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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17화 (17/120)

<17화>

갑자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놀란 비둘기가 푸드덕거리며 날갯짓을 했다. 그래 봤자 다소 좁은 방 안에서 비둘기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허둥대는 것은 비둘기뿐만이 아니었다. 스위트피도 같이 허둥대고 있었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저 말본새 안 좋은 비둘기를 숨겨 줘야 할 거 같았다. 아무래도 같이 있다 보니 비둘기의 두려움이 전염된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스위트피는 마침 구석에 있던 검은 가방을 발견했다.

“여기에 숨어!”

스위트피가 가방을 벌리자, 비둘기가 단숨에 날아가 가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저기, 친구? 안에 있니?”

황급히 가방을 닫고 품에 안은 스위트피는 그대로 문을 열었다.

‘가방을 숨겨야 했는데……!’

다급해서 허둥대다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남의 가방을 품에 꼭 안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가 보더라도 수상해 보일 것이다.

“이제 곧 공연 시작이라서 자리까지 안내해 주려고 왔……, 응?”

단장의 눈길이 스위트피가 감싸 안고 있는 검은 가방에 닿았다.

“그건 바이올렛의 가방인데…….”

“그, 그게…….”

“설마…….”

꿀꺽, 침이 저절로 삼켜지는 순간이었다.

“우정의 증표로 자기 물건을 선물해 준 거구나?!”

“……네?”

“크흑……. 귀여워라.”

서커스 단장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점이 스위트피에게는 유리하게 돌아가서 다행이지만.

“좌석 안내해 줄게.”

“바이올렛이 알려 줘서 괜찮은데……. 혼자 찾아갈 수 있어요.”

“그래도 손님인데 직접 안내해 드려야지. 아, 물론 나는 공연을 주도해야 해서 같이는 못 가고, 이 녀석이 대신 안내해 줄 거야.”

단장의 뒤에 서 있던 건 얼굴에 화려한 분칠을 한 여자였다.

“노라, 바이올렛의 친구를 좌석까지 안내하는 일 좀 부탁할게.”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바쁜 사람 끌고 온 거잖아.”

여자는 투덜거리면서도 스위트피에게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단장은 여유롭게 갈 길을 가고, 비둘기가 들어 있는 가방을 꼭 끌어안은 스위트피는 여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잡히기 싫으면 조용히 해야 돼, 알았지?”

스위트피가 가방에 거의 얼굴을 파묻고는 비둘기에게 나지막하게 주의를 줬다. 비둘기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지, 다행히 움직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바이올렛의 친구라고?”

앞서 걷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스위트피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게 된 지는 하루밖에 안 됐지만요…….”

“고작 하루라고……?”

“그래도 서로 이름도 소개했고, 또…….”

하루 만에 자기 자신을 친구라고 소개하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긴 했다. 민망해서 변명하듯이 계속 말을 덧붙이던 스위트피가 결국 사실대로 이실직고했다.

“사실 친구를 안 사귀어 봐서 잘 모르겠어요…….”

“뭐, 네가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친구인 거겠지. 근데 바이올렛, 그 애도 널 그렇게 생각한대?”

“그래도 이렇게 공짜로 공연도 보여 주는 걸 보면……. 나름 절 좋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스위트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용케 반문했다. 여자는 스위트피의 말을 비웃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의하는 거 같지도 않았다.

“그 애는 속을 알 수가 없어. 아무한테도 마음을 안 열지. 단장은 하나뿐인 가족이던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아직 잊지 못해서라고는 하지만…….”

“…….”

“그렇게 항상 마음을 닫고 사는 아이는 곁에 누가 다가와 준다고 해도 평생 외로울 수밖에 없겠지.”

얘기 내용만 보자면 바이올렛을 힐난하는 내용 같았지만,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문득 충동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바이올렛의 어머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당사자인 바이올렛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제삼자에게 물어보는 것이라 선을 넘는 건 아닐까,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선선히 답해 줬다.

“다른 마을에 외가를 만나러 바이올렛을 옆집에 맡기고 멀리 외출을 나갔다나 봐.”

“…….”

“바이올렛의 외가 친척들이 사는 마을에 축제가 열려서 먹을 것을 얻으러 간 거 같은데…….”

“…….”

“그 마을에서 불이 번져서 큰 화재로 사람들이 전부 죽었대. 바이올렛의 모친도 거기서 시신으로 발견됐고.”

……어쩐지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였다.

축제 때 화제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던…….

“자, 저기 보이지?”

이상한 기시감의 정체를 눈치채기도 전, 여자가 스위트피에게 손으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는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거든. 저기 보이는 자리까지 찾아갈 수 있지?”

“그 정도는 당연히 혼자 찾을 수 있어요……!”

너무 애 취급을 하는 듯해 발끈하자, 스위트피를 가만히 보던 여자는 가볍게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재미있게 관람하렴, 꼬마야.”

먼저 지나쳐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스위트피는 아주 작은 소리로 툴툴거렸다.

“나 꼬마 아닌데…….”

리시안셔스도 맨날 나보고 꼬마라고 하고, 이젠 모르는 사람도 날 애 취급하고…….

