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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12화 (12/120)

<12화>

뜻을 존중해 줬는데 왜 이러는 거지? 역시 인간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욕심이 너무 많아지는 거 같아서요.”

그러나 리시안셔스의 의문은 선선히 입을 여는 스위트피로 인해 금방 풀렸다.

“자유가 되고 돈도 벌었다고, 아직 그럴 처지가 아닌데도…….”

“…….”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게 너무 바보 같고 멍청해 보이잖아요.”

“네가 번 돈으로 갖고 싶은 걸 사는 게 왜 멍청해 보이는지 모르겠는데.”

“능력도 안 되면서 분수에 넘치는 물건을 가지는 건 허영심만 많은 거예요. 마고 부인은 저보고 늘 주제를 알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네게 주제를 알라고 하던 그 인간은 지금은 죽고 이 세상에 없지.”

직설적인 리시안셔스의 말에 스위트피는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옷 가게 주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손님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돈을 아껴야 한다는 말에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난 인간들의 천…….”

“천박한 화폐 개념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래.”

놀리는 것처럼 말꼬리를 자르고 자신이 할 말을 대신하는 스위트피가 마음에 안 들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리시안셔스를 향해 스위트피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리시안셔스는 조금 가까워졌다고 자신에게 맹랑하게 기어오르는 꼬마를 혼내는 대신, 치수도 안 맞는 옷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았다. 손에 들고 있다가 옷을 빼앗긴 스위트피는 커다래진 눈으로 리시안셔스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화폐 개념에는 관심 없지만, 이거 하나는 알고 있지.”

스위트피는 누더기 같은 옷을 대충 아무 곳에나 올려놓는 리시안셔스를 보고 한숨을 삼키며 그 옷을 다시 원래 있던 곳에 걸어 놨다. 그러면서도 리시안셔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렁뱅이도 깨끗하게 씻겨 망토와 왕관을 씌워 주면 왕으로 보인다는 것을.”

상대를 위로해 주거나 힘을 주려고 애쓰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세상의 이치를 얘기하듯, 높낮이가 없는 잔잔한 목소리였다.

“몸에 걸칠 천 쪼가리 하나를 고르는 데 분수를 운운할 필요가 있나?”

“그치만…….”

“입고 싶으면 입어.”

스위트피가 내내 흘끔거리던 원피스가 리시안셔스의 손에 의해 스위트피의 품에 무심하게 떨어졌다.

“네가 선택해서 걸치는 옷이 네게 어울리는 옷이 될 테니.”

스위트피는 괜히 샐쭉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살기 위해서 자신에게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하는 이 드래곤은 까칠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다정한 면이 있었다.

본인은 의도한 바가 조금도 없어 보이지만…….

꽃을 팔 때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던 손님이 갑자기 사라질 때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있던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바로 뒤에 서 있고는 했다.

지금도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분수에 넘치는 옷을 탐내는 자신에게 해 주는 말들은 무심한 듯하지만 분명 풀 죽어 있던 마음을 북돋아 주는 말이었다.

‘마음 약해지면 안 돼.’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은인이고 좋은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위트피도 리시안셔스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언제든 흥미가 떨어지면 자신을 버리고 갈 수도 있다.

제게 잘해 준다고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굴면 안 된다.

“하지만……, 리시안…….”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제가 저 옷을 사면 오늘 하루 먹고 잘 금액을 빼면 여윳돈이 없어요. 내일 제가 꽃을 많이 못 팔면 노숙해야 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일부러 짓궂은 장난기를 담아 물었다. 스위트피는 이번에도 리시안셔스가 짜증을 낼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도 스위트피에게 익숙해진 것일까.

“난 괜찮다만, 넌 곤란하긴 하겠구나.”

리시안셔스도 장난스럽게 스위트피의 말을 받아쳤다.

“우리 꼬마 반려님은 춥고 딱딱한 밖에서는 절대 못 주무실 테니까.”

물론 스위트피도 지지 않았다.

“리시안셔스는 드래곤이잖아요! 다른 사람의 집을 뺏으면 되죠, 뭐!”

진심은 아니었다. 나름 농담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스위트피의 농담을 들은 리시안셔스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서히 거둬졌다.

“심히 걱정돼.”

“네……?”

“가끔 네 도덕성에 심한 문제가 있는 거 같아서.”

자신이 떠난, 마고 부인과 크리스의 마을을 통째로 불태운 리시안셔스가 자신의 도덕성을 운운하다니…….

……그러나 마을을 불태워 달라고 한 것은 자신이니, 어쩌면 리시안셔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리시안셔스에게 도덕성을 문제로 가르침을 받고 싶진 않았다.

스위트피는 서둘러 옷을 들고 계산을 하러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품에 든 옷은 리시안셔스가 던져 준 옷이었다. 못 이기는 척 계산하는 스위트피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던 일상에 작은 사건이 벌어진 것은 옷 가게에서 나오고 난 직후였다.

헌 옷은 버린 채 새 옷을 입은 스위트피는 괜히 들뜨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묵고 있는 여관으로 향하던 걸음을 서둘렀다. 슬슬 다리가 아파졌지만 아직은 참을 만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 속 꽃들이 스위트피에게 말을 걸었다.

예쁘게 입었구나.

너에게 어울려, 스위트피.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인 채 꽃들에게 입 모양으로만 답했다. 고마워. 그리고 바구니 속에 담긴 꽃들을 들여다보느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았다.

“앗……!”

