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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해 주세요-8화 (8/120)

<08화>

오랫동안 자신을 억압하던 마을을 빠져나온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와 함께 도착한 곳은 어느 해안가였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새벽, 검은 드래곤은 사람들이 없는 백사장에 착륙했다. 스위트피가 피곤함에 비틀거리며 발등에서 내려와 돌아섰을 때, 그는 다시 인간의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나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

“인간의 증오가 극에 달했을 때,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거든.”

말로는 흥미로운 일이라고 하지만 얼굴에는 성가셔 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아무쪼록 혼자서 잘 살길 바란다, 꼬마야.”

스위트피도 알고는 있었다. 저 남자가 자신을 데리고 마을을 떠나 준 것이 앞으로도 함께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아마도 약간의 동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유가 뭐든 간에 상관없었다.

스위트피는 남자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바, 반려를 두고 어디로 가려고요!”

금방이라도 떠나려는 듯하던 리시안셔스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반려?”

지금까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기에, 그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에게 감사함과 특별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시안셔스도 자신에게 특별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해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손쉽게 해칠 수 있는 드래곤이었다. 수틀리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름발이에, 아직 성년이 되지도 못한 스위트피가 혼자서 세상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껏 마고 부인의 밑에서 도망칠 생각도 못 했던 것 아닌가.

“지금 절 버려 두고 가면, 전 계속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를 거예요.”

“하-.”

“낮부터 밤까지, 쉬지 않게 계속 부를 거예요.”

리시안셔스의 얼굴에는 이제 노골적으로 짜증 어린 기색이 가득했다.

“꼬마야.”

그가 얼핏 듣기에는 다정한 목소리로 스위트피를 불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와 눈높이를 맞춰 허리를 숙인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정하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널 왜 도와줬는지 아니?”

“그, 그건 제가 반려라서…….”

“네가 불쌍해서야.”

“…….”

“너희 인간들이 작고 연약한 짐승이 다친 것을 보면 불쌍해하듯이, 나도 널 가엾이 여긴 것뿐.”

“…….”

“꽤 귀엽고 착한 인간이 안 귀여운 인간들 틈에서 고생하길래, 혼자서 선택해서 살 수 있는 삶을 준 것인데…….”

“…….”

“자꾸 버릇없게 굴면 못 쓰지.”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더 붙잡으면 정말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스위트피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저라면요…….”

허리를 편 리시안셔스의 손을 다시 붙잡은 스위트피가 애써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그 가엾은 동물을 한 번 거둔 순간부터 계속 책임질 거예요.”

“…….”

“어른이 되어서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결국 스위트피가 하고 싶었던 말은 간단했다.

내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 될 때까지 보호해 달라는 것.

당돌하지만 뻔뻔한 요구에 리시안셔스는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스위트피가 밀어볼 수 있는 건 자신이 그의 반려라는 사실 하나였다.

“반려가 혼자 굶어 죽게 놔둘 거예요?”

“……꼬마야. 네가 드래곤의 ‘반려’라는 사실은 무기가 되지 못해. 그건 너의 크나큰 약점에 속하지.”

리시안셔스는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운을 떼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갑자기 저 높은 곳에 계신 신께서 그와 똑같은 하늘의 신이 되고 싶었던 드래곤들에게 선언하셨지.”

“…….”

“때가 되면 우리들에게는 반려가 생길 것이고, 그때 신이 되기 위한 드래곤들의 게임이 시작될 것이라고.”

리시안셔스가 들려준 얘기는 그 어떤 신화에서도 나오지 않던 이야기였다.

드래곤들이 신이 되기 위한 이 게임의 룰은 간단했다.

첫째, 다른 드래곤 반려의 심장을 취하면 강해진다.

둘째, 반려를 잃은 드래곤은 서서히 죽어 간다.

셋째, 최후까지 제 반려를 지키고 살아남은 드래곤은 신이 된다.

이해하기에는 간단했지만 현실 속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곁에서 도망쳐 드래곤의 반려가 아닌 척하며 살아.”

“…….”

“그게 네가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이니까.”

