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22화 (22/120)

<22화>

“리시안! 리시안!”

스위트피는 투명한 벽을 내리치며 간절하게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마치…….

죽은 것처럼.

‘그럴 리가 없어.’

리시안셔스가 죽었을 리가 없다.

“리시안! 일어나야 해요! 리시안!”

주먹이 아플 정도로 벽을 내리쳤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벽은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고, 뿔이 뽑힌 리시안셔스는 무력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의 눈에선 점점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

스위트피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투명한 유리 벽을 내리칠 때였다. 유리가 깨지듯이, 보이지 않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어……?”

견고한 벽이 쉽게 무너지며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위트피는 그의 곁에 디에고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한 채 리시안셔스를 향해 달려갔다. 자신의 몸통보다 더 커다란 그의 머리맡에 다가간 스위트피가 기꺼이 리시안셔스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아…….”

또다시 배경이 바뀌었다. 불에 타 파괴되어 가던 숲은 다시 아까 전처럼 초록빛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복구되어 있었다.

아니, 불이 타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온 듯했다.

“이게, 대체…….”

스위트피가 영문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던 때였다. 금방 손을 뻗은 자리에 있던 리시안셔스의 본체는 사라졌다. 대신에,

「……게.」

고개를 돌린 곳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리시안셔스가 보였다.

“리시안!”

스위트피는 다시 그를 향해 달려갔으나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 대신에, 곁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리시안……?”

금빛 자수가 새겨진 베일을 쓴 여자는 리시안셔스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정확히는 리시안셔스가 말을 하면, 여자는 갈색 종이에 글을 써서 보여 주는 방식으로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베일을 쓴 채 머리카락 한 올 보여 주지 않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글씨를 써 내려가는 손과 팔, 베일을 써서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는 얼굴까지.

리시안셔스는 그렇게 한 여자의 모든 것을 시선에 담았다. 그 모습은 스위트피에게 낯설게 다가왔다. 자신이 원래 알던 리시안셔스가 아닌 것만 같았다.

‘지금 내가 리시안셔스에게 다가가도 될까……?’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그러나 스위트피는 끝내 망설임을 접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과거의 리시안셔스가 다른 누군가와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무척이나 특별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모두 과거일 뿐이다.

과거 속에 그를 놔두는 것이 그를 위한 길은 아닐 것이다.

망설임으로 인해 느리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리시안셔스!”

절뚝거리며 달려간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

아니, 풍경은 똑같았다. 하지만 다른 날인 것이 분명한 게 리시안셔스의 옷차림도,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도 달라졌다.

아니다. 옷은 달라진 게 맞지만, 곁에 있는 사람까지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리시안셔스의 곁에 있는 여자는 베일을 쓰지 않았다. 등허리를 감싼 머리카락은 보기 좋은 금발이었다. 자신과 채도가 다른 금발은 왜인지 모르게 익숙했다.

‘아까 베일을 쓴 여자와 같은 여자인 거야.’

말을 못 하는지, 똑같이 글을 써서 리시안셔스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리시안셔스는 이번에도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스위트피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누구예요?

누구길래 그렇게 다정하게 웃어 주는 걸까.

리시안셔스와 자신이 특별한 관계는 아니며 이런 생각을 할 자격도 없다는 것은 알지만……. 부러웠다. 그리고 속이 상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자신조차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속상한 마음은 얼마 안 가 쏙 들어가고 말았다.

“어……?”

여자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스위트피는, 내내 돌아서 있거나 베일을 쓰고 있어서 확인하지 못했던 여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과 다르게 맑은 푸른색 눈동자와 채도가 낮은 금발……. 그리고 가녀린 몸 선, 사랑스러운 미소를 가진 여자는…….

“언니……?”

자신의 언니와 쏙 닮아 있었다.

‘언니가 왜 리시안셔스와…….’

스위트피는 그 이상으로 더 생각을 연결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상황이긴 했다. 자신의 언니가 대체 왜 리시안셔스의 환각인지, 과거인지 알 수 없는 풍경 속에 있는 것이며, 그리고 왜…….

리시안셔스에게 입을 맞추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인지. 차마 그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스위트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에 풀잎끼리 부딪치는 평온한 소리가 아닌 다른 소음이 들려오자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다시 눈을 뜬 스위트피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사방이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새까만 어둠 속에서 길게 늘어난 꽃줄기에 몸이 묶인 리시안셔스의 모습이었다. 줄기에 묶인 그는 눈을 뜬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이 보이지 않았다. 가리지 않은 그의 한쪽 눈은 아름다운 금안과 달리 회색빛으로 빛을 잃은 형태였다.

“리시안.”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넌 누구지?”

