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차마 ‘싫어’, ‘안 돼’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에게 실망감을 안겨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위트피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바이올렛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다가 곧, 생각을 고치기로 했다.
‘리시안은 오늘 떠나자고 했지, 몇 시에 떠나자는 구체적인 말은 없었잖아.’
스위트피는 이내 자신이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저녁때 출발해도 큰일은 없을 거야.’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어제, 바이올렛은 자신들을 절름발이라 놀리던 소년들에게 굳이 서커스 티켓을 주면서, 자신에게는 절대 티켓을 주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지 않았던가. 그랬던 바이올렛이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게 의아해졌다.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특별히 주는 작별 선물인 걸까?
그러고 보니, 바이올렛이 티켓을 줬던 그 아이들. 지금 실종 상태라던 그 애들은 어제 이 서커스 공연을 보러 오긴 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스위트피.”
그러나 멋대로 이어지던 생각은 바이올렛의 친근한 부름에 그대로 끊어졌다.
“여기가 내가 지내는 방이야.”
“아…….”
스위트피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바이올렛의 방을 둘러보았다. 장거리 이동이 일상이라 그런지, 방 안에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작고 깨끗했다.
친구의 방에 초대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스위트피는 들뜬 기분으로 무례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못 한 채로 바이올렛의 방을 둘러보며 한참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탁상 위에 있는 작은 조각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만든 조각이야.”
스위트피가 묻기도 전에, 바이올렛이 먼저 답해 줬다.
“조각가이셨거든.”
“그렇구나…….”
“사실 기억은 안 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겨 놓은 조각상을 몇 개 집에 남겨 두셨는데, 이게 그중 하나야.”
“…….”
“나머지는 커서 이것밖에 못 챙기고 나왔어.”
그 말은 꼭, 집을 떠나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처럼 들렸다.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
“너희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는데?”
바이올렛이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답했다.
“지금은……, 죽었어.”
또래라는 이유로 느껴지던 친밀감이, 똑같이 부모를 잃었다는 사연을 접하자 유대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스위트피가 머뭇거리느라 말을 길게 끌긴 했으나, 끝내 자신의 사정도 밝혔다.
“나도, 부모님을 잃었어. 우리 언니도…….”
“…….”
“가족들을 다 잃었어…….”
바이올렛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꺼낸 얘기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힘들었을 과거를 얘기해 준 바이올렛에게, 너 혼자만이 아니라는 얘기를 해 주고 싶었다.
나도 가족을 잃었으니, 혼자 힘들어하지 마. 나는 널 이해해.
나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마고 부인의 밑에서 지낼 때, 스위트피는 지나치게 외롭고 힘들 때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라 누구보다 날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바이올렛이 자신과 같은 못된 생각을 하는 아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스위트피의 생각의 한계로는 이게 바이올렛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그럼 스위트피, 너도 혼자야?”
“나? 당연히 혼…….”
당연히 혼자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망설임이 생긴 것은 그 순간 리시안셔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성가셔 한다.
리시안셔스는 인간이 아닌, 드래곤…….
그러니까, 자신의 가족을 죽인 괴물과 동족이다. 자신은 살기 위해 리시안셔스에게 삶의 재미를 주는 대가로 붙어 있는 것뿐이다. 리시안셔스가 오늘 당장 자신을 버리고 간다고 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곁에 있어 줬고, 덕분에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와 지낸 후로는, 외롭다거나 혼자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혼……자는 아닌 거 같아.”
“…….”
“어쨌든 같이 지내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구나. 좋겠다.”
“바이올렛도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있잖아.”
서커스 단원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아까 봤던 단장도 바이올렛을 상당히 아끼는 눈치였다. 비록 피로 이어진 가족은 잃었지만 바이올렛은 함께 지내는 식구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바이올렛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좋은 사람들이지. 별다른 재주도 없는 고아를 거둬서 공연할 수 있게 가르쳐 주고, 돌봐 주고…….”
“그러니까, 바이올렛도 혼자가 아닌 거네. 그렇지?”
“……하지만 난 혼자나 다름없어.”
“왜 그렇게 생각해……?”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우면 여전히 혼자인 거지.”
“…….”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 때가 가장 행복했는데…….”
이번에는 마땅히 해 줄 말이 없었다.
누군가와 같이 있어도 외롭고, 돌아갈 수 없는 시절과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한없이 그리워하는 바이올렛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스위트피도 종종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고는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안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마고 부인의 밑에서 살 때는 미래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어서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거를 그리워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스위트피는 과거를 떠올리는 일을 멈췄다.
여전히 그 시절은 그립고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지만, 이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였다. 여전히 자신은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도 긍정적인 꿈을 꿀 수 있었다.
“저기, 바이올렛…….”
어떠한 말이라도 꺼내기 위해 스위트피는 잠시 닫혀 있던 입을 다시 열었다.
“스위트피.”
“어……?”
“난 공연 준비하러 가 봐야 할 거 같아.”
“아, 그렇구나…….”
하지만 미처 위로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바이올렛이 먼저 대화를 끊어 버렸다.
혹여 기분이 안 좋아진 것은 아닐까. 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바이올렛은 여전히 얼굴에 그림처럼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따 공연할 시간이 되면 이 좌석에 앉으면 돼. 알았지?”
“응, 고마워.”
