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13화 (13/120)

<13화>

“와아…….”

스위트피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밤에 있을 공연을 홍보하던 신비한 사람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런데 제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가 그 신비한 사람들과 동료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럼 내가 전단지 돌리는 거 도와줄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

“나 때문에 다쳤으니까, 당연히 도와야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렇다면…….”

소녀는 스위트피보다도 숫기 없어 보였다. 사실, 바로 며칠 전만 하더라도 스위트피도 소녀에게 먼저 다가가 도와주겠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마고 부인의 밑에서 학대받는 절름발이 고아를 동정하거나 경멸했으니까.

스위트피를 동정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던 건 리시안셔스가 유일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스위트피를 귀찮아하기는 했으나, 다리를 전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만약 리시안셔스가 자신의 가족과 고향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드래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하지만 그랬으면 난 지금처럼 자유롭진 못했을 거야.’

그걸 알면서도 어째서일까.

스위트피의 머릿속에, 언니의 심장을 뽑던 드래곤이 초토화시켰던 마을의 풍경과, 리시안셔스가 자신의 부탁으로 태워 버렸던 마을의 풍경이 나란히 떠올라 합쳐졌다.

“…….”

갑자기,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갑작스레 마음이 왜 불편해졌는진 자기 자신에게도 설명하긴 어렵지만…….

“내 이름은 바이올렛 스완이야.”

뜻밖에도 먼저 통성명을 한 건 소녀였다.

“우리 서로 비슷한 또래인 거 같아서…….”

“아…….”

“너는……?”

조금 멍하니 있던 스위트피가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내 이름은 스위트피야! 스위트피 로렌!”

“……예쁜 이름이다.”

“고, 고마워…….”

스위트피는 발그레해진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전에 지내던 마을에서는 친구가 없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스위트피를 기피했고, 어쩌다가 다가오는 아이가 있어도 크리스가 항상 훼방을 놓고는 했다.

친구를 사귀어 본 지 너무 오래됐다. 바이올렛을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오늘 처음 만난 거고, 언제 헤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또래 여자아이와 이렇게 서로 이름을 주고받으며 편하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스위트피를 들뜨게 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 스위트피는 아주 의욕적으로 전단지를 돌렸다.

바깥에서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꽃을 내다 파는 게 일상이었던 스위트피는 열정적으로 빠르게 품에 들고 있던 두둑한 전단지를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에 성공했다. 오히려 절반을 나눴음에도 두세 장밖에 나눠 주지 못한 바이올렛의 것을 마저 분담할 정도였다.

“스위트피는 일을 정말 잘하는구나…….”

칭찬을 듣는 건 고아가 된 직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뺨을 발그레하게 물든 스위트피가 조금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며칠째 여기서 꽃 장사를 하고 있거든!”

그간 쌓아 온 경험이 꽤 된다는 자랑이었다. 그래 봤자 고작 ‘며칠’이 전부였지만, 그런 건 스위트피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발목은 괜찮아?”

“으응……. 돌아가서 단장한테 말하면 치료해 줄 거야. 그리고 내가 급하게 가다가 부딪힌 거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렇구나.”

오늘 만난 친구와 이제 슬슬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스위트피도 알고 있었다. 또래 친구와 이렇게 살갑게 대화를 나눠 본 게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기에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다.

“그럼 내가 천막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줄게!”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슬쩍 용기를 냈지만, 바이올렛은 슬그머니 스위트피의 다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먼저 말을 안 하고 있었을 뿐, 스위트피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걸 바이올렛도 모를 리가 없었다.

“너도 계속 아파 보이던데…….”

“그게……, 그렇긴 한데…….”

지나치게 무리해서 걸으면 무릎이 따끔거리고 발목도 더 아렸다. 아침 새벽부터 저녁 늦은 시각까지 일해야 했던 마고 부인의 주점에서 지낼 때는 익숙했던 통증이기도 했다.

지금도 수도에서 걸으며 꽃을 내다 파니 종종 다리가 아팠지만, 이렇게 걷기 싫을 정도로 심하게 아픈 것은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리의 통증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컸다.

“그럼 난 여기서 가 볼게.”

“그래.”