리시안셔스는 어린 반려, 스위트피를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스위트피는 생각했다. 정말로 리시안셔스를 떠나서 드래곤의 반려가 아닌 척하면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리시안셔스와 떨어져 관계없는 척 산다고 해서 다른 드래곤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리시안셔스의 곁에 남으면 다른 드래곤들이 자신이 반려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것이다. 거기다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보호할 생각이 없는 듯했으니 더욱 문제였다.

이미 몇 번이나 자신을 구해 줬던 리시안셔스지만 그의 호의에만 매달리는 것은 너무나 불안정했다.

찰나의 순간 동안, 스위트피는 망설이며 생각했다.

리시안셔스를 떠나야 할까? 아니면…….

「스윗-」

그 순간, 스위트피는 오래전 자신의 언니 에리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토머스가 놀자고 쫓아다니는데 왜 매번 피하는 거야?」

「걘 덩치도 너무 크고 무서워!」

「때로는 가장 무섭고 두렵다고 생각되는 존재가 가장 든든한 내 편이 되어 줄 수도 있어.」

「그리고 토머스는 맨 처음엔 내가 작다고 놀기 싫어했어!」

「첫 만남에는 날 싫어했던 존재라도.」

에리카의 목소리가 바로 어제 들은 것처럼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런 존재라도 나의 가장 든든한 기둥이 되어 줄 수도 있어.」

‘어쩌면 언니가 말한 그 존재는…….’

그 존재를 믿었다가 죽어 버린 언니의 말을 따라도 좋은 것일까. 사실 의심이 되긴 했다. 하지만 스위트피가 아는 한, 드래곤에 관련된 일을 제외하면 에리카가 틀린 얘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을 좋게 쳐 줘 봐야 떼쟁이 어린아이, 어쩌면 벌레로 보는 듯한 리시안셔스가 아직 눈앞에 있었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손을 꼭 잡았다. 서로 반려의 문장이 새겨진 손이었다.

“내가 다른 드래곤에게 죽으면 리시안셔스도 죽어요. 리시안셔스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죽음은 저마다 시기가 다를 뿐, 언젠가는 찾아오는 건데, 뭐 하러 두려워하지.”

“드래곤도 자연적으로 죽어요?”

“언젠가는.”

“리시안셔스도 죽어요?”

“그래.”

“하지만, 그 시기가 지금은 아니잖아요.”

“귀찮은 꼬마야. 설득해 보려는 노력은 가상한다만, 난 언제 죽든 상관이 없어.”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빤히 바라봤다. 이 작은 꼬마가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해하면서도 이 상황이 심히 언짢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면…….”

하지만 리시안셔스의 표정에 변화가 찾아온 건 스위트피의 이다음 말을 듣고 나서였다.

“내가 살고 싶게 해 줄게요.”

하필 이때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유독 스위트피를 환히 비추는 듯했다. 리시안셔스는 붉게 물든 소녀에게서 다른 누군가가 겹쳐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앞의 이 땅딸막한 꼬마가 그가 알던 어떤 여자와 상당히 비슷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던 탓이었다.

“사는 게 재미있어서 죽고 싶지 않게 해 줄게요.”

“…….”

“그러니까, 날 목숨 걸고 지켜 줘요.”

살고 싶어서 온갖 달콤한 말을 늘어놓으며 한다는 소리가 고작 본인의 보잘것없는 알량한 목숨을 지켜 달라는 헛소리였다.

“뭐, 이런 뻔뻔한 꼬맹이가…….”

하도 기가 차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절뚝거리며 두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스위트피가 리시안셔스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리시안셔스의 말대로 이렇게 뻔뻔한 행동은 처음이었던지라, 스위트피의 얼굴은 창피함에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차라리 자신의 낯짝이 두꺼워지는 길을 선택했다.

“아……, 앞으로 절 스윗이라고 불러요, 리시안.”

“……리시안? 꼬마, 너 미쳤구나.”

“마음에 안 들면 리시라고 부를까요?”

“그건 더 미쳤고.”

한숨 섞인 목소리가 자신을 냉정하게 내칠 생각은 없는 듯해 조금은 안심이 된 스위트피가 작게 웃었다. 물론 리시안셔스는 끝까지 웃어 주지 않았다.

