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7화 (7/120)

<07화>

스위트피는 크리스가 정말로 싫었다.

애초에 크리스만 아니었으면…….

자신이 숲속으로 도망칠 일도, 그곳에서 붉은 드래곤에게 위협당할 일도, 자신이 정을 준 리시안셔스가 사실 드래곤이란 사실도 알 필요도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왜 마고 부인에게 맞았는데.’

사냥당한 짐승처럼 질질 끌려서 창고에 갇힌 것도, 모두 다 크리스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도 미안해하기는커녕, 자신에게 문을 열어 줬다는 이유 하나로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마고 부인의 허락이 떨어진 게 아니라면 자신이 이 문밖으로 나가도 더 크게 체벌을 받을 텐데 말이다.

크리스는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은커녕, 죄책감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을 거둬 준 사람들이라서 미웠지만 때로는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더 안 좋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스위트피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최악인 삶이 있을까.’

스위트피가 크리스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의 허락 없이 리시안셔스와 가까이 지냈다는 점 하나였다. 크리스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다니. 마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마당 개보다도 못한 처지였다.

문득 스위트피는 이런 사람들을 구하려고 마을까지 뛰어온 자신이 한심해졌다.

리시안셔스가 드래곤이란 이유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려 했지만, 정작 리시안셔스는 지금까지도 마을 사람들과 자신에게 어떤 해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자신에게 해를 가하고 있는 건 자신이 구해 주려 했던 사람들이었다.

마음속에 원망이 가득 차올랐다. 아무리 막아 보려 해도, 원망은 기름 위에 번진 불길처럼 막을 새도 없이 스위트피의 마음속에 퍼져 나갔다.

“나, 날 왜 그렇게 빤히 보냐?”

“…….”

“고마운 줄 알면 다음부터는…….”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마음속을 꽉 채운 원망은 끝내 입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뭐?”

크리스는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본인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헷갈려 하는 표정이었다.

지금이라도 아무 말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머리로는 자신이 지금 실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한 번 터진 원망을 억눌러 담을 수 없었다. 증오가 두려움보다 배로 불어나 있었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제야 스위트피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완전히 이해한 크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허세에 가득 차 있던 표정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짧은 침묵 뒤, 크리스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이게 미쳤나.”

크리스가 스위트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크리스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니, 또 자신을 때리려 들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스위트피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너도 싫고, 네 엄마도 싫어.”

“야!”

“방관하고 동조하는 마을 사람들도 끔찍해!”

“이 거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크리스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스위트피가 이를 악물자마자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또래라고는 하지만 남자아이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은 스위트피가 바닥에 엎어지자, 크리스는 곧장 발길질을 했다.

스위트피는 몸을 반달로 굽히고 머리를 감싸며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짓밟는 크리스를 응시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자신의 감정이 내키는 대로 약자를 밟는 모습이, 마고 부인과 쏙 빼닮아 소름이 끼쳤다.

“야, 너 다시 말해 봐.”

“흐으…….”

“아까 말했던 대로 그대로 읊어 보라고.”

폭력에 지친 스위트피가 기운 없이 숨을 몰아쉬자, 크리스가 멱살을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어디 또 맞고 싶으면 다시 한번 지껄여 보라는 투였다.

‘하라면 못 할 줄 알고.’

악에 받친 스위트피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죽어 버려, 크리스!”

“이게, 끝까지!”

“드래곤이 나타나서 이 마을을 전부 불태웠으면 좋겠어!”

인내심이 다다른 크리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릴 때였다. 열려 있던 문으로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그럴 날씨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스위트피를 때리려던 크리스가 주춤했다.

‘이 바람은…….’

마치 드래곤을 처음 만났던 때와 같았다. 그들의 커다란 날갯짓에 불어오던 바람과 비슷했다.

‘설마…….’

스위트피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문가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커다란 검은 인영이 달을 가린 채 서 있었다.

“너, 너, 누, 누구야?!”

