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다 하더라도, 리시안셔스를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다.
‘난 왜 이렇게 매번 나약한 걸까…….’
그날도 마찬가지다. 이 드래곤이 마을을 덮쳤을 때도, 언니가 죽어 갈 때도.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심하고 무력하게 그 모든 광경들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 주었으나 정작 자신은 리시안셔스를 목숨 걸고 떠나지 않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내게도 누군가를 지키고 함께 싸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좋을 텐데…….
내게도 그런 힘이…….
‘……뭐지?’
디에고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통에 헐떡거리던 계집의 반응이 무언가, 달랐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하지만 소녀를 둘러싼 기운은 소녀의 눈처럼 무기력하지 않았다.
솨아아아-
바람이 불어왔다. 리시안셔스가 걸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바람이었다. 그 순간, 디에고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 있던 스위트피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맑은 녹안에 빛이 서리고, 어디선가 구름이 몰려왔다.
……구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먹구름처럼 떼거지로 몰려온 그것은 새 떼였다. 새들이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크윽!”
날아온 새들은 인간화 상태였던 디에고를 공격했다. 그 작은 몸통과 연약한 부리로 공격해 봤자였지만, 수가 많아 디에고도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의 손에서 머리카락이 빠져나갔다. 스위트피는 그 틈에 디에고에게서 벗어나 달렸다.
“어딜, 감히!”
디에고의 몸짓이 다시 거대해졌다. 다시 본체로 돌아간 것이다. 디에고를 공격하던 새 떼들은 거대한 드래곤의 본체를 향해 힘껏 달려들었지만 그가 내뿜는 불길 한 번에 수십 마리씩 타들어 갔다.
디에고는 거대한 앞발로 스위트피를 눌러 버리려 했다. 죽일 생각은 없지만 저항하지 못하게 두 다리를 완전히 눌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디에고에게 닥친 공격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얇고 길쭉한 무언가가 디에고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지?’
심상치 않은 기운에 뒤를 돌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수도의 거리 곳곳에 있던 나무들이 갑자기 엄청나게 자란 줄기로 디에고의 꼬리를 붙잡았다. 디에고는 날개를 펼쳤다. 그러자 또 다른 나무줄기가 뻗어 와 펼쳐진 날개를 감쌌다.
왈왈! 멍! 인간들이 키우던 개들도 달려 나와 디에고의 앞발을 공격했다. 물론 이딴 애들 장난에 쉽게 당할 디에고가 아니었다. 대다수의 개들은 디에고의 발에 깔려 죽었고, 디에고를 붙잡고 있던 나무줄기는 그가 내뿜는 불길에 허무하게 타들어 갔다.
『어디 있지?!』
애들 장난질 같은 허튼수작에 붙잡혀 있던 디에고의 눈길이 매섭게 스위트피를 쫓았다. 스위트피는 자신이 리시안셔스를 가두었던 검은 호수로 향하고 있었다.
디에고는 집 한 채만 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톱에 스위트피의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갔을 뿐, 손아귀에 붙잡지는 못했다. 간발의 차로 놓친 것이다.
『크으…….』
분에 찬 드래곤이 참지 못하고 다시금 포효했다. 땅이 울렸다. 그가 손에 쥐고 싶어 했던 것은 이미 제 손을 떠난 다음이었다.
* * *
풍덩! 검게 파인 땅속으로 몸을 내던지자 진짜로 물속에 잠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리시안…….’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찾았다. 그는 저 밑바닥에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다. 스위트피는 그를 향해 헤엄쳐 갔다. 사실 수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손발을 허우적거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운 좋게 리시안셔스에게 닿을 수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은 리시안셔스는 미동도 없었다.
‘리시안, 일어나 봐요! 리시안!’
스위트피가 그의 손을 붙잡고, 몸을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슬슬 숨이 막혔다. 이대로 가다가는 숨을 참지 못할 게 분명한 상황에서 스위트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떠올려 봤다.
우선, 리시안셔스를 끌어안고 위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수영을 할 줄도 모르는 스위트피가, 자신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리시안셔스를 안고 위로 올라가리란 무리였다.
“크읍……!”
숨이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공기를 갈망했다. 코는 금방이라도 숨을 들이쉬려 했으나 이 새까만 어둠 속에 숨을 쉴 수 있는 공기가 있을 리 없었다.
살려면 자신만이라도 위로 올라가야 했으나 이미 리시안셔스를 위해 목숨을 걸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간신히 그 난폭한 용을 떼어 내고 뛰어들었는데, 이대로 자신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숨을 오래 참아 점점 머리로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검은 물속에서, 그보다 더 새까만 무언가가 리시안셔스의 귓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살짝 벌린 입술로도 검은 연기 같은 것이 계속 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뭐지……?’
그러나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덮치고 있는 이 수상한 검은 연기에 대해 더 진지하게 추리해 볼 수 없었다.
“커헉! 욱!”
