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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18화 (18/120)

<18화>

스위트피는 몸을 일으켰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앞 의자와 앉아 있는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사람들의 다리가 장애물처럼 가는 길을 막아, 그만 넘어져 다른 사람의 몸에 부딪히기도 했다. 관람을 방해받은 사람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며 스위트피의 몸을 밀쳤다.

“아, 뭐예요!”

그러나 워낙 길이 좁아 밀쳐진다고 해서 넘어질 만한 공간도 없었다. 사과할 여유조차 없어 ‘죄송합니다’란 말도 꺼내지 못한 스위트피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관람을 방해하는 스위트피에게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으나, 결코 두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인간아! 나는 좀 놔줘라!]

가방 속 비둘기가 자신은 날아가게 놓아 달라고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스위트피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스위트피를 멈춰 세운 건 한 명의 이름이었다.

“바이올렛이 사나운 짐승 같은 신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시죠!”

그러고 보니, 아까는 드래곤의 등장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을 다루는 소녀라고……?

그런 건 존재할 수 없다. 드래곤을 다룰 수 있는 인간은…….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퍼뜩 지나갔다.

‘반려라면?’

만약 바이올렛이 드래곤의 반려라면 불가능할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바이올렛을 데리고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그런 망설임이 도망치던 몸을 지배할 때였다.

[인간아, 지금 멍 때릴 시간이 어딨어?!]

비둘기가 구구구, 울어 대며 스위트피를 일깨웠다.

그제야 스위트피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이 이제껏 저 드래곤과 함께하면서도 아무 문제 없었다면, 그건 바이올렛이 드래곤의 반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테니까.

어째서 드래곤이 짐승처럼 인간들에게 붙잡혀 무대에 서 있는지까진, 스위트피가 알아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진짜 드래곤 맞아?”

“그런 게 진짜 존재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최근에 웬 목격담도 들렸고…….”

“지금 저 무대에도 있잖아.”

“진짜인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이동하는 내내 아직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만도 했다. 드래곤은 신화 속의 존재였다. 최근 미신처럼 드래곤을 봤다는 목격담이 들려오곤 했지만……. 대부분은 마치 흡혈귀나 늑대 인간을 봤다는 얘기처럼 터무니없는 얘기로 치부되고는 했다. 헛것을 봤거나, 신화 속 위대한 존재에게 빠진 사람들의 망상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랬었는데…….

지금은 그 드래곤이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리시안에게 가야 해……!’

스위트피의 손이 입구에 막 닿으려던 찰나였다.

“오오! 드래곤이 날개를 펼쳤어!”

사람들이 환호하며 외쳤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했으나, 스위트피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섬뜩함을 느낀 스위트피가 다시 출구로 나서려고 할 때였다. 드래곤이 날카롭고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을 벌렸다. 이윽고,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릴 정도로 뜨거운 불길이 사람들을 덮쳤다.

* * *

무대에 서는 일은 바이올렛에게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디에고에게는 그렇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에 두 번, 무대에 섰던 것은 일종의 변덕이었다. 비좁은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바이올렛은 디에고가 기대했던 먹이가 왔으니,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단장도 디에고를 데리고 거대한 묘기를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난폭한 짐승은 무대에 세우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노릇이니 말이다.

바이올렛은 자신을 어릴 때부터 거둬 주고 챙겨 줬던 단장을 떠올렸다.

좋은 사람이었다. 드래곤을 미개했던 과거의 인간들이 떠받든 것일 뿐, 지능도 없는 거대한 짐승으로 여기는 한심한 바보이지만.

“디에고, 시작할게요.”

바이올렛은 디에고의 앞에서 춤을 췄다. 단장도 사나운 드래곤이 바이올렛에게는 공격성을 띠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춤을 추는 아름다운 소녀에게 온순한 개처럼 얌전해지는 과거의 신이자 괴물을 보여 주는 무대였다.

바이올렛은 디에고가 순순히 제 부탁대로 무대에 나와 준 것에 고마워하며 연습한 대로 열심히 춤을 췄다. 발목의 부상 때문에 원래의 안무를 많이 변형해야 했지만 못 출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여기서 디에고가 내게 고개를 내밀어야 하는데…….’

그런데, 디에고는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디에고……?”

『먹이를 아주 잘 데려왔구나, 아이야. 내가 딱 원하던 것이야.』

디에고는 관객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주고 있는 게 무엇인지, 바이올렛도 알 거 같았다.

『한데……, 저것이 도망을 치는군.』

그 말을 끝으로, 디에고가 입을 벌렸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비명을 질렀다. 절반의 사람들은 몸에 불이 붙은 채 우왕좌왕했다.

이건, 바이올렛과 전혀 합의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디에고! 이게 무슨…….”

『그동안 고마웠다. 넌 꽤 훌륭하게 반려 노릇을 해 주었어.』

“무, 무슨……. 왜, 그렇게 말해요……?”

마치 금방이라도 떠나갈 거 같은 말투였다.

“아직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잖아요. 우리 어머니를…….”

『넌 쓸모가 다했어.』

애석하게도 이런 예상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이었다.

디에고가 앞으로 나아갔다. 목에 걸린 쇠고랑이 허무할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시끄러운 것은 그거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천막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공연은 순식간에 망쳐 버렸고, 지금 이곳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아수라장 속에서 바이올렛은 자신의 하나 남았던 희망이 꺼지는 것을 느꼈다.

