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5화 (5/120)

<05화>

스위트피는 뛰고, 또 뛰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 때문에 불편한 다리로 바닥을 뒹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어나서 되돌아가지도 못한 채, 길도 잘 모르는 더 깊은 숲속으로 끊임없이 도망치며 스위트피는 생각했다.

‘저 드래곤은 왜 날 죽이려 하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나?!’

하지만 과거를 떠올려 보면 그랬다.

자신의 언니, 에리카가 뭘 잘못할 사람이던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타인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옛날엔 자신의 언니와 가족들이 그러했었고, 이번엔 자신의 차례였다. 저 괴물이 사람을 죽이는 것에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불편한 왼쪽 무릎이 오랫동안 무리해서 움직이자 서서히 고통이 퍼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마구간 판자에 깔리고, 말에게 다리가 밟혔던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던 스위트피는 최선을 다해 보이지도 않는 드래곤을 피해 도망쳤다.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고, 몇 번이나 넘어지고 비틀거리면서도. 하지만, 나약한 몸으로 같은 인간들에게조차 배척당하는 스위트피가 포식자에게서 완전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그늘진 이 숲에는, 갈라진 나뭇가지 틈 사이로 부서진 달빛이 들어왔다. 그러나 잠시 불어온 바람과 함께 가루처럼 숲에 스며들던 달빛이 사라졌다. 아니, 가려졌다.

‘설마…….’

본능적인 섬뜩함을 느낀 스위트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까꿍.』

큰 소의 두 배나 되는 거대한 드래곤의 얼굴이 빼곡한 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사람이 아닌 괴물인데도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 아……. 으아아악!”

정신을 차렸을 때, 스위트피는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 재미없어.』

드래곤은 어느새 다시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저앉은 스위트피의 앞에 섰다.

“사냥 놀이하기엔 넌 너무 쉽게 잡히는 데다 재미가 없구나.”

“흐으, 흐……. 살려, 살려 주세요…….”

“리시안셔스도 별 관심 없어 보이니 빨리 죽이고 가야겠어.”

목숨을 구걸하는 애원에도, 아케르트는 따분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스위트피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저 드래곤의 표정에는 아무런 악의도 담기지 않았으나 자신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일 것이 분명했다.

‘살고 싶어.’

스위트피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드래곤에게는 사냥감일 뿐인 인간, 그중에서도 다리를 절어 배척받는 어린 소녀.

도망가는 것조차 어려운 자신이 어떻게 이 순간을 모면할 수 있을까.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대체 누가……?

그 누가 자신을 목숨 걸고 구하러 와 줄까. 설령 누군가가 구하러 와 준다고 해도 같이 드래곤에게 목숨을 빼앗길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그 누가 자신을 구해 줄 수 있을까.

이 드래곤을 막아 줄 힘을 가진 누군가가…….

「네 마음대로 해.」

하필 이때 떠오른 자는 단 한 명이었다.

「이 아이가 죽어 주면 나는 자유로워질 테니.」

그는 자신의 생사에 조금도 관심이 없을 거 같지만…….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리, 리시안셔스!”

그럼에도 스위트피가 유일하게 매달려 볼 수 있는 존재였다.

* * *

인간은 볼품없으며 한없이 작고 어리석다. 자신을 계속 찾아와 귀찮게 굴던 어린 소녀는 제 나름대로 자신에게 정을 준 듯했지만, 그건 본인의 사정이었다.

어차피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먼지처럼 사라질 짧은 생이었다. 미리 죽는다고 달라질 건…….

- 리시안셔스!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도 않고, 아케르트에게 붙잡힌 것인가. 저 멀리서, 간절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인간들 중에서도 유독 더 어리석은 편인가.’

눈앞에서 본인을 지켜 주지 않고 내치는 걸 겪었으면서, 그런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찾는 꼴이라니.

리시안셔스는 눈을 감았다. 굳이 저 부름에 응답해 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아케르트가 심장을 빼 가면 거슬리는 저 목소리도 끝일 거라 생각했다.

- 리시안셔스! 도와줘요! 살려 주세요! 리시……, 리시안셔스.

저 귀찮은 목소리가 멈추질 않는 걸 보니, 아케르트는 인간이 목숨을 구걸하는 걸 즐기며 구경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리시안셔스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숲속의 짐승들이 나무 뒤에 숨어 리시안셔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저 소녀를 구해 줬으면 하는 간절함, 그리고 소녀를 외면하는 드래곤을 향한 미움, 등등…….

그동안 스위트피가 가져다준 음식을 먹은 건 리시안셔스가 아닌 저 동물들이었다. 제대로 말을 섞은 적은 없어도 소녀와 정이 들 만도 했다.

