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눈을 뜬 세상 속에서 보인 것은 새까만 어둠 속이었다.
아니, 어둠뿐인 줄 알았다. 스위트피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세상이, 사실은 자신을 드리운 거대한 무언의 그림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려 고개를 높이 치켜들 때였다.
「그것과 눈이 마주쳐서는 안 돼.」
아주 그리운 목소리가 스위트피를 붙잡았다. 위로 들어 올리려던 고개가 자연스럽게 등 뒤로 향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기억 속에서 얼굴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잊은 적은 없던 존재가 서 있었다.
“언……니?”
자신보다 좀 더 농도 낮은 밀 색에 가까운 금발을 가진 에리카가 예전처럼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하고 있었다.
「이리 와, 스위트피.」
“정말……, 언니야……?”
「어서 이리 오래도.」
언니의 모습은 스위트피에게 익숙했지만, 이제는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모습이었다.
“언니…….”
스위트피는 아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에리카를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뛰어가던 두 다리가 우뚝, 멈춰 선 것은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깨닫고 나서였다.
‘왜 다리가 안 아프지……?’
불편해야 할 다리를 절지 않고 뛰었다. 무리해서 달렸는데도 통증 또한 없었다. 그제야 스위트피는 현실을 깨달았다.
‘언니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언니는, 내 눈앞에서 죽었으니까.
현실을 직시하고 다시 앞을 바라보자 언니가 다시 보였다. 외모는 그대로였으나, 몸짓은 부자연스러웠다.
언니는, 에리카는 투명한 실에 연결된 채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스위트피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위트피는 뒤늦게야 에리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그림자의 영역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리카는 보지 말라 했었지만, 스위트피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어둠을 드리운 존재를 확인해야만 했으니까.
“아…….”
그리고 스위트피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드래곤이 얼굴을 들이밀며 여태 스위트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색 비늘이 익숙했다.
그때, 마을을 향해 날아오던 것도.
눈앞에서 언니의 심장을 뽑아 갔던 것도.
모두 회색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스위트피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는 눈을 뜬 세상 속이 아니었다. 눈을 감아야만 들어올 수 있는 꿈속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공포는 스위트피를 뒤덮고 있는 그림자처럼 소녀를 덮쳤다.
‘살려 줘…….’
꿈속에서 죽는다면, 현실 속의 나는 깨어날 수 있을까? 한 번도 꿈속에서 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현실은 물론이고 꿈속에서마저도 죽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날 살려 줄 수 있는 유일한 그 상대가 꿈속에서도 제게 손을 뻗어 줄 수 있다면…….
* * *
“허억……!”
깊은 물 속에 질식사하기 직전까지 잠겨 있다 나온 것처럼, 스위트피는 눈을 뜨자마자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숨을 들이키면서 눈이 마주친 것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채로 굳은 리시안셔스였다.
“악몽을 꾸는 것 같길래 깨워 주려 했는데……, 알아서 잘 일어났구나.”
그도 당황한 것인지, 스위트피를 향해 반쯤 뻗어 있던 손길을 거두는 몸짓이 영 어색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던 드래곤은 살짝 놀란 마음을 금방 잘 추슬렀다.
“안 좋은 꿈을 꿨나 보지?”
“……네.”
“무슨 꿈이기에?”
“무서운……, 괴, 괴물이…….”
“괴물이?”
“…….”
스위트피는 차마 더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자신의 고향 마을을 부수고 가족들을 죽이고, 자신의 다리를 이렇게 만든 커다란 괴물을 꿈속에서 재회했어요. 그 괴물은 당신과 같은 종족이에요.
……라고, 날것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때 그 드래곤이 언니의 심장을 왜 빼앗았는지 알고 있다. 다른 드래곤 반려의 심장을 취해 강해져, 최후에는 신이 되기 위해서겠지.
그래서, 자신의 가족을 해쳤던 그 드래곤은 아직까지 살아남았을까?
스위트피는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 드래곤이 아주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죽었으면 했다. 그게 설령 죄 없는 그 드래곤의 다른 반려가 죽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 가던 스위트피는, 자신이 한 생각에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드래곤은 죄가 있을지언정, 그 드래곤의 반려일 인간은 죄가 없을 것이다. 그저 재수 없게 드래곤의 싸움에 휘말린 것뿐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애꿎은 사람이 죽기를 바랐다.
‘내가…… 너무 못된 걸까.’
하지만, 반려의 심장을 뺏어야만 드래곤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아니야. 그게 정말 규칙이었나?’
반려가 죽으면 드래곤도 서서히 죽어 가지만, 꼭 반려를 이용해서만 드래곤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 만약에 반려와 상관없이 드래곤이 먼저 죽게 된다면……?
그때도 반려도 같이 죽는 걸까?
문득 새롭게 생긴 의아함에 스위트피가 혼자서 깊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침대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긴 리시안셔스가 창문을 열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일어나.”
시계를 보자 악몽 때문에 평소보다 한참 늦게 일어나긴 했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열어 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오후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켰다. 그런데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자 여느 때와는 다른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한 여자가 사람들에게 종이를 나눠 주며 고개 숙여 무언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간밤에 아이들이 사라졌다더군.”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리시안셔스가 의아해하는 스위트피를 대신해서 설명해 줬다.