‘내가 그렇게 키가 작은가…….’

가방을 고쳐 멘 스위트피가 그런 고민을 하며 자리를 찾아갈 때였다.

[나 좀 꺼내 봐! 숨 막히잖아!]

서커스 단원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비둘기가 푸드덕거렸다. 비둘기의 존재를 아주 잠깐 잊고 있던 스위트피는 서둘러서 가방 틈을 열어 비둘기의 숨통을 트여 줬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이 비둘기를 막상 숨겨 주긴 했는데, 참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서커스 단원들이 공연용으로 기르는 비둘기인데, 멋대로 숨겨 줘도 되나……? 하지만 당사자인 비둘기가 자유가 되기를 원하잖아.

고민하는 사이, 관객들이 앉은 자리에 조명이 꺼졌다.

“친애하는 관객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환상적인 공연을 보여 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단장의 멘트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공연은 환상적이었다. 스위트피는 공연이 진행될수록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신비한 묘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공중그네에 탄 남녀가 춤을 추듯이 허공에서 서로 환상의 호흡을 뽐냈고, 물이 가득 찬 유리 수조에 인어 분장을 한 여자가 오랜 시간 물속에서 잠수하며 화려한 몸짓을 보여 줬다. 외발자전거를 타며 불을 내뿜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껏 비좁은 세상 속에서 살아왔던 스위트피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난 이제 가 봐야겠다!]

스위트피가 화려한 공연에 한 눈을 판 사이, 비둘기가 탈출하려고 했다.

“어딜 가려고!”

물론 비둘기의 탈출은 허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스위트피가 비둘기의 머리를 다시 가방 안에 꾹꾹 눌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날 풀어 주려고 숨겨 줬던 거 아니었어?]

“그런 거 아니야! 널 어떡하면 좋을지 고민 중이었단 말이야!”

역시, 남의 비둘기를 멋대로 풀어 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거 같았다.

스위트피는 차분하게 비둘기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둘기야. 꼭 가출해야겠어?]

[이건 가출이 아니야. 생존을 위한 탈출이라고! 그놈이 언젠가 이 서커스 천막을 죄다 쓸어 버릴걸?]

“둘기야, 네가 뭘 봤는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네가 무서워하는 짐승은 철창 안에 갇혀 있을 거 아니야. 사자도 철창 안에 갇혀 있었는데 그 애는 안 무서웠다며?”

[아, 글쎄! 그건 우리와 같은 ‘짐승’이 아니라고! 그리고 철창? 참나!]

비둘기가 코웃음을 쳤다. 입버릇처럼 인간들은 멍청하다고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었다.

[그것은 우리와 달라. 뭘 원하는진 모르겠지만 나약한 척하는 거뿐이라고. 멍청한 인간들은 그것이 족쇄에 꼼짝도 못 하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야.]

“…….”

[언제든 끊어 버릴 수 있으면서 어울려 주는 거란 말이야.]

“으음…….”

[인간, 너 내 말을 지금 진지하게 안 듣고 있지?]

새로운 공연이 시작되자 무대로 집중력이 흐트러지던 스위트피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비둘기에게로 집중했다.

[위기의식을 못 가지는군. 하는 수 없지. 잘 들어, 작은 인간아.]

“난 작지 않아.”

[그럼 노란 털을 가진 인간아.]

“머리카락이야!”

[하여튼, 그건 사람도 잡아먹어.]

그야 육식 짐승들을 야생에서 만난다면 사람도 잡아먹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스위트피는 비둘기가 과장해서 얘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엔 비둘기가 의기양양하게 자기 발아래를 가리켰다.

그 증거가 이 가방 안에 있다고.

그러고 보니, 비둘기를 넣기 전에 가방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긴 했는데…….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자, 여러분-! 대망의 마지막 무대입니다!”

어느새 공연은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으나 지금은 서커스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손안에 막대기처럼 딱딱한 것이 쥐어졌다.

“먼 옛날, 신으로 추앙받던 신화 속 존재!”

스위트피는 비둘기를 피해 가방 안에서 손안에 잡힌 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 물체를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스위트피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비명은 사람들의 환호에 의해 묻히고 말았다.

“실존하는 드래곤과 신을 다루는 소녀, 바이올렛입니다!”

스위트피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손아귀에서 떨어진 사람의 뼈는 바닥에 굴러다녔고, 정면에 있는 무대에는 드래곤이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드래곤은 스위트피가 오래전에 본 적이 있던 드래곤이었다.

저 회색 비늘이, 너무나도 눈에 익었다.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헷갈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저 드래곤은…….

오래전 자신의 마을을 통째로 불태웠던…….

[야, 멍한 인간아. 지금 뭐 하는 거야?]

현기증이 일어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한 스위트피를 정신 차리게 한 것은 가방 속에 있던 흰 비둘기였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렸으면 어서 도망가야지!]

“…….”

[설마 너도 다른 인간들처럼 드래곤을 구경하게 돼서 신났다고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 네 말이 맞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드래곤의 힘을 알고 있었다. 이 비둘기의 말이 맞다. 지금은 도망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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