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심보가 못돼먹었던 아이들이 사라졌다고 통쾌해해야 할까. 그러나 스위트피는 타인의 상처와 불행을 비웃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하필이면 자신과 안 좋은 방식으로 엮였던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는 했다.
아이들을 찾고 있는 여자에게, 그날 아이들과 골목에서 마주쳤다고 얘기해 줘야 할까……?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가, 이 아이들의 행방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아는 바가 없어 망설여졌다. 전단 속, 자신이 기억하던 얼굴 그대로 그려진 초상화를 들여다보던 스위트피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결국 가던 걸음을 옮겼다.
초상화가 그려진 전단은 꾸깃꾸깃한 채 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이 버리고 간 전단지와 섞였다.
* * *
오늘 저녁에 있을 공연도 성황리에 마쳐야 하는 단원들은 분주했다.
접질린 발목에 리본처럼 보이게끔 예쁘게 붕대를 맨 바이올렛은 전날보다 가벼워 보이는 걸음으로 짐을 옮기는 단원들의 시선을 피해 다른 천막으로 숨어들어 갔다. 바이올렛의 손에는 검은색 가방이 들쳐져 있었다.
누가 보면 도망이라도 친다고 오해할 법한 걸음걸이로 조용히 천막 안에 들어가자, 철창 안에서 오들오들 떨던 짐승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분’의 심기가 안 좋았기 때문에 같은 천막을 쓰는 짐승들은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이올렛은 가엾은 사자와 비둘기와 토끼, 그 외에 공연에 함께 서는 동물들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던져 줬다. 하지만 바이올렛의 걸음이 향한 곳은 따로 있었다.
거의 집채만 한 철창 앞에 다가가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존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먹이를 먹어 전날보다 조금 더 커진 그는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있어야 했다. 이윽고 드래곤이 입을 벌리자 그 안에서 토사물이 쏟아졌다. 살이 깨끗하게 발라진 뼛조각들이었다. 바이올렛은 철창 안으로 손을 뻗어 뼛조각들을 가방에 담았다.
늘 그에게 헌신하는 소녀였건만, 소녀의 신은 상당히 심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입맛에 안 맞으세요……?”
『토할 만큼 역겨운 맛이군.』
“죄송해요,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서 먹이를 유인해 온 거예요.”
『변명은 필요 없다.』
드래곤이 소녀의 말을 자르고 짧게 일갈했다.
『내 반려가 이토록 쓸모없다니.』
“…….”
『내가 원한 먹이는 따로 있을 텐데.』
“모, 못 찾았어요…….”
힘이 약해진 제 드래곤은 다른 동족의 반려를 먹으면 힘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의 키와 맞먹을 정도로 작았고 힘이 약했던 드래곤은 새로운 지역에 자리 잡을 때마다 인간들을 잡아 지금은 집채만 해졌지만 모든 힘을 되찾기엔 아직 역부족인 듯했다.
“제가 인간으로 변한 드래곤을 어떻게 알아보겠어요.”
수도로 올라오자 자신의 드래곤은 다른 동족과 그 반려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말한 대로 평범한 인간이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을 알아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디에고, 우리는 괜찮을까요?”
주제넘은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디에고가 같은 드래곤의 기운이나 그의 반려를 느낄 수 있다면, 저들도…….”
『아니.』
“…….”
『걱정 말아라, 내 반려인 아이야.』
분을 담고 있던 디에고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철창 사이로 삐져나온 그의 발톱 끝이 바이올렛의 턱을 들어 올렸다.
『다른 드래곤들은 절대 내 기운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
그 이유까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겨우 심기를 가다듬은 디에고의 기분을 자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디에고는 바이올렛이 주제넘게 많은 걸 알려 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넌 내가 말한 그 먹이를 찾아올 수 있을 거란다.』
“제가, 어떻게…….”
『희미하지만, 너와, 네가 내게 가져다준 먹이에서 그 기운이 느껴졌거든.』
“…….”
『아이야.』
디에고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바이올렛을 불렀다.
『어제 너와 이 썩은 내가 나는 먹이들과 함께 있었던 인간이 누구니?』
어제 자신이 함께 있었던 사람.
그리고 디에고의 배 속에 살이 발라져 뼛조각이 된 남자아이들도 짧게나마 함께 있었던 존재는…….
『아아-』
평범한 인간은 느낄 수 없는 기척을 느낀 것인지, 디에고가 만족스러워하는 듯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먹이가 스스로 굴러 들어온 거 같구나.』
바이올렛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스위트피는 서커스단이 세운 천막 앞에서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 홀로 수십 번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안쪽에서 먼저 천이 걷히더니 다른 누군가가 나왔다.
무지개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우스꽝스럽게 꼬불꼬불하게 말아 묶은 남자였다. 전에 홍보할 때 얼핏 들었던 거로는 이 서커스단의 단장이라고 했었나…….
막상 찾아오긴 했으나 당황한 스위트피가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못 할 때였다.
“관객으로 찾아오셨나요? 아, 그런데 어쩌지. 공연이 열리려면 아직 좀 남았는데.”
“네? 아, 아니요. 전 그런 게 아니라…….”
말을 더듬던 스위트피가 겨우 용기 내 본 목적을 꺼냈다.
“바, 바이올렛을 만나러 왔는데요…….”