- 리시안셔스……!

리시안셔스의 반듯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귀찮게 하는군.”

그간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얘기를 조잘조잘 떠들어 대던 스위트피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눈은 괜찮아요? 많이 아프죠?」

처음엔 한 귀로 듣고 흘렸는데,

「그래서 크리스의 음료수에 몰래 침을 뱉어서 복수했어요! 크리스는 앞으로도 영영 모를걸요?」

억지로 동면에서 깨어나 모든 것이 무료하고 따분하던 일상에서, 스위트피가 찾아와 귀찮게 굴던 시간들이 나름 재미있기도 했던 것 같다. 거기다 낯설고 수상한 자가 배를 곯을까 봐, 본인이 먹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음식들을 나눠 주러 오는 것도 제법 기특하지 않은가.

그런 기특한 아이가 죽는 것은 꽤 안타까운 일이긴 했다.

“……그래, 기특한 꼬마에게는 그만한 상을 내려 줘야지.”

결단코, 자신을 부르는 저 목소리에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 아니다. 그저 착한 일을 한 어린아이에게 주는 단 한 번의 보상일 뿐.

* * *

“리……, 리시안……!”

“적당히 좀 해.”

목이 쉬도록 리시안셔스를 애타게 부르던 스위트피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흘러나왔다.

“살려고 버둥거리는 꼴이 우스워서 놔뒀는데, 불쌍해서 안 되겠다.”

“흐윽…….”

“리시안셔스는 널 구하러 안 와.”

“…….”

“걘 신이 주최한 드래곤들의 전쟁에 낄 생각이 추호도 없을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야 현실이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리시안셔스는…….

자신을 조금은 사람 취급해 준다고 믿었던 그 남자는,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

무너진 희망이 두려움과 비참함을 배로 만들었다.

“흐… 흑……, 살려, 살려 주세요…….”

이제 스위트피가 목숨을 애원하는 대상은 리시안셔스가 아닌, 눈앞에 있는 아케르트가 되었다.

“어떡하냐? 네가 살려 달라고 빌어도 난 널 살려 줄 수가 없어.”

“제, 제발…….”

“원망할 거면 내가 아니라 신을 원망해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죽을 시간을 늦췄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 난 듯싶었다.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가까이 다가온 아케르트의 손에 다시 커다란 발톱과 함께 비늘이 돋았다. 드래곤의 발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것이다.

스위트피는 다가올 죽음에 순응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빠르게 다가오던 아케르트의 발톱이 스위트피의 가슴을 파고들기 전에 멈췄다.

“뭐야, 관심 없는 척하더니?”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고통은커녕, 아케르트가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리자 스위트피는 조심스럽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흐릿해진 시야로 아케르트의 어깨 너머에 있는 인영이 보였다.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이 흘러내리며, 스위트피는 서서히 맑아진 시야로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인물이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다.

“리시안…셔스…….”

리시안셔스는 방관자의 자세로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늘 무덤을 지키고 있던 그가 괜한 걸음을 하지 않았을 거란 건, 스위트피도 예상할 수 있었다. 죽어 있던 희망이 그의 등장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를 놔줘, 아케르트.”

“싫다면? 내가 다 잡은 사냥감을 놓칠 거 같아?”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괜찮겠어?”

“무슨 뜻이야?”

“내가 보복할 수도 있는데.”

“…….”

리시안셔스의 경고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고요함 속에서 뿌득, 이를 간 아케르트가 보란 듯이 스위트피의 목을 세게 짓눌렀다.

“커흑……!”

하지만 리시안셔스의 경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아이의 심장을 빼앗아도, 내가 네 몸통에서 머리를 뽑아 버린다면.”

“…….”

“어차피 넌 신이 되지 못해.”

목을 조르던 아케르트의 손이 움찔, 떨다가 이내 조금씩 힘이 풀렸다.

‘신이 되지 못한다고……?’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스위트피는 저 둘의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얘기뿐이었지만.

“그 나약해진 몸으로 뭘 어쩔 수 있다는 거야? 날 너무 얕보는 거 아니야?”

“내가 나약해졌다 해도, 네게 죽을 정도는 아니야.”

“강한 척하기는!”

“내 힘이 궁금하면 그 애를 죽여 시험해 보든가.”

리시안셔스의 경고에도 아케르트는 스위트피의 목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세게 움켜잡을 듯 떨리는 손에는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 경고야.”

“…….”

“다른 드래곤의 반려를 찾아.”

“…….”