* * *

바로 출구 앞에 있었던 스위트피는 다행히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천막을 벗어난 걸로, 덩치가 큰 드래곤을 피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불이 몸에 붙어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뒹구는 사람들을 짓밟으며 드래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 몇몇 사람들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수도의 거리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드래곤을 넋 놓고 바라봤다. 그러나 드래곤이 또 한 번 불길을 내뿜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끝난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둘기야! 부탁이 있어!”

뭔 부탁? 나도 도망가야 하는데!

비둘기의 구구, 거리는 소리에도 스위트피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저기 붉은 벽돌 건물 뒤에 높은 건물, 보이지? 2층에 가면 긴 장발을 가진 잘생긴 남자가 있어! 그 남자한테 내가 이곳에 있다고 전해 줘!”

[난 숫자를 못 세! 그리고 한 층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네가 말한 잘생긴 사람을 내가 어떻게 찾아?]

“자세히 설명할 시간 없어!”

다다다, 쏘아 내듯이 부탁을 전한 스위트피가 자신 없어 하는 비둘기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하늘로 날려 보냈다.

비둘기가 날아가는 것을 확인한 스위트피도 힘차게 달렸다. 있는 힘껏 도망치겠지만 그럼에도 만일을 대비해 비둘기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저 겁이 많은 비둘기가 과연 도움이 될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말이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도망은 얼마 안 가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람이 불어왔다. 스위트피는 한 발짝 늦게, 그것이 발을 내디딘 드래곤이 만들어 낸 바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어딜 가는 것이니?』

온 힘을 다해 불편한 다리로 달리고 있던 스위트피의 머리 바로 위에서 드래곤이 지렁이를 내려다보듯 자신을 보는 것을 느낀 스위트피의 두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공포에 질려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었다.

『난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뿐이란다.』

이 드래곤은 자신 또한 다른 드래곤의 반려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언니의 심장을 뜯은 것처럼 자신 또한 죽일 것이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불편한 무릎에 시린 통증이 찾아왔다.

마을이 불타고 가족들이 죽고, 언니고 죽었던 그날의 악몽이 다시 생생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흐, 흐으…….”

스위트피는 눈물도 흘리지 못했고,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리시안……!’

힘이 풀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간절하게 리시안셔스를 부를 뿐이었다. 마치 신을 찾듯이,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찾았다.

『너에게 선택지를 주마.』

한편, 곧 자신을 죽일 드래곤이 다정한 목소리로 어르듯이 얘기했다.

『나에게 심장을 내어줄 건지, 아니면…….』

눈을 감고 덜덜 떨고 있던 스위트피는 뒤쪽에서 불어오는 온풍을 느꼈다. 따스하기도 하고 미지근하기도 한 바람이 자신의 등부터 시작해서 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 앞에 있는 회색 드래곤도 하려던 말을 잠시 멈췄다. 스위트피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비규환이 된 사람들 틈에서 혼자 느긋한 걸음을 유지하는 남자는 스위트피에게 익숙한 자였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전에 사다 줬던 머리끈으로 긴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차림이었다.

“…….”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바로 자신의 뒤에 있는 드래곤에게 금방이라도 깔려 죽을 것만 같았다.

“이리 와, 꼬마야.”

그가 손짓도 없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의 목소리가 그리 높지 않았음에도 스위트피는 또렷하게 리시안셔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흐읍…….”

위를 흘끗, 올려다봤다.

여전히 두려워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그렇지만…….

확신이 더 컸다.

리시안이 자신을 반드시 지켜 줄 것이라는. 너무나도 근거 없는 확신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스위트피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리시안셔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뒤로 몸을 숨겼다.

『오랜만이군, 내 오랜 벗이여.』

“글쎄, 난 너 같은 벗을 둔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리시안셔스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걸쳐져 있었다. 말로는 벗이 아니라지만 진짜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편안한 모습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반응 때문에 지금이 위험한 상황이 맞는 것인가, 라는 의구심마저 들 때였다.

『아직도 자신이 동족들에게 아버지로 추앙받던 때와 같은 줄 아는군.』

리시안셔스를 향한 회색 드래곤의 반응은 명백한 살심이 담겨 있었다.

『이젠 약해 빠진 주제에.』

“남의 힘을 도둑질한 주제에 여전히 입은 살아 있구나.”

그제야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목소리에 서린 웃음기가 조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미련 없는 듯 가장 먼저 잠에 들더니. 소멸되긴 싫은가 보지? 반려를 구하러 온 것을 보면 말이야.』

리시안셔스의 시선이 천천히 제 옷깃을 꼭 붙잡은 스위트피에게로 향했다.

“사는 것에는 미련이 없지만…….”

“…….”

“이 아이는 삶에 미련이 많으니까.”

길쭉한 검지가 스위트피의 이마를 가볍게 톡 밀었다.

“수고했다, 꼬마야.”

“네……?”

스위트피가 그 말뜻을 이해 못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리시안셔스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띠었다.

“네 덕분에 사는 게 재밌었어.”

“아…….”

「사는 게 재미있어서 죽고 싶지 않게 해 줄게요.」

「…….」

「그러니까, 날 목숨 걸고 지켜 줘요.」

리시안셔스는 그때의 스위트피가 살기 위해 되는대로 뱉었던 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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