“놀러 간다고 나간 애들이 사라졌다고 이른 새벽부터 저렇게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찾고 있어.”
몸에 걸친 겉옷을 여민 여자의 얼굴은 핼쑥해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아이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엿보였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자신이 마땅히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자신도 주어진 제 몫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리시안, 꽃을 구하러 가야 해요.”
스위트피의 이 말뜻은, ‘그러니 어서 인적 없는 곳에서 본체로 변해 날 데리고 멀리 이동해 달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니면서 리시안셔스는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언제까지 잘 만들어진 남의 정원에서 꽃을 훔치는 좀도둑 노릇을 할 생각이야.”
“도둑질은 어차피 제가 하는데, 왜 리시안이 자책하는 거예요?”
“그야 너의 도둑질에 내가 공조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지.”
“한때 드래곤은 신으로 추앙받았었잖아요. 신이 인간의 정원에서 꽃을 몇 송이 뽑아 간다고 해서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어요?”
“그래서 더 문제인 거지. 내가 인간처럼 돈이나 벌자고 도둑질이라니……. 한때는 알아서 인간들이 금은보화를 바치던 때도 있었거늘.”
“도덕적 양심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예요, 면이 안 서서 창피한 거예요……?”
리시안셔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므로 스위트피는 제 마음대로 후자 쪽에 무게를 실었다.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규칙이 있어. 그리고 그 규칙의 기둥을 만든 건…….”
“꽃을 좀 뽑으러 가는 게 그렇게 양심이 찔릴 일이에요……?”
리시안셔스는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스위트피는 그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그래도 함께 지낸 지 며칠 되었다고, 드래곤인데도 불구하고 리시안셔스가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다.
“우리가 금은보화를 훔치는 게 아니잖아요. 꽃을 좀 훔쳐서 되파는 것뿐이죠. 이것도 엄연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행위라고요.”
리시안셔스는 순진한 얼굴을 한 스위트피의 낮은 도덕성에 할 말을 잃었지만, 스위트피는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스위트피의 말대로 인간인 이 소녀에게는 의식주가 필요하고, 그걸 해결하려면 돈이 필요하니 말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한때 신으로 추앙받았던 드래곤의 위대함은 인간들의 천박한 화폐 시장에 썩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 꽃을 훔치고 나서……, 오늘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하자꾸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자고요? 갑자기요?”
이곳에서 나름 자리를 잡아 간다고 생각했던 스위트피가 의아해했다.
“잊지 말았으면 하는데, 네가 내 반려인 이상 언젠가는 다른 드래곤의 표적이 될 거야.”
“…….”
“어차피 한 곳에서 평생 정착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잠시 입술을 다문 리시안셔스는 무표정이었으나, 묘하게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무엇도 응시하지 않은 채 살짝 눈을 내리뜬 리시안셔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끝마쳤다.
“느낌이 안 좋아.”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조금 가라앉은 듯한 리시안셔스의 분위기가 쉽사리 질문을 꺼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어차피, 수도에서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늘 작은 마을에서만 지내다 보니 한 번쯤은 큰 도시에 오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다.
떠나야 한다면, 굳이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알았어요. 대신 친구에게 작별 인사만 하고 올게요.”
“친구?”
“어제 저와 부딪혔던 그 아이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친구야?”
“서로 통성명하면 ‘친구’ 아니에요? 보통은 서로 이름부터 알려 주던데…….”
“…….”
“……아닌가.”
사실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스위트피가 쭈뼛거리자 리시안셔스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개념에 대해서는 나보다는 인간인 네가 더 잘 알겠지.”
어쩌면 자신과 바이올렛 스완은 친구 사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신만 친구라고 생각할 뿐, 바이올렛은 전혀 아닐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넓은 수도에서 짧게나마 접점이 있었던 또래 친구에게 작별 인사 정도는 해 두고 싶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너무 늦지는 말고.”
“…….”
“……왜?”
너무 자연스러운 배웅에 스위트피는 멈칫했다. 방금 건넨 말이 이 애매한 관계에서 꽤 간지러운 말이라고 생각하는 건 스위트피뿐만이었을까.
여상한 리시안셔스의 반응에 스위트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걱정 말아요. 리시안이 신경 쓰이게 하지 않을 테니까.”
여관을 나선 스위트피는 아까 창문 밖으로 봤던 중년의 여자가 여전히 발을 굴리며 아이들을 찾는 전단지를 돌리는 것을 봤다.
자신이 도와줄 수 없는 안타까움을 마주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스위트피는 시선을 회피한 채 그대로 여자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얘, 꼬마야.”
하지만 존재감 없이 지나쳐 가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먼저 다가온 여자가 스위트피에게 전단지를 내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인데 혹시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이 주소로, 꼭 알려다오.”
“……네.”
스위트피는 전단지를 받자마자 고개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지나쳐 갔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괜히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던 탓이다.
여자가 서 있던 곳에서 한참 멀어진 후에야 스위트피는 전단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상당히 의외였던 건 전단지 속에 그려져 있는 아이들이, 스위트피가 짧게나마 만났던 아이들이란 것이다.
「절름발이끼리 친구래요!」
전날, 스위트피와 바이올렛을 놀려 대던 남자아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