스위트피를 따라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크리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크리스는 어두워서 그가 누구인지 못 알아보는 듯했으나, 스위트피는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리시안셔스.”

스위트피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리시안셔스가 창고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좁고 낮은 창고의 천장이 그의 머리에 금방이라도 닿을 듯했으나 당사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두 아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 물러서……, 으악!”

리시안셔스에게 경고를 하던 크리스는 외려 그에게 목이 들려 번쩍 들어 올려졌다. 스위트피는 고작 며칠 보지 못한 것뿐인데도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리시안셔스는 드래곤인데…….’

분명 경계해야 할 존재인데도, 스위트피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 주는 이는 언제나 리시안셔스였다. 그를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닌데도, 이런 일은 벌써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크리스에게 맞을까 봐 도망치던 때, 두 번째는 붉은 여자 드래곤에게 위협당했을 때,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지금이었다.

리시안셔스가 원해서 한 행동이든, 마지못해서 한 행동이든, 스위트피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존재는 그가 유일했다.

스위트피는 가벼운 물건을 들 듯이 크리스의 목을 들어 올린 채 가만히 서 있는 리시안셔스를 긴장 어린 모습으로 가만히 지켜봤다.

“너는 그때 그 꼬마 수컷이구나.”

꽤 길게 말이 없던 리시안셔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이거, 놓, 으, 큭!”

크리스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버둥거리기만 할 뿐, 숨이 막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스위트피는 크리스의 모습이 자신이 여자 드래곤에게 붙잡혔을 때와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때의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가 도와줬으나, 지금 크리스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마고 부인이 달려온다고 해도 드래곤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때 말했을 텐데. 신사는 숙녀를 때리지 않는다고.”

리시안셔스의 손은 드래곤화가 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의 손이었다. 그의 손등에는 핏줄도 불거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위트피는 알고 있다. 그가 그저 작은 물건을 톡, 터트리듯이 크리스를 부수고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을.

스위트피는 크리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경멸스러워.’

도망칠 수도 없는 상대적 약자를 대상으로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는 크리스가 싫었다.

그래도 자신을 거둬 준 사람들이라 여기며 애써 부정해 왔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안에서 자신은 그저 꽤 쓸 만한 노예였다는 것을 말이다.

크리스도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었으면 좋겠다. 이겨 낼 수 없는 폭력에 고통받았으면 좋겠고, 고아가 되어 설움을 당했으면 좋겠다.

“팔을 부러뜨려 주세요.”

그 말은 지극히 충동적으로 나온 것이었다. 크리스의 목을 조르고 있던 리시안셔스가 조금 커진 눈으로 스위트피를 내려다봤다.

“…….”

막상 말을 하고 나자 스위트피는 조금 긴장되었다. 과연 저 남자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까? 건방지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지만 스위트피는 그 긴장과 걱정으로 외려 더 당돌하게 나갔다.

“그 자식의 팔을 부러뜨려 주세요.”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하자 리시안셔스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이 부정적인 의미일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였다.

“으아아악!”

크리스가 바닥을 굴렀다. 리시안셔스의 행동은 너무 빠르고 정확해서, 스위트피가 상황을 판단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리시안셔스는 정말로 스위트피의 부탁을 들어줬다. 크리스의 팔을 뚝, 소리가 나도록 부러뜨리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크리스가 시끄럽게 비명을 내질렀지만 스위트피는 조금도 그에게 동정심이 일지 않았다.

“이제 만족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고개를 숙여 물었다. 리시안셔스의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고개를 들어 올린 스위트피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조금은요.”

“그럼 이제 날 애타게 부를 일은 없겠지?”

얼핏 보면 다정한 목소리처럼 들렸으나 그 안에는 기실 성가심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저렇게나 귀찮은데 왜 온 것일까.

드래곤이라서 멀리서 일어나는 일도 들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외면하면 될 텐데…….

“왜 온 거예요?”

