 기약하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를 죽이고 싶었으나 압도적으로 힘의 차이가 나지 않는 한은 애꿎은 희생만 늘어날 뿐이었다.

리시안셔스는 날갯짓하며 멀어지는 디에고를 순순히 놔주는 대신, 바이올렛의 시신을 발로 감싸 불길을 꺼 주었다. 그리고 그는 가벼운 날갯짓으로 디에고와 반대 방향인 첨탑으로 날아갔다.

본체의 모습으로 첨탑의 지붕 위에 걸터앉자, 스위트피는 뺨을 타고 내리는 한 줄기 눈물을 닦아 내며 익숙하게 그의 발등에 올라탔다. 그때, 도망치거나 부상 당해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신이다……!”

“우리를 구해 주셨어!”

사실은 디에고의 공격으로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리시안셔스가 나쁜 드래곤과 맞서서 인간들을 지켜 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첨탑 위의 드래곤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스위트피는 저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바이올렛의 시신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바이올렛은 죄를 지었고, 어쩌면 자신이 인간을 바치던 드래곤에게 배신당해 죽은 게 그 죗값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자아이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억지로 지우기 힘들었다.

『스위트피.』

하지만 살아남은 자는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법이었다. 스위트피는 드래곤에게 매달린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떠나요…….”

드래곤은 발등에 반려를 태운 채, 그를 향해 무릎 꿇고 경배하는 인간들을 놔두고 하늘 위로 유유히 날아올랐다. 땅에 남은 인간들은 그런 드래곤의 뒷모습에서 아주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하나의 점이 되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