결국 숨이 한계에 다다르고 만 것이다. 벌린 스위트피의 입 속으로 검은 물들이 계속해서 들어갔다. 귓속에도, 콧속에도……. 그럼에도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두고 갈 수 없어서, 살려고 허우적거리며 헤엄치는 와중에도 한 손에는 리시안셔스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끝내, 스위트피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 *
“…….”
스위트피는 눈을 떴다. 눈을 한 번, 두 번, 세 번, 천천히 여러 번 깜빡이자 서서히 뿌옜던 시야가 돌아왔다.
‘여기가 어디지…….’
몸을 일으킨 스위트피는 주변을 살폈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햇빛이 잘 드는 아주 아름다운 숲인데, 스위트피는 모르는 곳이었다.
‘아까, 나는 분명 리시안을 구하려고 물속에 뛰어들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스위트피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분명 물속에 뛰어들었는데 옷은 하나도 젖지 않은 채로 보송했다. 현실인 듯 꿈속인 듯 모호한 기분이었다.
혹시 몰라 자신의 뺨을 꼬집어 봤지만…….
“아야…….”
고통은 선명했다.
‘여긴 어디지?’
우선, 계속 걸어서 여기가 어딘지 알아봐야겠다.
스위트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몇 걸음 안 가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였다.
‘익숙한 거 같기도 하고…….’
스위트피는 그 웃음소리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한참 걷다 보니, 저 멀리 원형 모양의 지붕이 덮인 작은 사원이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사원의 기둥에 기대어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아…….”
스위트피가 잘 아는 남자였다.
“리……, 리시안셔스!”
스위트피는 단번에 리시안셔스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몇 걸음 다가가자 쿵, 소리와 함께 스위트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아……!”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리시안셔스! 리시안!”
스위트피는 투명한 벽을 내리치며 리시안셔스를 목이 아플 정도로 불렀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인지 도통 이쪽을 돌아볼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답답함보다, 조금 다른 감정이 스위트피를 덮쳐 왔다.
‘리시안이…….’
웃고 있잖아. 스위트피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웃음이었다. 말도 안 돼. 리시안셔스가 저렇게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있단 말이야? 물론 자신을 향해서도 간혹 웃어 주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짓고 있는 미소와 평상시에 제게 지어 주는 미소는 그 결이 달랐다.
제게 지어 주는 미소는 따분한 와중에 작은 재미를 본 듯한 미소거나, 제 황당한 행동에 어이없어하는 듯한 헛웃음이었다면…….
지금 짓고 있는 미소는…….
진심으로 행복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대체 뭘 보고 있길래…….’
리시안셔스가 보고 있는 것은 웬 편지지였다.
‘여긴…… 어느 시대지?’
바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리시안셔스가 입고 있는 옷, 사원의 건축 양식과 그가 들고 있는 두루마리 편지까지. 스위트피가 살고 있는 시대와는 달랐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알았구나…….’
이런 기분을 느껴도 되는 것일까.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기껏 리시안셔스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물론 리시안셔스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고, 그 또한 스위트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드는 섭섭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나한테는 한 번도 저렇게 웃어 준 적 없었잖아요…….’
스위트피가 마음껏 속상해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순식간의 눈앞의 배경이 바뀌었다. 햇살과 싱그러운 자연, 금을 녹여 만든 듯한 사원…….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황금빛과 초록빛의 배경이 사라지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빨간 지옥도였다.
세상이 온통 붉디붉었다. 놀랍게도 장소는 같은 곳이었다. 아까 리시안셔스가 어떤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평온하게 웃었던……. 사원이 지어져 있던 초록빛 숲이 지금은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리시안, 리시안은…….’
불을 내뿜는 용이 숲을 뒤덮고 있는 이 불에 다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위트피는 애타게 리시안셔스를 찾았다. 그리고 다행히 머지않아,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거대한 본체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리시…….”
그러나 스위트피는 안도와 반가움을 담아 그를 부를 수 없었다. 리시안셔스는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쿠웅-!
엄청난 소리와 함께 화재의 열기를 담은 바람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리시안셔스가 추락한 자리의 나무들은 모두 꺾이거나 뿌리째 넘어갔다. 하나 희한한 점은 리시안셔스의 머리에 뿔이 나 있다는 점이었다.
많은 드래곤을 만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만났던 드래곤 중 머리에 뿔이 달린 드래곤은, 자신을 해치려고 했던 ‘디에고’라는 드래곤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리시안셔스도 본체 머리에 뿔을 달고 있었다. 또한 그 뿔은 리시안셔스의 비늘의 색과 어우러지는 검은 뿔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디에고의 머리에서 돋았던 뿔과 같은 색이기도 했다.
이윽고 다시 바람이 불어오며 또 다른 드래곤이 리시안셔스를 짓눌렀다. 어디선가 본 광경이었다. 현실에서 디에고가 리시안셔스를 짓누른 것처럼, 지금도 똑같이 디에고가 리시안셔스를 짓밟고 서 있었다.
그들끼리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 같았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이내 중요하지 않았다. 이다음에 보인 풍경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디에고가, 리시안셔스의 머리에 돋아 있는 뿔을 통째로 뽑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