스위트피는 돌아서서 미련 없이 가려던 리시안셔스를 붙잡았다. 대답을 안 해 주고 무시하고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향해 돌아섰다.

검지로 톡톡, 제 귀를 가리킨 그가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줬다.

“시끄러워서.”

“…….”

“원치는 않았지만, 너와 난 연결되어 있거든. 덕분에 네가 날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가 손등을 내보이자 푸른 나비 모양의 문양이 보였다. 스위트피도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나비 문양이 의식하고 찾자 다시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속마음으로 불러도 리시안셔스가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왜요?”

사실, 이유는 알 거 같았다.

붉은 여자 드래곤, 아케르트에게 목숨을 위협받았을 때 얼핏 들었던 그들의 대화 내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리시안셔스의 반려라서요?”

스위트피가 질문하자 안 그래도 성가심이 가득하던 리시안셔스의 표정이 일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차가운 표정을 보자, 그가 이대로 정말로 가 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 마세요!”

스위트피는 이대로 리시안셔스를 보낼 수 없었다.

“지금 가면 계속해서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부를 거예요. 그쪽이 시끄러워서 죽고 싶을 만큼, 계속, 계속해서 부를 거라고요!”

부모에게나 부릴 법한 생떼에 리시안셔스가 다시 스위트피에게 다가왔다.

지나치게 자극한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마른침이 삼켜졌으나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어린 스위트피와 눈높이를 맞춘 리시안셔스가 표정 없는 얼굴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정도면 착한 아이에게 베풀 만한 호의는 다 베푼 거 같은데.”

“…….”

“너,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그때였다.

“거기 문이 왜 열려 있는 거야?!”

열린 창고의 문을 본 마고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안에 누구……?”

가까이 다가오며 처음 보는 외부인을 살피려 미간을 찌푸리던 마고 부인이 구석에 기절해 있는 크리스를 발견했다.

“크리스……? 크리스!”

마고 부인이 창고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리시안셔스를 놓치면, 정말로 마고 부인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크리스에 의해 자신도 팔이 부러질지 모른다.

리시안셔스는 또 다른 인물의 등장에도 오직 스위트피만 응시했다. 한쪽밖에 안 보이는 남자의 금안을 마주 보던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 마을을 불태우고, 절 데리고 떠나 줘요.”

리시안셔스는 조금 멍한 것도 같고 황당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스위트피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봤다.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마고 부인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리시안셔스, 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대답이 없던 리시안셔스가 이내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스위트피가 더욱 긴장할 때, 그가 붙잡힌 손을 장난스럽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자 서로의 손등에 있는 푸른 문양이 더욱 선명하게 빛을 냈다.

“그러지.”

마고 부인이 창고 안으로 막 뛰어 들어올 때였다. 리시안셔스의 눈이 양쪽으로 찢어진다 싶더니, 그는 순식간에 본체인 드래곤의 모습이 되었다.

그가 거대해지며 창고는 무너져 내렸지만 드래곤의 바로 밑에 있던 스위트피는 판자에 깔리지 않을 수 있었다. 마고 부인과 크리스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누군가가 지른 비명이 마을에 울려 퍼지는 것은 똑똑히 들었다.

몇 년 만에 제대로 본 거대한 드래곤의 본체는 숨이 막힐 만큼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드래곤은 자신을 해칠 존재가 아니라 유일하게 구원해 줄 존재였다.

스위트피는 겁도 없이 드래곤의 발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 드래곤이 마을을 향해 불을 뿜었다.

누군가는 도망쳤고, 누군가는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는 드래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된 마을을 두고 드래곤은 거센 바람을 만들어 내며 하늘 높이 날았다.

드래곤의 발등에 앉아 단단한 비늘로 감싸인 발목에 매달린 스위트피는 불길에 휩싸인 마을을 내려다봤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몰라 두렵긴 했으나, 적어도 저곳에서처럼 노예처럼 살 일은 없을 것이다.

이후부터의 삶은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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