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찰그락, 찰그락. 수레의 바퀴가 굴러가는 내내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소녀는 거대한 철창 너머에 있는 붉은 눈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전설 속에서나 들어왔던 신적인 존재가, 단 한 번도 신의 손길을 느껴 본 적 없던 소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뺨을 붉힌 채 희망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와 눈을 맞춰 주던 드래곤이 고개를 돌린 것은, 이들을 가둔 서커스 유랑단의 수도에 들어섰을 때였다.
『익숙한 냄새가 나는군.』
드래곤은 자신을 우러러보는 소녀를 불렀다.
『아이야, 날 도와주지 않으련?』
“제, 제가요……?”
최대한 소녀의 눈높이에 맞춰 좁은 감옥 안에서 고개를 숙인 드래곤이 부드럽게 속살거렸다.
『넌 나의 반려잖니.』
그 말은 소녀를 움직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 *
며칠 동안 스위트피와 함께 지내며 리시안셔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요 작고 영악한 꼬마 반려가 생각보다 엄청난 장사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장사꾼 꼬마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꽃을 사 달라는 말을 하는 것도 더듬거리던 스위트피는 이제 당당하게 꽃을 내밀고 거짓부렁을 말했다.
“예쁜 언니! 이 꽃에 관해 얽힌 아름다운 얘기를 아시나요?”
“미안하다, 꼬마야. 꽃이 필요하지가 않아서…….”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 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옛날,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저 꽃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니. 생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희생한 요정이 꽃으로 다시 태어난 거라는 스위트피의 이야기에 여자는 크게 감명받더니, 꽃을 무더기로 사 갔다.
물론 저 얘기는 스위트피가 즉석에서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순진한 얼굴을 지어 보이는 소녀의 얘기에 의구심을 가질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겉모습은 여전히 꼬질꼬질하긴 했지만, 활짝 웃는 스위트피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소녀였으니 말이다.
물론 첫날에 꽃을 팔 때처럼 심보가 고약한 행인들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뒤에 서 있는 리시안셔스와 눈이 마주치면 이내 헛기침을 하며 스위트피를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리시안셔스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리시안셔스가 본체일 때 입는 옷은 한때 인간들이 바쳤던 고급 비단옷이었지만 그 옷도 오랜 세월에 색이 바래져 있었다. 스위트피보다는 나은 행색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이 귀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위트피의 두어 걸음 뒤에 서 있는 리시안셔스로 인해 스위트피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건 그의 유독 아름다운 얼굴도 한몫하겠지만 인간이 아닌 자가 풍기는 위화감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드래곤이 조금만 부정적인 기운을 내뿜어도 인간들은 오한을 느끼고는 했으니 말이다.
“이 거지가 감히 누굴 붙잡는 거…….”
그래, 바로 저 남자처럼.
스위트피가 옷깃을 잡아당기자 성난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던 인간 수컷은 갑자기 느껴지는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한 발짝 늦게 스위트피의 뒤에 가까이 붙어 선 리시안셔스를 확인하고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허겁지겁 걸음을 서둘렀다.
“지금 저 지켜 준 거예요……?”
빙글, 춤을 추듯이 돌아선 스위트피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까의 그 멧돼지 같던 인간 수컷처럼 굴어야 마땅했다. 자신이 살기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의 언짢은 기분을 풍겨도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껴야 마땅할진대.
“고마워요, 리시안.”
분명 자신은 이 영악한 꼬마가 귀찮고 짜증 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희한할 정도로 스위트피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두려워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반려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반려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자신과 이 소녀의 사이에는 또 어떤 특수성이 있을까.
참 우스운 일이었다. 원하지 않는 반려인데도, 자신은 이 소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도, ‘반려’라는 이름으로 묶여야 한다니. 이때만큼 반려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않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드래곤에게 굳이 인간이 반려여야 하는 이유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거기다가 자신의 반려가 이토록 초라하고 작은 존재라니…….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갈무리한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를 위아래로 쭉 훑었다.
“꼬마야, 우선…….”
“스위트피.”
“……뭐?”
“스위트피 로렌이에요, 제 이름.”
이 당돌한 꼬마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리시안셔스가 입가에 습관처럼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짓긴 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의아함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제 이름 불러 준 적 없잖아요.”
그제야 리시안셔스는 꼬마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름, 이름이라…….
서로의 이름을 알려 주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건, 본격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이 꼬마를 무슨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이름뿐인 서로의 반려?
그마저도 그리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흥미가 끝나는 날에 이 소녀는…….
“리시안.”
생각의 끝이 핏빛 결말에 닿기 직전, 스위트피의 해맑은 목소리가 리시안셔스를 다시 현실로 불러냈다.
“누가 반려를 자꾸 ‘꼬마’라고 불러요. 그리고 전 그렇게 꼬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리지 않아요.”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것부터가, 네가 어리다는 증거야.”
꽤 고집 있어 보이는 눈매를 보던 리시안셔스는 픽, 웃어 버렸다. 이름이야 서로를 부르는 호칭일 뿐인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나.
“스위트피.”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특별히 져 주자. 이 맹랑한 꼬마의 말대로 어쨌든 반려로 묶인 사이이니 말이다.
“으음……. 리시안.”
“말해 보렴.”
“제 이름을 부르는 게 귀찮으면 ‘스윗’이라고 줄여서 불러도 돼요.”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거란다.”