“조심해서 가, 바이올렛.”

친구를 여기서 더 부담스럽게 할 생각은 없었다. 스위트피는 자신의 아쉬움은 뒤로 밀어 넣은 채 걸음을 옮기려 했다.

“있잖아……!”

그러나 뒤에서 희미하게 붙잡는 바이올렛의 목소리에 스위트피는 가려던 걸음을 잠시 멈춰 섰다.

“왜?”

“그게, 저기…….”

바이올렛의 손에는 작은 종이 뭉치가 꾸깃꾸깃 접혀 있었다.

아직 전단지가 남은 걸까?

스위트피가 바이올렛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절름발이끼리 친구래요!”

사람들이 바닥에 던지고 간 전단지가 뭉쳐져 바이올렛의 머리에 가볍게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단지를 던지며 유치하게 놀려 대고 있는 녀석들은 아까부터 이 골목에서 기웃대던 남자아이들이었다. 스위트피와 바이올렛이 똑같이 불편하게 걷는 것을 지켜보더니, 기어코 놀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스위트피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이올렛은 자신과 부딪혀 넘어지느라 발목을 접질린 것뿐이었다. 여기서 진짜 절름발이는 자신뿐이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같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바이올렛도 절름발이라며 모욕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아니야……!”

스위트피는 더듬거리며 바이올렛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려고 입을 열었다.

“이 애는 다리를 삔 것뿐이야! 절름발이 같은 게……, 아, 아니란 말이야!”

“그럼 너는?”

남자아이 중 꽤 예리한 지적을 한 남자애가 비식거리며 스위트피에게 다가왔다.

“너도 다리를 삔 거냐?”

“나, 나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나는 절름발이가 맞아’, 라고 시인할 수는 없었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났지만, 돌멩이가 얹힌 것처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얘들아.”

그때였다.

“내가 선물을 하나 줄게.”

상황을 중재시킨 건 이제껏 내내 소극적이었던 바이올렛이었다. 바이올렛은 자신을 놀려 대던 남자아이들을 향해 종이를 내밀었다. 아까 리시안셔스에게 가려던 스위트피를 다시 붙잡을 때 손안에 쥐고 있던 종이였다.

남자아이들도 바이올렛의 행동이 의외였는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주춤거렸지만 이내 손을 뻗어 종이를 가져갔다. 이내 꾸겨진 작은 종이를 편 남자아이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색상이 비슷해 서커스 홍보 전단지인 줄 알았던 종이는 사실 서커스 티켓이었다.

“선물로 줄 테니까, 이따가 놀러 와. 알았지?”

절름발이들끼리 친구라며 놀려 댈 때는 언제고…….

단순한 남자아이들은 신이 나서 저들끼리 소리를 지르며 저 멀리 달려갔다. 골목에는 다시 스위트피와 바이올렛, 둘만 남았다. 한편, 스위트피는 왜인지 조금 서운한 기분을 느꼈다.

‘나도 서커스가 보고 싶었는데…….’

공연 티켓을 굳이 저 못된 남자아이들에게 준 바이올렛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과연 서운해해도 되는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저 티켓 말이야.”

“응.”

“스위트피, 네게 주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아주 조금이나마 느꼈던 서운하다는 감정은 바이올렛의 말 한마디에 아주 쉽게 풀려 버렸다.

그렇구나. 원래는 날 주려고 했었구나. 근데 저 진상인 남자애들을 평화롭게 떨어내려고 쟤네한테 준 거였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까까지만 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바이올렛이 이해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나는 괜찮아. 원래는 티켓을 돈 주고 사서 보는 게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너한테 안 미안해.”

“응……? 아, 그렇지. 티켓을 안 줬다고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

“…….”

“내가, 조금 바보 같은 소리를 했지……?”

스위트피가 민망함에 뺨을 긁적거리며 헤실헤실 웃었지만, 바이올렛은 마주 웃어 주지 않았다.

“너한테는 앞으로도 계속 티켓을 주지 못할 거 같아.”

“아, 나는 괜찮아! 내가 꽃을 많이 팔면, 그때 보러 갈게.”

“…….”

