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10화 (10/120)

<10화>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구해 줬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의 복수를 해 줬다.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데리고 마을을 떠나 줬다.

그러니까 자신은 신이 억지로 만든 의미도 없는 어린 반려에게 꽤나 많은 것들을 해 줬다. 그런데 이 콩알만 한 반려는 리시안셔스를 무척이나 무능력한 존재처럼 흘끔댔다. 결국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마을로 내려가 시장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바구니를 훔쳐 오는 것을 못 본 체해 줘야 했다.

처음으로 인간들의 천박한 자본주의에 의해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다.

스위트피와 마을 입구를 나서 걷던 리시안셔스는 언짢은 기분을 숨길 생각도 없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절뚝거리면서도 리시안셔스의 보폭에 맞춰 걷던 스위트피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리시안.”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리시안은 드래곤이고, 드래곤은 인간과 다르니까 돈이 없는 게 당연하죠. 전 다 이해해요.”

“꼬마, 네 이해 따위는 필요 없어.”

“스윗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런 다정한 호칭을 부를 만큼 우리가 특별한 관계는 아니잖니.”

비꼬듯 다정한 말투를 쓰는 리시안셔스를 보던 시선을 내린 스위트피는 슬며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그래도 반려면 나름 특별한 관계 아닌가? 물론 리시안은 반려를 원하지 않았다고 하니 오히려 싫긴 하겠지만…….

그래도 리시안셔스는 생각보다 스위트피가 원하는 대로 전부 다 따라 줬다. 마을까지 같이 가 준 것도 바구니를 훔쳐 도망치는 스위트피를 기다려 준 것도 리시안셔스였다.

왜인지 리시안셔스는 이 상황이 꽤나 굴욕적인 모양이지만…….

“대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어?”

스위트피는 기분이 좋았다.

“전에는 도둑질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마고 부인은 집 안에 뭐 하나 사라지면 제가 훔쳤다고 때렸거든요.”

“…….”

“근데 진짜 도둑질을 했는데도 아무한테도 안 맞으니까, 기분이 너무 좋아요.”

말간 웃음소리를 내며 웃는 스위트피를 보던 리시안셔스는 별다른 대꾸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웃음소리가 꽤 듣기 좋다는 생각이 조금쯤은 들기도 했다. 참새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웃음소리를 잠시 즐기던 리시안셔스가 그제야 스위트피가 무리해서 자신을 쫓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스위트피의 다리 문제가 아니어도, 서로의 다리 길이로 인해 보폭의 차이도 컸다.

리시안셔스는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없이 보폭을 줄여 느리게 걸었다. 그 배려를 스위트피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눈에 띄게 느려진 리시안셔스의 걸음걸이에 스위트피는 조금 놀랐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날 마냥 싫어하거나 귀찮아하지는 않아서.’

정말 싫기만 하고 귀찮기만 한 존재라면 이런 배려를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스위트피는 잘 알고 있었다.

“리시안, 이쯤이면 될 거 같아요.”

마을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발 한쪽을 내줬다. 스위트피는 그런 리시안셔스의 발등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리시안셔스는 순식간에 드래곤이 되는 동시에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드래곤이 된 그의 발목을 세게 끌어안던 스위트피는 상승하던 드래곤의 몸이 일정한 위치에서 안정적으로 날기 시작하자 그제야 조금은 긴장을 풀고 그의 발등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제 어디로 갈까.』

자신의 품에 다 잡히지도 않는 발목을 끌어안고 눈을 감고 있던 스위트피는 의아함에 눈을 떴다.

“지금 설마 저한테 물어본 거예요?”

『그럼 여기에 꼬마, 너 말고 누가 있다고.』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을 물어보는 건 조금 낯선 일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부탁은 뭐든 다 들어줬다. 크리스의 팔을 부러뜨려 줬고 마을을 불태워 줬다.

자신을 좋아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정신 차려, 스위트피!’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을 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의 단면적인 모습만 보고 안심하려 하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가!

혼자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 스위트피는 즉석에서 충동적으로 떠오른 장소를 말했다.

“수도나, 좀 큰 도시에 가고 싶어요. 전 한 번도 큰 도시에 나가 본 적이 없거든요.”

리시안셔스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조금 리시안셔스가 익숙해진 스위트피는 그것이 긍정의 뜻이라는 걸 알 거 같았다.

원래 살던 마을에서 해안가 마을에 오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이동 시간이 꽤 길었다.

드래곤의 발등을 타고 날아가면 편할 거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비늘로 덮인 드래곤의 발등은 너무나 딱딱해서 엉덩이가 배길 정도였다.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미끄러지면 아래로 추락할 것이기 때문에 긴장을 놓을 수도 없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서 딱딱한 곳에 앉아 떨어지지 않게 거대한 드래곤의 발목을 끌어안는 것은 무척이나 지치고 몸이 뻐근해지는 일이었다.

물론 직접 하늘을 날아야 하는 리시안셔스가 가장 힘들 테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꽃이 보이면 수도로 가는 도중에 지상에 내려와 꽃을 꺾는 시간을 가진 덕분에 가는 길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리시안셔스의 속도가 빠른 덕분이기도 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수도에 도착한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는 사람이 많은 거리로 향했다. 자신이 살던 작은 마을과 다르게 화려한 건물들은 스위트피의 눈을 사로잡았지만 마냥 수도 구경에 정신이 팔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꼬마야, 여기서 뭘 하려고.”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미 인간형으로 돌아와 있었던 리시안셔스가 절뚝거리면서도 열심히 걷는 스위트피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뭘 하긴요, 꽃을 팔아야죠.”

