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9화 (9/120)

<09화>

“푸에취!”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리시안셔스는 자신의 얼굴에 튀기는 침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차마 더러운 것을 손으로 닦아 낼 수 없어 옷깃으로 닦아 낸 그는 스위트피를 말없이 응시했다.

아무리 따뜻한 날씨라고는 하지만 해가 저문 밤공기는 싸늘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리시안셔스에게 다가오던 스위트피는 의도치 않게 그의 얼굴에 침을 튀기고는 놀라서 제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 그게…….”

리시안셔스는 지금 저 꼬마가 괘씸하고 거슬리고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반려로 연결된 까닭에 자신을 부르는 저 꼬마의 목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울린데다 차마 가엾어서 외면을 못 하고 손을 내밀어 준 것이 화근이었다. 어차피 얼마 안 가면 저 아이를 볼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얼굴에 침까지 맞은 건 역시 기분 나쁘기는 했다.

“죄, 죄송…….”

“…….”

“……해요…….”

……그렇다고 해도, 악의 없이 실수를 저지른 아이에게 해를 끼칠 만큼 자신이 악한 드래곤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냥 놔둬도 죽을 목숨이지만.

“쯧.”

언짢음을 담아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스위트피가 다시 리시안셔스에게 다가와 바로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근데요, 리시안.”

“그렇게 부르지 마. 네가 부를 애칭은 아니니까.”

“그럼, 리시.”

“……그렇게 징그럽게 부르지 말라니까.”

“하여튼, 리시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쉽게 겁을 먹는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당돌한 면이 있는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경고에도 애칭으로 부르는 것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적하는 것도 귀찮은 리시안셔스는 더 이상 스위트피가 부르는 애칭 같은 호칭을 고치기를 포기했다.

“우리 돈을 벌어야 해요.”

“돈?”

하, 짧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겁이 많으면서도 당돌하게 말하는 인간 꼬마의 말에 리시안셔스의 자긍심이 깎였다.

“지금 나에게 인간들이 만든 하찮은 화폐 개념에 연연하라는 소리인가?”

이게 어제도 돈, 돈거리더니. 기껏 다 죽어 가게 생긴 거 살려 줬더니 하는 말이 인간들의 천박한 자본 시장에 뛰어들라는 거였다.

“그게 아니라…….”

리시안셔스의 말투에 날이 서 있자 스위트피는 손가락을 배배 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똑바로 말해.”

꼬마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어주는 건 딱 질색이었다. 리시안셔스가 냉정하게 일갈하자, 스위트피가 애써 고개를 치켜올리고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인간이잖아요.”

“그래?”

“하루 이틀 정도는, 푸에취!”

“…….”

“바, 밖에서 자도 되는데……, 에취!”

“…….”

“겨울에는 얼어 죽…… 에취!”

일부러 저러나?

“삼시 세끼는 아니더라도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먹어야 하고…….”

“…….”

“겨, 겨울에 외투 한 벌 정도는, 푸에취!”

이 순진한 인간 꼬마가 일부러 연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일부러 이러나 의심이 될 정도로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말끝마다 재채기를 해 대니, 인간 꼬마를 밖에서 재운 자신이 인정머리 없는 드래곤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겨울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 외투가 필요하지 않을 이 꼬마에게 괜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가만히 뒀으면 같은 인간들에게 학대나 당했을 인간 꼬마에게 자유를 준 것만으로도 자신은 꽤나 선의를 베푼 것이었건만…….

“리시안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제가 열심히 돈을 벌 궁리를 해 볼게요.”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이거지?”

“아, 그건…….”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돼, 꼬마야.”

“하지만 아주 조금은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

“내가 왜 도와줘야 하지?”

“그건……, 에취! 푸에취!”

“……이 영악한 꼬마가.”

리시안은 이 꼬마에 대해 생각을 정정하기로 했다. 이 망할 꼬마, 어쩌면 순진한 게 아니라 영악한 걸지도 모른다.

“어디 가요?”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나무 맡에 기대어 있던 리시안셔스가 몸을 일으키자 스위트피의 눈이 커다래졌다.

“계속 귀찮게 조잘거리니 피곤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저 버릴 거예요?”

스위트피가 재빠르게 리시안셔스의 옷깃을 붙잡았다.

“좀 놓지?”

리시안셔스가 손목을 가볍게 흔들며 놓으라는 표시를 했다. 여전히 스위트피의 눈에는 불신과 불안함이 서렸지만 그 고집은 오래가지 못했다. 힘이 풀린 것처럼 리시안셔스의 손을 놓은 스위트피가 불안한 듯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돌아올 거죠?”

스위트피의 간절한 물음에도 리시안셔스는 돌아보지 않은 채 절벽 끝으로 걸어갔다.

“돌아올 때까지 계속 부를 거예요!”

불안함이 극에 달한 스위트피가 협박조로 외치자, 그제야 리시안셔스가 뒤돌아봤다. 소리 없이 내쉬는 숨결에는 한숨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이 너무 주제넘게 굴었을까. 바짝 긴장한 스위트피가 마른침을 삼켰을 때였다. 리시안셔스가 입을 열었다.

“급한 상황일 때만 불러.”

귀찮음이 잔뜩 묻어 나온 짜증 섞인 경고에 그제야 스위트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시안셔스는 순식간에 본체로 변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저 멀리 날아가 까만 점이 되었다. 점점 멀어지는 리시안셔스의 뒷모습을 빤히 보던 스위트피의 얼굴은 밝아진 표정에서 점점 낮게 가라앉았다.