“바이올렛? 바이올렛 스완을 말하는 거니?”
“네, 맞아요.”
“아, 그러고 보니…….”
관찰하듯 스위트피를 살펴보던 남자가 말했다.
“네가 그 애구나? 바이올렛을 도와줬다던.”
“아, 그게…….”
“귀한 손님을 이리 세워 둘 수는 없지. 이리 들어오렴.”
스위트피를 안으로 들인 남자는 공연을 연습하거나 물건을 옮기는 과정들을 혼자 설명하며 앞서 걸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스위트피는 괜히 화려하고 밝아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다리를 저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특히나 앞서 걷던 남자가 뒤늦게야 뒤돌아서서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쳐다볼 때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미안하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자신이 다리를 저는 것도, 절름발이라는 걸 눈치채 주지 못한 것도, 남자의 잘못은 아니었다. 남자는 스위트피의 느린 걸음에 맞춰 걸어 줬다. 마침내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게 되자, 그제야 남자는 다른 단원에게 시켜 간단한 음료수를 내어오도록 했다.
“바쁜데 저 때문에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무슨 소리. 우리 귀여운 막둥이를 도와준 귀한 손님인데, 잘 대접해야지.”
누군가의 손님으로서 대접받는 게 처음이었던 스위트피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바이올렛이 어떻게 말을 한 건진 몰라도 자신은 이렇게까지 친절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었다. 거기다가 바이올렛이 발목을 다친 것도 자신 때문인데…….
“다른 녀석이 바이올렛을 데리러 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그 애가 있을 곳이라고는 한 군데밖에 없거든.”
남자가 먼저 말을 걸자, 스위트피도 억지로 긴장을 풀며 대화에 응했다. 사실 머릿속이 새하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에게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저기……, 그 한 군데가 어딘데요?”
“공연을 함께하는 동물들을 모아 놓는 천막이 따로 있거든. 바이올렛은 원래도 사람보다는 동물들에게 더 속내를 털어놓는 아이라 말이지. 문제는 그 ‘짐승’을 들여온 후, 지나치게 그것에게 마음을 쓰는 거 같아서 문제지만.”
“엄청 귀여운 동물인가 봐요. 바이올렛이 그렇게까지 마음을 준 걸 보면…….”
“하하. 그 반대일걸. 엄청 커다랗고 무시무시하다면 몰라도. 길들이기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몇 번 공연에도 세운 적이 있는데, 어제는 갑자기 성을 내서 공연에 못 세웠지. 오늘은 부디 그 짐승을 공연에 세울 수 있어야 할 텐데…….”
남자가 말하는 짐승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유려한 언변 덕분에 스위트피는 남자와의 대화가 지루하지 않았다.
“그 짐승이 뭔지,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스위트피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스위트피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스위트피가 고개를 내밀자, 남자가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실은 말이지, 우리가 오래전에 숲길을 지나가다가 오랜 전설 속에서나 듣던…….”
“단장!”
그러나 스위트피는 서커스 단장에게서 마저 그 짐승에 대해 전해 들을 수 없었다. 바로 내내 기다리던 바이올렛이 나타난 까닭이었다.
“바이올렛!”
스위트피는 반가움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이올렛의 반응은 스위트피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어……?”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반겨 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한 번도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 바이올렛에게 지나친 친근감을 느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차가운 분위기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적어도, 마지못해 반가운 척이라도 해 줄 줄 알았다.
“그게, 나는…….”
“…….”
“어, 그게…….”
“…….”
“이, 인사를 하고 싶어서…….”
반응이 없는 바이올렛의 모습에 스위트피의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역시,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된 사이인데 굳이 작별 인사하러 온 게 유별난 행동이었던 걸까. 과하게 행동한 거 같아 부끄러움이 앞섰다.
“나, 오늘 수도를 떠나거든.”
“……뭐?”
“수도에서 만난 또래 친구는 네가 처음이어서,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었어. 당황했다면 미안해…….”
스위트피가 소심하게 바이올렛의 눈치를 살폈다. 한참 말이 없던 바이올렛이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몇 시에 떠나는데?”
“지금 돌아가면 일행과 바로 떠날 거 같아.”
“……그렇게 급하게 떠나야만 해?”
“어……?”
아까까지만 해도 냉랭하게 느껴지던 바이올렛이 갑자기 태도를 달리했다. 이 두 소녀의 모습을 얼떨떨하게 지켜보던 단장이 바이올렛의 어깨를 툭툭,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휴, 나도 깜짝 놀랐잖아! 우리 막내가 많이 당황해서 반응이 뻣뻣했던 거였구나?!”
정말로 바이올렛은 당황했던 것뿐이었을까.
바이올렛은 숫기 없던 어제와 냉랭해 보이던 아까와는 다르게 먼저 다가와 스위트피의 손을 붙잡기까지 했다.
“떠나기 전에 우리 공연 보고 가는 게 어때?”
“공연……?”
“응. 괜찮죠, 단장?”
단장은 호쾌하게 웃으며 시원하게 허락해 줬다.
“아니, 저는…….”
일행이 기다린다고,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려 했으나 도통 말할 틈이 없었다. 바이올렛은 스위트피가 거절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내가 머무는 방을 보여 줄게.”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위트피는 처음 사귄 또래 친구의 적극적인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