“진짜로 팔려고?”

“그럼요.”

설마 했는데, 생각보다 근성 있는 꼬마였다.

“여관에서라도 자야 하는데, 우린 돈이 없잖아요.”

“…….”

“아, 리시안에게 눈치를 준 건 아니에요.”

“난 네 눈치 본 적 없어.”

냉정한 리시안셔스의 대답에 머쓱해진 스위트피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드래곤이 내 눈치를 볼 리가 없지.’

돈 얘기 하니까 자신을 노려본 거 같았는데, 착각이었겠지.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남의 꽃밭에서 꽃을 훔칠 때마다 상당히 치욕스러워했다. 한때 신으로 추앙받던 드래곤으로서 도둑질에 간접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수치스러운 듯한 눈치였다.

반면에 스위트피는 조금 신이 난 상태였다. 나쁜 짓을 안 했을 때도 크리스가 한 짓까지 누명 씌워서 맞은 적이 있었는데, 나쁜 짓을 잔뜩 하고도 혼이 나거나 맞지 않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숨 막히는 지옥 속에 있었던 것인지 실감이 났다. 그리고 완전한 자유를 찾았다는 것도.

하지만 자유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꼬, 꽃 사세요. 꽃 사세요!”

스위트피는 어색하게 꽃바구니를 든 채 사람들을 붙잡으며 장사를 하려 시도했다. 리시안셔스는 전혀 상관없는 사이인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살짝 붉어진 귀가 그가 이 상황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줬다.

하지만 당장 오늘 밤, 따뜻한 곳에서 지내려면 못 해도 20송이는 팔아야 할 텐데…….

마고 부인이 한때 주점과 함께 여관까지 같이 운영한 적이 있기 때문에 세상 물정 모르는 스위트피도 이런 계산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몇몇 사람들은 다리를 저는 스위트피를 안쓰럽게 여겨 꽃을 사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위트피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기피했다.

‘그래도 대놓고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야…….’

이제 겨우 다섯 송이를 판 스위트피는 막 자신의 앞을 지나가던 두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자매인지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답게 대화를 나누던 여자들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꽃 사세…….”

스위트피는 차마 그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여자들 중 한 명이 코를 막으며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낸 탓이었다.

“…….”

굳은 스위트피의 얼굴을 보고 두 여자는 서로 눈을 맞추며 키득거렸다. 더러운 동물을 구경하는 듯한 눈빛에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던 스위트피의 입을 누군가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유를 얻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던 착각에 찬물이 끼얹어진 순간이었다.

“얘, 미안한데 좀 멀리 떨어져 줄래?”

“죄, 죄송…….”

스위트피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그만 실수로 발을 헛디뎌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어어……!”

무의식적으로 앞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꾀죄죄한 자신의 행색을 보고 비웃는 여자들이 제게 손을 내밀어 줄 리 없었다. 스위트피는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며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어깨에 단단한 손길이 먼저 닿았다.

반쯤 감기던 눈을 뜨자 리시안셔스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똑바로 서.”

“아, 네!”

리시안셔스의 손에 기대어 몸이 반쯤 뒤로 젖혀진 채 리시안셔스를 올려다보던 스위트피는 황급히 중심을 잡고 섰다.

‘계속 모르는 척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나서서 도와줄 줄은 몰랐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영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스위트피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방금 전만 해도 자신을 무시하던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스위트피를 볼 때와는 다르게 조금 넋이 나간 얼굴로 리시안셔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 인간들은…….”

스위트피는 황급히 팔꿈치로 리시안셔스의 옆구리를 쳤다. 의아해하는 리시안셔스의 눈빛에도 스위트피는 외려 그에게 눈치를 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참 아름다운 아가씨들이죠? 그렇죠, 리시안?”

“내 기준에는…….”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려던 리시안셔스는 손짓과 몸짓으로 그렇다고 말하라는 스위트피의 표현에 결국 한숨과 함께 원하는 대답을 해 줬다.

“그렇네, 참 아름다운 아가씨들이야.”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갑자기 두 숙녀가 호의적으로 변한 것이다.

리시안셔스에게 대놓고 호감을 보이며 바구니 안에 있던 꽃을 다 사가기까지 했다. 거기다 그들은 도로 가야 할 길을 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리시안셔스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놀라운 기적을 맛본 스위트피는 한 가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거다. 바로 이거야.

미인계로 꽃 장사를 하는 거야!

“리시안.”

“안 돼.”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요?”

“난 인간들의…….”

“천박한 화폐 개념에 연연하지 않는다고요?”

문제는 리시안셔스가 생각보다 더 단호하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설득을 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여관을 잡으러 가요.”

스위트피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앞서서 걸어가려던 리시안셔스는 이내 멈칫하고는, 스위트피의 보폭에 맞춰 걸어 줬다.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제게 하나둘씩 맞춰 주는 리시안셔스를 보며 스위트피는 오늘이 꽤 나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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