뛰어오던 누군가와 부딪힌 스위트피가 앞으로 고꾸라지던 찰나였다. 돌아보지 않아도 예상 가능한 단단한 손길이 스위트피의 어깨를 붙잡아 지탱해 줬다.

“조금만 한눈팔면 사고를 치지.”

“죄, 죄송해요, 리시안…….”

성가셔 하는 리시안셔스를 흘끗, 올려다본 스위트피가 소심하게 사과했다. 한편, 하마터면 바구니에서 떨어질 뻔한 꽃들은 비명을 질러 댔다. 어지러워! 무서워!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꽃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달려오다가 부딪힌 상대는 스위트피와 다르게 바닥에 나뒹굴었으니 말이다.

삐져나온 꽃들을 황급히 주섬주섬 담은 스위트피가 제 또래의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스위트피와 비슷하게 프릴이 달린 흰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제 앞으로 내민 손을 보며 머뭇거리던 소녀는 이내 그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를 삔 것인지, 제대로 중심을 잡고 서지 못했다.

“어, 어떡하지……. 병원에 데려다줄까요?”

생각보다 크게 다친 것 같은 모습에 스위트피가 당황했으나, 소녀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심부름을 하러 가던 중이었어서…….”

말끝을 흐리던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를 지나쳐 갔다. 소녀는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본인이 괜찮다고 했으니, 무시하고 가도 되겠지만 스위트피는 괜히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가 봐야겠어요.”

“어디를?”

리시안셔스가 설마, 하는 마음을 담아 되물었다.

“저 때문에 다쳤잖아요. 가서 부축이라도 해 주려고요.”

“누가, 누구를?”

대놓고 황당해한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불편한 다리에 시선을 던졌다.

사고로 영원히 다리를 절게 된 아이가, 달려오다가 부딪혀 넘어져 다리를 삔 다른 아이를 걱정하며 부축하겠다니……. 퍽, 우습게 느껴질 만한 일이긴 했다.

“저것이 먼저 와서 네게 부딪힌 거니, 네가 미안할 일은 아니지. 그냥 무시해.”

리시안셔스의 말이 맞는 말이긴 했다. 무엇보다 당사자가 괜찮다며 간 것이지 않나.

그냥 갈 길을 간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위트피는 제 또래의 여자아이가 괜히 심부름 가던 중에 저와 부딪혀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마음에 불편하게 남았다.

“꼬마야, 좀 들어가서 쉬어. 슬슬 다리도 아플 텐데.”

리시안셔스는 이번에도 맞는 말만 했다. 이런 불편한 왼쪽 다리로 오래 걸으면 통증만 심해질 뿐이었다.

멀리 이동할 때는 리시안셔스가 본체로 변해 스위트피를 태워 줬지만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이동할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반려’라고는 하지만 이름뿐인 관계였고, 리시안셔스는 그 정도로 스위트피를 과보호하지 않았다.

다리를 저는 소녀를 멸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쓰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그가 편하기도 했지만.

“실은 내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리시안이 귀찮은 거잖아요.”

“우리 꼬마 반려님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

“이름으로 불러 달라니까요.”

“그래, 그래.”

“‘스윗’이라고 불러 주면 더 좋고요.”

“그럴 일은 없을 거라 했지.”

“……칫.”

성가셔 하는 기색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리시안셔스가 대충 손을 내저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단, 날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야.”

“그럼 먼저 여관에 가 있어요. 저도 금방 갈게요.”

리시안셔스에게 돌아선 스위트피는 다리를 절면서도 앞서 걷고 있는 또래 아이를 향해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리시안셔스가 혀를 쯧, 찼다.

하지만 자신을 귀찮게만 굴지 않는다면 스위트피가 뭘 하고 다니든 크게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스위트피의 말대로 먼저 여관으로 향하려던 리시안셔스는 다시 몸을 돌려 스위트피의 뒷모습을 쫓았다.

정확히는, 스위트피가 쫓아가고 있는 낯선 소녀의 뒷모습이었다.

아주 흐릿하긴 하지만 어쩐지, 불길한 냄새가 났다.

* * *

괜히 리시안셔스와 투덕거리느라 시간을 잡아먹은 스위트피는 생각보다 많이 앞서간 소녀를 따라잡느라 고생해야 했다.

“저기……, 가, 같이 가요……!”

다행히 앞서 걷던 아이는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에 뒤돌아서 주었다.

“왜…….”

소녀는 습관처럼 말끝을 흐렸지만, 스위트피는 이 아이가 하려던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알 거 같았다.

자신을 왜 따라왔냐는 거겠지.

“나 때문에 다친 거 같아서……, 역시 병원에라도 데리고 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요…….”

리시안셔스의 말대로 이 소녀보다 다리를 더 저는 자신이 고작 발목이 삐었을 뿐인 아이를 부축한다는 건 썩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인 거 같았다. 대신, 병원에 데려가 주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아이의 병원비를 대 준다면 오늘 저녁은 굶어야겠지만, 다친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다행인 것은 리시안셔스가 사람의 음식은 입에 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몰라도, 괜히 리시안셔스까지 굶길 수는 없으니까.

“괜찮아요, 심부름도 빨리 끝내야 해서…….”

“심부름? 무슨 일인데요?”

“전단지…….”

“전단지?”

“광장 밖에 있는 골목에 가서 나눠 주라고 해서…….”

뒤늦게 스위트피의 시선이 소녀가 들고 있는 종이 뭉치로 향했다.

“당신을 환상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소녀가 들고 있는 전단지는 아까 광장에서 봤던 서커스 홍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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