바이올렛은 좌석 번호를 적어 주고는 먼저 침실을 떠났다. 바이올렛이 나가자, 낯선 공간에 혼자 남은 스위트피는 바이올렛이 두고 나간 작은 조각상을 구경했다.
드래곤은 매력적인 신화 속 존재이니 여러 예술가들의 소재가 되고는 했다. 그러니 이렇게 바이올렛의 아버지가 드래곤을 조각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스위트피의 입장에선 그리 달갑지 않긴 했다.
드래곤과 함께 지내고, 보호를 받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웃기지만 말이다.
스위트피는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던 작은 조각을 내려놨다.
‘아마 바이올렛의 아버지는 훌륭한 조각가이셨을 거야.’
비록 작지만 진짜 드래곤을 연상시킬 정도로 비늘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스위트피가 그 작은 조각에서 눈을 뗄 수 있게 된 것은 문밖에서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리고 나서였다. 무슨 일인지, 밖에서는 무언가를 잡아야 한다며 난리 치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망설이던 스위트피는 방문을 살짝 열었다. 그 틈으로 흰 비둘기가 푸드덕, 날아 들어왔다.
“아……!”
비둘기는 방 안의 창가로 날아가 유리를 부리로 콕콕 두드렸다.
[이 문 열어! 난 나갈 거야!]
비둘기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제기랄! 이러다가 다 죽게 생겼다고! 문 열어, 이 멍청한 인간아! 아, 멍청한 인간이 내 말귀를 알아들을 리가 없지……. 하여튼, 문 열어!]
아무래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인간이란 스위트피를 가리켜 하는 말인 듯했다.
비둘기한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자존심이 상한 스위트피가 허리께에 손을 올리며 눈썹을 추켜올렸다.
“멍청하다는 말 취소해!”
지금까지 만난 동물 친구들은 다 착했었는데. 이 비둘기는 이제껏 만난 동물 친구들과는 다르게 성격이 안 좋은 듯했다.
비둘기는 구구, 소리를 내며 스위트피를 응시했다. 그러나 본인도 긴가민가한 것인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내 말을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그에 스위트피가 곧장 대답했다.
“알아들은 거 맞거든? 네가 나보고 멍청한 인간이라 말귀 못 알아들을 거 같다고 했잖아!”
[오, 인간아! 내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잘되었다. 날 좀 도와다오.]
아무래도 이 비둘기한테 사과를 듣는 건 쉽지 않을 듯했다. 비둘기를 노려보던 스위트피는 순순히 사과받기를 포기했다. 비둘기한테 멍청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발끈하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 탓이었다.
“왜 나가려는 건데……? 넌 이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거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다오, 어디서 기어들어 온 지 모르겠는 인간아!]
아무래도 이 비둘기는 어휘력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냥 처음 본다고 얘기하면 될 것을 어디서 기어들어 온 지 모르겠다니…….
악의 없이 하는 말인 게 보여서 왜인지 더 기분이 나빴으나, 겨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글쎄, 난 이 서커스단의 일원으로서! 이제껏 훌륭하게! 그리고 아주 멋있게! 공연을 해 오며 잘 지냈단 말이다! 몇몇 멍청한 동족들은 공연이 끝나고 철창 안에서만 지내는 삶이 불편하다며,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 보고 싶다고 했지만 난 불만이 없었지.]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지는 거 같은데……. 요점만 짧게 얘기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비둘기가 쉬지 않고 쏘아 대듯이 얘기하는 탓에 말을 꺼낼 기회가 없을 듯했다.
스위트피는 자포자기한 채로 그냥 비둘기의 얘기를 계속 들어줬다.
[인간 녀석들이 신호를 보내 줄 때 날아다니기만 하면 삼시 세끼 따스한 밥이 나오지, 포식자들 걱정 없이 편하게 잘 수도 있지!]
“…….”
[그래, 우린 포식자에 대한 걱정 없이 편하게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우리를 배신했다! 포식자를 데려온 것이야!]
“포식자라고 하면, 어떤 동물인데? 사자?”
[흥, 그 이빨 빠진 사자 놈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섬뜩하긴 하지만 결코 우리에게 해를 가하지 못해! 똑똑한 인간들이 철저하게 우리를 분리시키고 있거든. 그런데 멍청한 인간들이! 그 ‘존재’를 데리고 오고 만 것이다!]
똑똑했다가, 멍청했다가…….
비둘기는 한 입으로 인간에 대해서 여러 말을 했다.
“그래서, 그 존재가 어떤 존재냐고!”
[으아아아! 이름만으로도 무서워서 차마 내 입으로는 그 존재의 정체를 말할 수 없어!]
비둘기의 호들갑에 스위트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정신 사나운 동물 친구는 처음이었다.
[눈은 뱀처럼 동공이 세로로 쫙 찢어져 있고……!]
직접 그 존재를 가리키는 단어를 말하지 못하는 대신, 비둘기는 그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온몸에 나 있는 비늘은 우둘투둘하지……!]
“그냥 커다란 뱀, 아니야?”
[아니래도!]
뱀처럼 눈이 찢어져 있는데, 또 뱀처럼 비늘까지 돋아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뱀이 아니면…….
순간, 스위트피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있었다. 비둘기를 바라보던 맑은 녹안이 방금 자신이 내려놨던 작은 조각에 향했다.
‘설마…….’
그 뒤의 생각이 이어지려던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