“내 반려를 건드려서 네게 좋을 건 없으니.”

그러나 결국, 아케르트의 손에 힘이 완전히 풀리고 스위트피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정파인 척하더니.”

“…….”

“이 귀여운 꼬마는 운도 좋네.”

아케르트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는 스위트피를 얄밉다는 듯 흘겨보긴 했으나 이 이상 해칠 생각은 없었는지, 곧 본모습인 드래곤으로 변해 날아갔다.

날갯짓이 만들어 낸 돌풍 때문에 잔디나 나뭇가지가 스위트피의 몸에 사정없이 부딪혔다. 붉은색 드래곤이 어두운 초록 잎사귀를 헤치고 하늘로 날아가자, 뚫린 나무들 사이로 눈 부신 달빛이 들어왔다.

생명의 위협이 사라지자, 두려움이 차츰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스위트피에게는 곧 의문이 찾아왔다.

“날…… 왜 구해 준 거예요?”

리시안셔스에게 고마웠으나,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진 않았다.

“내가 죽어도 상관없어했잖아요.”

“그랬었지.”

“그런데 왜…….”

“음식을 나눠 준 대가라고 생각해.”

그 음식조차도 먹지 않은 걸 뻔히 아는데…….

“두 번은 없어. 그러니, 살고 싶으면 다신 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를 두고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스위트피에겐 아직 묻지 못한 말이 있었다.

“정체가 뭐예요?”

리시안셔스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꽃이었다가 변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거기다가 드래곤이 그의 경고에 쉽게 물러서다니. 그건 아까 그 드래곤보다 남자가 더 강한 존재여야만 가능했다.

지상에 드래곤보다 더 강한 존재는 없으니, 아마 리시안셔스도…….

“드래곤이에요?”

“…….”

“아까 그 여자처럼, 당신도 드래곤인 거예요?”

날 죽이려 한 그 여자와 우리 마을을 파괴하고 언니를 죽인 그 드래곤처럼, 당신도?

스위트피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리시안셔스의 입술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부디 아니라는 답이 돌아오길 바라며.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스위트피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단다, 꼬마야.”

리시안셔스는 선선히 수긍했다. 스위트피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어 보였다. 그리고 스위트피는 스스로 우습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시안셔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드래곤이라니…….’

처음부터 그의 정체를 알았으면 매일 그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비록 그는 늘 귀찮아하며 꺼지라 했지만.

또한, 그에게 제 음식을 나눠 주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먹은 적 없는 듯했지만.

스위트피는 한쪽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리시안셔스가 두렵게 느껴졌다. 자신의 마을을 파괴했던 회색 드래곤과도 겹쳐 보였다.

아니, 어쩌면 리시안셔스가 그 드래곤일지도 모른다.

끔찍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지자, 리시안셔스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떨렸다.

“무섭니?”

정곡을 꿰뚫는 그의 질문에도 스위트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아, 아…….”

천천히 뒷걸음치던 스위트피는 이내 뒤돌아서서 달렸다. 리시안셔스는 분명 자신을 구해 줬다. 하지만 가족들을 죽이고 자신을 해치려고 한 드래곤과 동족이었다.

그러니까, 그도 괴물이었다.

괴물은 언제 돌아서서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도망쳐야 한다. 마고 부인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서 마을 사람들도 모두 도망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때처럼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건 원치 않았다.

숲을 빠져나와 홀로 멀리 도망치려던 스위트피는 다른 사람들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자신을 방관했던 사람들과 마고 부인, 크리스 전부 다 싫지만 그래도 그들이 죽는 건 더 싫었다. 그러나 다리를 절며 힘겹게 달려간 스위트피는 주점에 들어서자,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위트피 로렌!”

이 밤중에, 침실이 아닌 영업장인 1층에 있는 마고 부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거기다가 이 밤중에 이렇게나 화가 난 듯한 모습으로…….

“엄마! 저 계집애가 날 때리고 긁고, 쥐를 풀어서 괴롭혔다니까요?!”

스위트피는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마고 부인의 뒤에 숨어 있던 크리스가 스위트피를 보며 히죽, 웃었다.

본인이 유리한 대로, 한껏 과장해서 고자질을 했을 게 분명했다. 항상 얻어맞던 건 자신인데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마고 부인은 하나뿐인 아들을 끔찍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엔 정말 큰 일이었다. 우습게도, 붉은 드래곤에게 위협받던 순간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스위트피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아니라, 전…….”

“시끄러워! 갈 곳 없는 고아를 거둬 줬더니,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

그러나 변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쫘악-!

스위트피의 고개는 억센 손아귀에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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