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20화 (20/120)

<20화>

신이 만든 첫 번째 드래곤과 두 번째 드래곤과 세 번째 드래곤…….

하나씩 생겨난 것들이 나중에는 개체가 늘어나 일일이 세긴 어려웠으나, 디에고는 아주 초창기에 태어난 드래곤이었다.

이제는 희미하리만치 아주 오래된 먼 옛날의 기억이지만, 리시안셔스와 디에고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던 시절의 기억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제 와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한번 엎지른 추억은 주워 담을 수 없고, 깨져 버린 관계 또한 이어 붙일 수 없다.

『한때 드래곤의 아버지라 불리던 자가 이토록 형편없어지다니.』

쉽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리시안셔스가 생각보다 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결국엔 자신이 이기겠지만 싸움이 길어져서 좋을 건 없었다.

『신이 연결해 준 반려를 받아들이다니, 너답지 않은데?』

리시안셔스는 디에고의 비아냥에 단 한 번도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크게 벌려 푸른 불꽃을 뿜었다. 하지만 연약해진 리시안셔스의 기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더 이상 그의 불꽃은 예전처럼 뜨겁지 않았다.

정면으로 불꽃을 돌파한 디에고가 리시안셔스의 목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낚아채 빠른 속도로 하강했다.

쿠웅-, 소리와 함께 드래곤들의 몸이 이미 아수라장이 된 지상을 또다시 뒹굴었다.

『어차피 넌 죽어. 그러니 그냥 순순히 반려를 내놓는 게 어때? 그럼 며칠이라도 더 살 수 있잖아.』

『한때는 너 또한 신의 자식이었는데…….』

리시안셔스는 끝내 디에고가 원하는 말은 해 주지 않았다.

『이렇게도 추해질 수가 있나.』

『너는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고!』

스위트피의 기운이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벌어 줘야 하는데,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디에고는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를 진정한 반려로 받아들인 것을 비꼬아 말했지만, 리시안셔스가 이렇게까지 스위트피를 살리려는 건 그리 로맨틱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 아이는 약속을 지켰다. 삶에 미련이 남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지루하고 지겨운 시간들 속에 작은 재미를 남겨 줬다. 그러니 저 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마땅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이토록 추악하게 변해 가면서까지 네가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무엇을 얻든, 결코 네 탐욕을 채우지 못할 것이다.』

싸우는 내내 입을 쉬지 않고 조롱한 것은 디에고이건만, 타격을 받은 것 또한 디에고뿐이었다.

고작 리시안셔스의 저 한마디에…….

모른다고? 정녕 모른단 말인가.

자신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왜 이러는지.

리시안셔스가 모른다니.

디에고가 뿔을 꺼내기로 마음먹은 건 그래서였다. 조금이라도 리시안셔스가 비참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제 것이 아닌 것을 꺼내는 것은 고통이었으나,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을 거 같았다.

비늘을 가르고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뿔이 솟았다. 드래곤의 뿔은 ‘고린도’라는 이름으로 가장 완성된 드래곤에게서만 나는 것이었다. 한때 이 뿔의 주인은 디에고가 아니라, 그의 발밑에 무참히 깔려 있는 리시안셔스의 것이었다.

『죽어서 그 계집과 다시 만난다면, 내 안부 인사를 전해 주겠어?』

디에고의 마지막 도발은 확실히 리시안셔스에게 먹혀들었다. 살의를 담은 리시안셔스의 금안과 망가진 한쪽 눈을 보며 희열에 찬 디에고가 망설이지 않고 고린도로 리시안셔스의 목을 찔러 버렸다.

“리시안!”

숨어 있던 작은 인간 꼬마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뛰면서도 불편한 다리가 몸을 지탱 못 해 옆으로 기울어 넘어진 꼴이 가관이었다.

『죽어서도 그 계집은 못 만나겠군.』

스위트피를 노려보던 디에고가 피를 흘리며 초점을 잃어 가는 리시안셔스를 내려다보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를 욕보였다.

『드래곤들의 위대하신 아버지의 말로가 볼만하군.』

디에고는 그를 쉽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죽음을 바라는 자에게 안식을 줄 수는 없으니.

디에고의 검은 뿔이 오묘한 빛을 띠었다.

『죽음 대신 악몽을 선사해 주지.』

리시안셔스의 몸이 본체에서 인간화로 돌아왔다. 바닥이 둥글게 파이더니 검은 물이 차올랐다.

“안 돼!”

리시안셔스의 몸이 바닥에 뚫린 어둠 속에 빠졌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기색을 띤 디에고가 그제야 처음으로 인간의 형태로 변했다. 리시안셔스에게로 달려가려던 스위트피는 멈칫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제 눈처럼 시뻘건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스위트피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리시안에게 가야 하는데…….’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도망치라고 했고, 스위트피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내린 결론은 그를 두고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여기서 죽게 될지라도.

‘리시안은 죽은 걸까…….’

우주처럼 보이는 검은 호수에 빠진 리시안셔스의 얼굴은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녕.”

그는 오래된 친구를 대하기라도 하듯이 스위트피에게 인사를 건넸다. 스위트피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디에고는 두 발자국 더 스위트피에게 다가왔다.

