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리시안셔스가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한 단어를 내뱉었다. ‘가’라는 말이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이 어깨를 밀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스위트피는 달리고 있었다. 도망치라는 리시안셔스의 말에 못 이기는 척, 홀로 도망치고 있는 꼴이었다.
‘리시안이 왜…….’
구하러 와 주길 바랐고, 구하러 와 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 믿음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고작 그 짧은 시간……. 그에 대해서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단호한 거 같지만 무른 구석이 있었고, 무심한 듯했지만 자신에게 항상 손을 내밀어 줬고, 귀찮아하는 기색을 숨기진 않았지만 언제나 자신을 따라 줬다.
스위트피에게 드래곤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 있어 줬던 검은 드래곤은 언제나 자신을 지켜 줬다.
‘리시안셔스가 죽을 수도 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등 뒤에서부터 덮쳐 오는 그림자가 더욱 거대해졌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드래곤은 하나가 아니었다. 두 마리의 드래곤이 수도 한복판에 서 있었다.
검은 비늘이 덮인 본체로 돌아온 리시안셔스와 눈이 마주쳤다. 온전치 못한 한쪽 눈이었다. 그어진 듯한 흉터 자국과 함께 잿빛으로 색을 잃은 눈동자가 흘끗, 스위트피를 응시하고는 회색 드래곤의 목을 물고 날갯짓을 했다. 거리의 건물을 파괴하던 드래곤들이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스위트피는 깨달았다. 리시안셔스가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을.
‘하지만, 왜……?’
리시안셔스는 생각보다 제게 따스했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그에게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였냐는 질문에는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었다.
‘아니오’라고.
그런데 어째서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위해 싸우지 못할 상대와 싸우는 걸까. 어차피 반려가 죽으면 자신도 죽으니까? 살고 싶어서 자신을 살리는 거라면, 필사적으로 자신을 데리고 도망치는 길을 선택했어야 맞다.
그러나 리시안셔스는 저 드래곤의 목을 물고, 스위트피와 인간들이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절뚝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걸음을 멈춘 스위트피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두 드래곤이, 불을 내뿜고 있었다. 하늘에서 드래곤들이 서로에게 뿜어 대는 화염의 열기가 지상까지 전해졌다.
얼핏 보면 대등해 보이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리시안셔스의 몸에 훨씬 더 많은 생채기가 나고 있었으며 서로 뿜어 대는 화염의 크기도 달랐다.
리시안셔스가 불리한 싸움이었다.
「내가 다른 드래곤에게 죽으면 리시안셔스도 죽어요. 리시안셔스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아, 생각났다.
「죽음은 저마다 시기가 다를 뿐, 언젠가는 찾아오는 건데, 뭐 하러 두려워하지.」
리시안셔스는 삶에 미련이 없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귀찮은 꼬마야. 설득해 보려는 노력은 가상하다만, 난 언제 죽든 상관이 없어.」
그래서 자신이 살고 싶게 해 주겠다며 당돌하게 거래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거래의 조건은 이러했다.
「사는 게 재미있어서 죽고 싶지 않게 해 줄게요.」
당신을 살고 싶게 만들어 줄 테니…….
「그러니까, 날 목숨 걸고 지켜 줘요.」
날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라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 제안이었을까.
삶에 대한 미련을 줄 테니, 미련이 생긴 삶을 걸고 날 지켜 달라니.
이율배반적인 거래였다.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리시안셔스가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거래라고 할 수도 있었다.
신이 되기 위한 드래곤의 싸움에, 반려를 잃은 드래곤은 죽지만……. 드래곤을 잃은 반려는 죽는다는 조항이 없었다. 자신의 드래곤이 죽고, 심장을 노리는 적에게서 잘 도망친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비록 가설일 뿐이지만.
스위트피는 무의식적으로 살기 위한 철저한 계산을 했다. 영악한 자기 자신에게 소름이 끼치려 했다.
‘살고 싶으면 도망쳐!’
스위트피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도망쳐, 스위트피!’
처음부터 살려고 리시안셔스에게 매달린 거잖아. 내가 머릿속으로 꼼수를 부렸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인 건 리시안셔스였어. 날 살려 주겠다고 싸우고 있잖아.
도망쳐야 해.
망설이지 마.
살아. 살아남아.
겨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이 이상, 걸어갈 수가 없었다. 다쳤던 왼쪽 무릎이 유난히 아팠다.
자신이 오래 걸어 힘들어서 더욱 다리를 절뚝인다고, 인간의 모습인 리시안셔스가 부축해 주거나 안아 주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보기보다 다정한 구석이 있었다. 앞서 걷다가도 스위트피가 많이 뒤처진다 싶으면 걸음을 늦춰 발을 맞춰 주고는 했다.
어차피 여기서 운 좋게 도망쳐서 리시안셔스 없이 살아남는다고 해도…….
‘나는 혼자야.’
혼자서 살아갈 자신이 있어?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어린 자신이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현실적인 고민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리시안셔스를 두고 홀로 도망쳐 살아남은 죄책감을 이겨 낼 자신이 없었다.