솨아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풀들이 서로 부대끼며 잔잔한 소리를 내었다. 수많은 풀과 나무. 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드래곤이야! 드래곤의 반려야!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자연은 이 땅의 주인이었던 드래곤을 알아보고는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스위트피는 그들 중 가장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나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나 좀 도와줄래?”

그에 나무는 잠시 침묵했다. 스위트피의 능력을 모르기에 자신을 부른 게 맞는지, 긴가민가할 때였다. 스위트피는 가볍게 나무의 몸통을 치며 확실하게 말했다.

“너 부른 거 맞아.”

* * *

스위트피가 식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빠른 비행을 마친 리시안셔스가 발을 내디딘 곳은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스위트피에게도 리시안셔스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특히나 리시안셔스에게는 더욱더.

아름다운 꽃이 감싸고 있는 무덤 위에 무의식적으로 뻗어 나가던 손이 멈칫한 건, 오랫동안 안 들리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였다.

「인간을 어여쁘게 여겨 주세요.」

꽃 한 송이를 어루만져 주던 손길이,

「당신이 나를 그리 여기는 것처럼.」

자신을 보던 올곧은 시선이…….

“…….”

그가 또다시 이미 다 끝난 과거에 잠겨 들어갈 때였다.

「내가 살고 싶게 해 줄게요.」

과거라는 깊디깊은 수면 아래에 잠겨 들던 그에게 현재가 손을 뻗었다.

「사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죽고 싶지 않게 해 줄게요.」

하필이면 그 망할 꼬마의 목소리가…….

“우리, 너무 오래 붙어 있었잖아.”

딱히 그 꼬마의 말대로 살고 싶다거나 재미를 느끼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꼬마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꽤 궁금했다.

“네 말대로 인간을 어여삐 여겨 볼까 해.”

어차피 돌아올 테지만.

리시안셔스는 그렇게 잠시간 동안의 작별을 고했다.

* * *

자신을 옭아매던 것에서부터 도망친 것만으로도 자유로워진 거 같았다. 아직 못 해 본 게 많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 또한 많았다. 그랬기에 스위트피는 죽고 싶지 않았다.

‘리시안셔스가 날 살려 둔 건 내가 그에게 지껄인 약속 때문이야.’

그에게 재미를 주겠다던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리시안셔스는 자신이 다른 드래곤에게 죽도록 놔둘 것이다. 더 심각한 상황은 그가 직접 스위트피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감사했고, 그가 싫지 않았다. 자신이 건방지게 굴 때마다 의외로 관대하게 넘어가 주는 점이 그가 생각보다 인간을 벌레 취급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두려웠다. 스위트피가 그에게 일부러 더 맹랑하게 구는 것은, 그가 그렇게 해야만 자신에게 재미를 느끼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뭘 어떻게 해야 그가 재미를 느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막막했다. 서로의 반려를 건 드래곤들의 싸움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리시안셔스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되기에.

그가 자신을 떠나거나 죽이지 않게 하려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돈을 벌자.’

먼 미래와 현재, 둘 모두를 생각해서라도 지금 당장 시급한 건 돈이었다. 다행히도 절벽 위에 있는 존재들 중 구석 틈에 피어 있던 작은 꽃 한 송이가 스위트피에게 큰 조언을 하나 건넸다. 그리고 스위트피는 꽃의 그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정말 고마워. 이따가 리시안이 돌아오면…….”

자신에게 조언을 해 준 꽃에게 감사 인사를 막 할 때였다. 부드럽고 잔잔하던 바람이 갑자기 거세졌다.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스위트피는 저 멀리서 날아오는 검은 드래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시안셔스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돌풍이 심해져 팔로 눈가를 가릴 때쯤, 바람이 멎었다. 슬며시 눈을 보호하던 팔을 치우자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리시안셔스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귀찮음이 한 스푼 섞인 건조한 표정을 보자 절로 주춤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이내 활짝 웃으며 리시안셔스에게 뛰어갔다.

물론 차마 안길 수는 없어 코앞까지 다가가 어색하게 멈춰 섰지만.

“돌아왔네요!”

“약속했으니까.”

그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인간들과 다르게 거짓말은 안 하거든.”

그래도 다행인 건 리시안셔스가 자신을 버릴 생각은 아직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아, 맞다.”

“……왜요?”

“우리 꼬마 반려님께서 돈을 벌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고 하지 않으셨나?”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런 방법 따위 생각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 리시안셔스의 질문은 스위트피를 놀리려는 의도가 아주 다분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스위트피는 기꺼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외로 힘차게 대답하는 모습에 리시안셔스가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꽃을 팔 거예요!”

스위트피는 당당하게 말했다.

“꽃은 어디서 재배하려고?”

“어차피 꽃은 자연에서 피잖아요. 리시안셔스는 빠르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꽃을 모으면…….”

“포장지나 화병은?”

“으음……, 그건…….”

“또 많은 꽃을 운반할 수레는?”

“그건 만들면 되죠!”

“무슨 수로?”

“그야 리시안이…….”

리시안셔스의 표정이 대번에 안 좋아졌다.

“그 수레는 어떻게 옮길 건데?”

“그것도 리시안이…….”

“이 영악한 꼬마가, 진짜…….”

리시안셔스의 도움을 받는 건 어떻게 해도 어려울 거 같았다. 결국 스위트피는 고민 끝에 답을 내렸다.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요!”

“이번엔 또 뭔데?”

“수레를 훔칠게요!”

“…….”

리시안셔스는 말없이 머리를 짚었다.

착한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양심과 도덕을 가르쳐 주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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