“내가…… 기억 안 나요?”

자신에게 누구냐고 묻는 리시안셔스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를 봐요…….”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누군가에게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어쩌면 지금의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의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는 개미만큼이나 작아서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날 내버려 둬…….”

“…….”

“난 이대로 쉬고 싶어.”

전에 리시안셔스가 제게 했던 말이 이제야 조금은 와닿는 거 같다.

그는 삶에 미련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살고 싶어 이제껏 버둥거렸던 스위트피는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정말 이대로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내버려 두고 이곳에 남을까 봐.

속상하고, 부럽기도 했다.

만약 그가 환하게 웃어 주던 그 여자. 이 자리에 있는 게 자신이 아니라, 언니의 얼굴을 한 그 여자였다면.

지금처럼 시선도 주지 않을 게 아니라 얼굴을 마주 봐 주었을 거 같다. 하지만 리시안셔스가 진심으로 바라는 게 자신을 내버려 두는 거라 할지라도. 이렇게 어둠 속에 잠겨 있다가 영원히 소멸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그렇게 되도록 둘 수 없었다.

“미안해요, 난 리시안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리시안셔스는 이제 자신에게 여러모로 중요한 존재였다. 아무도 없는 스위트피의 삶에 유일하게 의미를 지닌 존재이니,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빠져나간다면 리시안은 절 귀찮은 꼬마라고 나무라겠지만…….”

“…….”

“리시안을 억지로 깨우는 게, 정말 당신을 위한 일은 아닐 수도 있지만…….”

“…….”

“그래도 나는 리시안을 여기에 두고 갈 수가 없어요.”

과거에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진 모르겠다. 그가 디에고에게 뿔을 빼앗겼고, 현재 디에고가 그 뿔을 자신의 머리에 심었다는 건 알겠지만 왜 그렇게 된 것인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과거가 행복했던 기억만큼 괴로운 일도 있었다는 건 알 거 같았다.

그랬기에 더욱 그를 여기에 둘 수 없었다.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과 같았다.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떤 사람을 만날지, 그로 인해 무슨 감정을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될지……. 모두 예측할 수 없었고, 그만큼 모두 열려 있었다.

어쩌면 미래에 또 다른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부정적인 가능성 때문에 긍정적인 희망을 놓을 수는 없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만나 삶이 긍정적인 쪽으로 바뀌었다. 리시안셔스에게는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없었던 거 같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이다. 자신을 내버려 두라던 리시안셔스가 먼 미래에 또 다른 사람과 그렇게 환하게 웃게 될지도.

“그러니까 나와 함께 나가요.”

스위트피는 리시안을 옭아매고 있는 줄기를 맨손으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서로 얽히고설킨 줄기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스위트피는 앞니로 줄기를 끊어 버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습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리시안셔스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스위트피에게 향하지 않은 채였다. 자신을 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섭섭함을 느끼면서도 스위트피는 솔직하게 말했다.

“생각을 해 보니까, 우리의 약속이 처음부터 불공정했던 거 같아서요.”

“…….”

“리시안셔스는 날 목숨 걸고 구해 줬지만, 나는 그만큼의 재미를 주지 못한 거 같아요.”

미동도 없던 리시안셔스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 반응했다. 그러나 줄기를 필사적으로 잡아당기고 끊는 자신의 행동에 몸이 반사적으로 흔들린 것이라 여긴 스위트피는 여전히 줄기를 끊어 내는 일에 집중하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리시안에게 삶의 미련이 남을 만큼 즐겁게 해 준 게 맞다면…….”

“…….”

“리시안이 이렇게 쉽게 자신을 내던지지 않았겠죠.”

또한, 이 어둠 속에 자신을 방치하고 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위트피는 억센 줄기를 억지로 당기느라 빨갛게 열이 오른 손으로 아무렇게나 아래로 떨궈져 있던 리시안셔스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정말로 리시안을 즐겁게 해 줄게요.”

“…….”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지 않던 리시안셔스의 눈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겁도 없이 자신을 찾아 어둠 속에 몸을 던진 스위트피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뒤늦게야 자신을 바라봐 주는 리시안셔스에게 스위트피가 미약한 섭섭함을 담아 말했다.

“이제 날 기억해 줘요…….”

당신이 아직까지도 기억하는 아주 오래전, 그 사람처럼. 그 말이 리시안셔스에게 전달된 것일까. 천천히 그의 입술이 열렸다.

“스위트피.”

리시안셔스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스위트피의 눈이 커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세상에 눈 부신 빛이 찾아왔다. 리시안셔스를 감싸고 있던 줄기가 하나둘 빛에 잠기며 끊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은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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