리시안셔스가 있어서 삶이 재미있었던 건, 사실 스위트피였다. 더는 혼자서 외롭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그런 스위트피의 눈에 우연치 않게 건물 구석에 숨어 있던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스위트피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골목 사이에 무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바이올렛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일어나서 도망쳐야지!”
스위트피가 바이올렛의 몸을 당겼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 때문에 사람들이 죽고 거리가 엉망이 되어서일까. 엄청난 충격에 빠진 얼굴로 홀로 무슨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스위트피는 시끄러운 와중에도 바이올렛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고가, ……렸어…….”
“……뭐?”
“디에고가 날 버렸어…….”
“…….”
“난, 나는……. 약속을 지켰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지금 당장 바이올렛을 추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디에고가 누구인데? 널 버렸다니, 그게…….”
그때였다. 사람들의 비명이 더욱 커졌다. 스위트피가 위를 올려다보자, 뱀처럼 서로를 물어뜯으며 엉킨 두 드래곤이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지상으로 추락한 드래곤들이 여러 건물을 무너뜨렸다.
스위트피는 반사적으로 바이올렛을 끌어안아 감쌌다. 건물이 무너지며 흙먼지가 두 소녀를 감쌌다. 스위트피가 콜록, 거리며 기침을 내뱉는 동안 품 안에 감싸여 있던 바이올렛은 나지막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디에고……?”
아마도, 저 드래곤의 이름을 부르는 거 같았다.
‘바이올렛이 티켓을 줬던 두 아이들이 사라졌었지…….’
그리고 자신이 나타나자 반기지 않아 하던 바이올렛이 태도를 바꾸며 갑자기 공연을 보고 가라고 한 것까지…….
설마…….
“그 두 아이를 네가 죽인 거야?”
“…….”
“어떻게……, 아니. 왜?”
초점 없던 바이올렛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디에고가 원했으니까.”
“하지만 드래곤이 인육을…….”
먹을 리가 없다고 말하려던 스위트피는 말을 멈췄다. 리시안셔스는 인간의 음식은 손에 대지 않았다. 사실 그가 입에 무언가를 대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말로는 드래곤은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리시안셔스가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고, 인육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드래곤이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너……, 나도 저 드래곤에게 넘기려고 한 거야?”
바이올렛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선을 내리는 그 행동은 충분한 답이 되었다.
“대체 왜? 난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반려로서의 노릇을 충실하게 하면 디에고가 내 어머니를 살려 준다고 했어!”
“…….”
“처음 만났을 때, 디에고는 약한 상태였어…….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노리지도 못할 정도로…….”
그래서 그가 몸을 회복할 수 있게 이날 이제껏 다른 인간들을 바쳐 왔다는 것이다.
“내가 반려로서의 의무를 잘 수행하면 디에고가 우리 어머니를 살려 준다고 했어……! 드래곤은 신이야. 그러니까 죽은 사람도 살려 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디에고가…….”
솔직히 스위트피의 입장에선 드래곤이 바이올렛을 거짓으로 꾀어낸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딴 게 반려의 의무일 리 없었다. 이제껏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그런 걸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서커스 단원들은 널 가족처럼 대했는데, 넌 그들까지 해친 거야!”
“그 사람들은 내 가족이 아니야!”
“…….”
“내게 고마운 사람들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내 가족이 될 수는 없어.”
어머니를 살려 내겠다는 바이올렛의 집념은 강했다.
맹목적일 정도였다.
“너도 나처럼 가족을 잃었잖아. 가족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너라도 뭐든 할걸?”
“아니야. 난 너와 달라. 난 무고한 사람들을…….”
거기까지 말하던 스위트피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한 가지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마고 부인에 의해 창고에 갇혔던 그 날. 자신을 구하러 와 준 리시안셔스에게 했던 부탁이 떠올랐다.
「이 마을을 불태우고, 날 데리고 떠나 줘요.」
그 마을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선량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굳이 죄가 있다면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거뿐이었다. 그러나 그게 불에 타 죽을 정도의 마땅한 죄는 아니었다.
바이올렛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을 죽였지만, 자신은 복수심에 그런 짓을 벌였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더 악한 걸지도 모른다.
자신은 바이올렛을 탓할 자격이 없었다. 다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혼자만의 착각이 처참하게 부서지고 깨진 것은 조금 아픈 일이긴 했다.
‘만약 가족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할까.’
자신이 가장 힘든 시기에 그런 제안을 받았다면?
과연 뿌리칠 수 있었을까.
응어리진 마음을 쏟아 내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까지 모두 죽게 한 제 모습을 떠올리자, 바이올렛과 자신이 썩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이러한 생각의 고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으읏……!”
세상이 울렸다. 온 세상이 드래곤의 울음소리로 꽉 찼다. 스위트피는 귀를 막은 채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붕괴된 건물 잔해 위에서 리시안셔스를 짓누른 회색 드래곤의 머리에서, 비늘을 뚫고 피를 흘리며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뿔이었다. 회색 비늘에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 뿔이, 디에고의 머리에서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