“다, 다가오지 말아요……!”

“저런, 겁에 질렸구나. 난 너를 해할 생각이 없어.”

“오, 오, 오지 마……!”

눈앞에서 저 드래곤이 언니의 심장을 뽑아 가는 걸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시간이 흘러 사진도 안 남은 가족들의 얼굴은 점점 흐릿해져 가도, 그 순간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스위트피를 악몽처럼 괴롭히고는 했다.

해칠 생각이 없다고?

뻔한 거짓말이었다.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면 서커스 공연 중 자신을 보고 난동을 부릴 이유도, 리시안셔스와 피 튀기게 싸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리시안셔스를 저 꼴로 만들어 놓고 자신을 해치지 않겠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위트피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께를 감쌌다.

“하……!”

“…….”

“하, 하하…….”

그 모습이 뭐가 우스운지 디에고가 유쾌한 듯 아예 소리를 내며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난 정말 너를 해칠 생각이 없어. 네 심장에도 관심이 없고.”

“…….”

“지금 당장은 말이야.”

그 말인즉슨, 언제든지 자신의 심장을 뽑아 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스위트피는 디에고를 경계하면서도 계속해서 검은 호수에 잠긴 리시안셔스를 살폈다.

제발 살아 있는 것이기를…….

하지만 그런 스위트피의 모습이 디에고의 심기를 어지른 모양이었다.

“왜? 살아 있기를 바라?”

아직까지는 적정거리를 유지하던 디에고가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놀란 스위트피가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성치 않은 다리로 디에고의 속도를 이길 수 없었다.

뒤로 콰당, 소리를 내며 넘어진 스위트피가 미처 고통에 찌푸린 눈을 뜨기도 전이었다.

“으앗!”

거칠게 목 부근의 옷깃이 붙잡히며 일으켜 세워졌다.

“흐앗! 아!”

아니, 일으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없었다. 두 다리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이렇게 하자.”

바이올렛에게 말할 때는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굴던 디에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부터 지어낸 말투인 것처럼. 디에고는 장난스러운 소년처럼 흥미가 서린 눈으로 목이 졸려 켁켁, 거리는 스위트피에게 속삭였다.

“널 살려 줄게.”

“뭐, 뭐라, 커흑!”

“대신, 리시안셔스를 버리고 도망쳐.”

그는 스위트피에게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리시안셔스를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면 된다. 그러면, 살아남을 수 있다.

“어때?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

그는 기대감 서린 얼굴로 스위트피를 내려다보았다.

만약, 바이올렛과 얘기를 나누기 전에……. 그리고 리시안셔스가 또다시 자신을 구하러 나타나 주기 전에. 이 드래곤이 널 살려 줄 테니 반려 드래곤을 두고 홀로 떠나라고 했다면, 스위트피는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다. 가축처럼 두려움에 지배당해 가장 비겁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구하러 왔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내걸었던 모순적인 약속도 충실하게 이행해 주었다. 또한 바이올렛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이기심을 깨달은 후였다.

바이올렛은 서커스 단원들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마음을 주었다 하더라도 빵 부스러기만큼의 작은 마음 조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떠할까. 빈말로라도 자신과 리시안셔스가 가족 같은 사이이며,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반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위트피는 어떠한 형태로든 리시안셔스에게 마음을 주었다. 정이 들어 버린 것이다.

외로움 때문일 수도 있고 의지하고 싶은 나약함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건 확실한 것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충족시켜 주었다. 외롭지 않게, 의지할 데가 없어 휘청거리지 않게.

저 검은 드래곤에게는 정말 심심한 날들에 찾아온 한낱 유희였을 수도 있다. 목숨이 아깝지 않으니, 목숨을 걸고 유희를 즐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렴 어떨까. 스위트피는 자신의 삶에 과연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 줄 또 다른 이를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홀로 답해 보았다.

‘아니, 그런 사람은 만날 수 없어.’

리시안셔스가 어떤 마음으로 한 행동이었건. 스위트피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든, 리시안셔스 같은 존재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것처럼. 자신도 리시안셔스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각오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삶에 미련이 생길 만큼 재미를 줄 테니,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 달라는 거래는 처음부터 부당했다. 그 부당한 거래를 이제라도 바로잡고 싶었다. 받은 만큼 그에게 돌려줄 차례였다.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으니, 자신도 한 번쯤은 그를 위해 목숨을 걸어 보고 싶었다.

“시, 큽, 헉……!”

옷 때문에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스위트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디에고에게 확실하게 말했다.

“싫어……!”

그와 동시에 스위트피의 몸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마치 쓰레기를 버리는 듯한 가벼운 손동작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헐떡이는 스위트피에게 디에고가 서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지…….”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나는 도망가지 않을 거야……. 리시안을 두고는 절대……, 아악……!”

순식간에 머리채가 잡혀 목이 휘어졌다.

“도망가지 않으면?”

“으윽…….”

“도망가지 않으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머리카락이 당겨져 두피도 아팠고, 목도 반쯤 뒤로 꺾어져 숨이 막혔다. 생리적인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그 와중에도 고통보다 서러운 것은 디에고의 말이 맞다는 사실이었다. 도망가지 않는다고 해도 스위트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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