* * *

스위트피는 마고 부인의 아래에서 청소와 물을 길어 오는 등의 일을 해 왔지만 그 외의 사회적인 경험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또한, 숲과 동물들만이 대화 상대가 되어 줬을 뿐, 마을 사람 중 스위트피의 친구조차도 없었으니 타인과 어떻게 친해지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단 하나의 개념쯤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바로, 돈.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말이다.

“리시안은 돈이 없어요?”

해안가 근처에 있는 절벽 위에서 야영을 하려는 리시안셔스에게 스위트피가 맹랑한 질문을 던졌다.

드래곤이 야외에서 자는 것이야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인간인 스위트피는 예외였다. 어쩌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밖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너와 같은 인간이 아니야.”

“알아요. 근데 나는 인간이잖아요.”

“하아…. 진짜…….”

리시안셔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두 번째 듣는 한숨 소리였다.

“꼬마 반려님, 다른 인간의 집이라도 뺏어다 드릴까요?”

그가 비꼬듯이 물었으나 스위트피는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걸 알기에 어차피 오늘은 리시안셔스와 함께 야영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야죠.”

리시안셔스는 벌써 자리 잡고 몸을 굽혀 누운 어린 꼬마를 황당해하면서도 관찰했다.

“설마……, 비열하게 제가 잠든 사이에 버리고 갈 건 아니죠……?”

저 꼬마는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비열하게’라는 탁월한 어휘력까지 보이고 있었다. 영악하게 의도한 건 아닌 거 같지만 상대방을 여러모로 휘두르기에는 꽤 효과적인 방법이긴 했다.

“네가 눈을 뜨고 있을 때 버리고 갈 테니, 걱정 마.”

“제가 눈을 떴을 때도, 감았을 때도, 절 버리면 안 돼요…….”

“말이 많구나. 그만 닥치고 자렴.”

“네, 리시도 잘 자요…….”

“……리, 시…….”

마음 같아서는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징그러운 애칭으로 자신을 부른 꼬마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었으나 리시안셔스는 간신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같은 드래곤도 아니고, 작은 여자아이 아닌가. 철없는 어린아이의 말에 비이성적으로 구는 건 아주 긴 세월을 산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무료하던 긴 세월 속에서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이 성가신 일도 곧 끝날 테고 말이다.

사실, 신이 되기 위한 드래곤들의 게임에 관해 스위트피에게 말하지 않은 룰이 있었다.

첫째, 다른 드래곤 반려의 심장을 취하면 강해진다.

둘째, 다른 드래곤 반려의 심장을 취하지 못하면 자신의 반려가 죽는다.

셋째, 반려를 잃은 드래곤은 서서히 죽어 간다.

넷째, 최후까지 제 반려를 지키고 살아남은 드래곤은 신이 된다.

다섯째, 이 규칙은 현존하는 모든 드래곤에게 적용된다.

스위트피가 반려로 각성하고 14일 이내에 리시안셔스가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죽이지 않는다면, 역으로 스위트피가 죽는다.

그리고 반려를 잃은 드래곤은 1년 이내로 서서히 죽어 간다.

이 성가시고 짜증 나는 꼬마를 조금만 인내하면 이 시간도 금방 끝이 날 것이다. 그럼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스위트피의 죽음은 안타깝긴 하겠지만 그에게 크나큰 슬픔을 안겨 주진 못할 것이다. 그는 안식을 위해서는 안타까운 죽음쯤은 모른 체 할 수 있는 자였다.

시끄러운 꼬마가 잠들고 밤이 찾아오자, 그제야 그에게는 편안한 고요가 찾아왔다. 오랜만인 것 같은 이 고요함은 리시안셔스에게 익숙한 그곳을 떠올리게 했다.

이 망할 꼬마가 찾아올 때를 빼면 언제나 고요하던 숲속의 무덤……. 리시안셔스는 그곳의 숨결 같던 공기와 비슷하던 향내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나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

그것이 시체가 묻힌 무덤이든, 죽은 후의 영혼이 가는 세계이든.

그 어느 곳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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