“혹시, 바이올렛. 너도 공연하는 거니?”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응시하는 스위트피와 눈을 맞춘 바이올렛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스위트피, 이건 너에게만 알려 주는 비밀인데…….”

바이올렛이 대단한 비밀을 속삭일 것처럼 운을 뗐다. 스위트피는 눈을 크게 뜨고 바이올렛의 말에 집중했다.

“우리 공연 재미없어.”

“어……?”

“쓰레기 같은 공연이야. 돈 내고 볼 가치도 없어.”

“…….”

“이건 비밀이다?”

상냥하게 웃은 바이올렛이 그대로 먼저 돌아섰다. 스위트피는 멀어져가는 바이올렛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이올렛의 말이 농담인 건지, 진담인 건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농담이겠지?’

아마 농담일 것이다. 비록 서커스 공연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스위트피는 마음속에서 분명 환상적인 공연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리시안셔스에게 돌아가야겠다.’

스위트피도 돌아가기 위해 바이올렛이 나갔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려 했다.

“아…….”

하지만 이제껏 꾹 억누르고 있던 다리 통증이 갑자기 극심해졌다.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한 것을 벽을 짚고 서서 간신히 견뎠다. 평소라면 여기서부터 묵고 있는 여관까지 가는 길이 가깝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언제 여관까지 걸어간담…….

‘리시안이 날 데리러 오면 좋을 텐데…….’

거기까지 막 생각이 닿던 스위트피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투정을 받아 주는 다정한 존재가 아니었다. 무시하거나 경멸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쓰럽게 여겨 주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리시안셔스는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리시안셔스가 자신에게 흥미를 느껴 잘해 주고는 있으나, 그 마음이 언제 바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스위트피는 혼자의 힘으로 계속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왼쪽 다리의 무릎에 바늘로 콕콕 쑤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때였다.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

고개를 한참 들어 올리자, 익숙한 얼굴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스위트피는 알 거 같았다.

‘아, 지금 되게 귀찮아하고 있다.’

그런데도,

“저 데리러 와 준 거예요?”

“그럼 내가 여기까지 왜 왔겠어.”

자신을 데리러 와 줬다.

“왜 데리러 왔는데요……?”

“네가 말해 놓고 네가 까먹으면 곤란한데.”

“……네?”

“사는 게 재미있게 해 줄 테니, 자신을 목숨 걸고 지켜 달라고 말했던 게 어디에 있는 누구였더라…….”

“아…….”

“오랫동안 안 돌아와서 나 없는 사이에 죽기라도 한 줄 알았지.”

자신이 그렇게 말하긴 했었다.

「사는 게 재미있어서 죽고 싶지 않게 해 줄게요.」

「…….」

「그러니까, 날 목숨 걸고 지켜 줘요.」

그러니까, 리시안셔스는 제게 꽤나 재미를 느꼈던 모양이다. 혹여 잘못될까 봐 데리러 와 주기도 하고.

걱정이라는 감정보다는 재미있는 장난감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비슷한 것일까.

“왜 입술을 삐죽거리지?”

“안 삐죽거렸어요!”

자신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있는지도 몰랐던 스위트피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왼 다리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휘청거렸다.

짧게 혀를 찬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몸을 지탱해 줬다. 그러나, 이번에는 넘어질 뻔한 몸을 지탱해 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으앗!”

스위트피의 몸이 번쩍 들린 것이다.

“이거 놔줘요!”

“꽃을 훔치러 갈 때는 내 발등 위에 자연스럽게 앉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창피해해?”

“그때랑 지금은 달라요!”

“뭐가 다르다는 건지……. 이래서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워.”

리시안셔스가 인간이 아닌 존재로 있을 때와 이렇듯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안아 드는 건 얘기가 달랐다. 그런데 리시안셔스는 무엇이 다른지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가만히 있어. 네 느린 걸음 기다려 주는 게 싫은 것뿐이니까.”

스위트피는 일부러 새하얗고 아름다운 리시안셔스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언제든 자신을 버릴 수 있고, 인간을 쉽게 죽일 수도 있는 눈앞의 드래곤은 무심하면서 다정했다.

스위트피는 그 간극이 괜히 서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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