“자연스럽게 부탁해 본 건데, 리시안은 역시 단호하네요…….”
어림없는 수를 쓰는 스위트피가 황당하고 어이없기까지 해서 바람 빠지듯이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꽃은 이 정도 팔면 된 것 같으니 이만 시장으로 가자.”
“시장은 왜요?”
“언제까지 그 모습으로 다닐 수는 없으니까.”
리시안셔스가 손가락으로 스위트피가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무심하게 말했다. 당연히 이 당돌한 꼬마가 세모눈을 뜨고서 자신의 옷이 어떠냐며 반박할 줄 알았다.
“아…….”
그런데 스위트피가 내보인 반응은 리시안셔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살짝 고개를 숙인 스위트피가 자신의 옷매를 더듬거렸다. 눈만 마주치면 조잘거리던 소녀에게서 다시 목소리를 듣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 마, 마고 부인이 냄새난다고 해서……. 자주 빨았는데…….”
“…….”
“더러워서 불쾌했으면……, 미, 미안해요…….”
리시안셔스는 고개 숙인 스위트피의 정수리를 빤히 내려다봤다. 귓바퀴가 붉어진 게 보였다.
“…….”
인간은 보기보다 까다로웠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노예처럼 부려지던 고아가 좋은 옷을 입으면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저런 거적때기를 입은 게 본인의 탓도 아닌데 왜 부끄러워하지? 어린 새끼 인간을 학대한 자가 잘못한 것일 텐데.
리시안셔스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굳이 스위트피를 달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자신은 말실수한 적도 없으니 제 잘못은 아닌 데다, 스위트피가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데 괜히 혼자 창피해하는 일이니 딱히 신경 써 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럽지 않았어.”
그런데도 굳이 말을 보탠 건, 그래도 한때 인간들에게 추앙받던 ‘신’으로서 인간에게 베푸는 작은 손길이었다.
“또한, 네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함부로 고개를 숙일 필요 없단다.”
“그럼, 옷은 왜 사라고 하는 거예요……?”
“네가 노력해서 번 돈으로 너에게 좋은 일을 해 주라는 것에, 설명이 필요한가?”
인간은 개미 떼처럼 많았고, 그중에는 선한 자들도 분명 많았다. 그러나 딱 선한 자들과 비례하는 숫자만큼 한심한 인간들도 적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꽃을 내다 파는 소녀라고 업신여기는 자들의 대부분이 스위트피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했다. 오래되어서 다 해진 스위트피의 옷을 보며 상대를 함부로 대해도 될 대상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말없이 눈을 깜빡거리며 리시안셔스의 눈치를 슬쩍 살피던 스위트피가, 이내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제가 리시안의 옷도 사 줄게요!”
“필요 없어.”
“리시안도 같이 노력했잖아요! 이 돈은 리시안도 같이 번 거라고요!”
“난 필요 없대도.”
“괜찮으니까 사양할 필요 없어요!”
이 귀찮은 꼬마에게 괜한 말을 했군.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에게 옷을 사러 가자고 했던 자신의 말실수를 금방 후회했다. 어째서 본인의 옷을 사라는 말이 자신의 옷도 함께 사자는 얘기로 귀결될 수가 있지?
정말이지, 이 꼬마는 상대방을 귀찮게 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리시안셔스의 속마음이 어떻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리시안셔스는 악의가 없는 소녀에게 겁을 주며 떨치지도 못할뿐더러, 스위트피는 꽤 고집스럽고 추진력도 빠른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스위트피에게 손목이 붙잡힌 리시안셔스는 여러 가게가 밀집된 광장으로 끌려가듯이 따라가 줬다.
* * *
아침부터 수도가 좀 소란스럽다고 느끼긴 했지만 느낌 탓일 거라 생각했던 스위트피는 광장에 오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화려하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광장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오늘 밤에 서커스가 열릴 것이라는 전단지와 함께 그들은 서커스 표를 판매하는 중이었다.
어떤 사람은 얼굴에 분칠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왕족처럼 반짝거리는 드레스를 입고서 호객 중이었다.
스위트피는 잠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고 싶니?”
“……아니요.”
그러나 리시안셔스의 질문에 스위트피는 금방 고개를 돌렸다.
“흐음……. 그래?”
리시안셔스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척한 스위트피는 근방의 옷 가게 중에 가장 저렴해 보이는 옷 가게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너무 커서 자신과 사이즈도 맞지 않는, 그러나 가장 저렴하고 질감이 질겨 보이는 옷을 고르는 것이 아닌가.
누가 보더라도 소녀의 취향은 아닐뿐더러, 스위트피의 나이대가 입을 옷도 아니었다.
“오늘 숙박비와 식비는 충분히 벌었을 텐데, 꼭 그렇게 아껴야만 하나?”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어 묻자, 스위트피가 똑 부러지게 답했다.
“당연하죠. 오늘 꽃을 많이 팔았다고 내일도 그러리란 법은 없잖아요? 돈은 모아 둘 수 있을 때 모아 둬야 한다고요.”
“그럼 저 흰색 천 쪼가리를 흘끗대지 말았어야지.”
“머리랑 마음이 따로 노는 걸 어떡해요.”
본인이 극구 사양한다면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리시안셔스는 뜻대로 하라는 의미로 옷을 고르던 스위트피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스위트피는 뭐가 불만인지, 입술이 조금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