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기억해 주세요-4화 (4/120)

<04화>

리시안셔스의 이름을 알고 나서 주점으로 돌아온 스위트피의 우려와는 달리, 크리스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고 부인 또한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서 크리스가 제 엄마에게 치사하게 고자질을 하진 않은 듯했다.

‘이대로 넘어가려나……?’

크리스가 이대로 넘어가 줄 거 같다는 희망에 불안감은 서서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위트피만의 속 편한 착각일 뿐이었다.

다락방 침대에 누워 서서히 수마에 잠기려던 스위트피는 아주 섬뜩하고도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쩐지 팔뚝에 소름이 돋아,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스위트피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크, 크리, 읍……!”

어둠에 익숙해진 스위트피는 단번에 크리스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러나 크리스의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입이 막혔다. 크리스가 손으로 스위트피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야.”

고요한 적막 속에서 스위트피는 발끝을 타고 공포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를 갈고 있는 크리스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스위트피가 보아 왔던 크리스의 모습 중 가장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그 희멀건 남자는 뭐냐.”

스위트피의 얼굴을 꽉 누르고 있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동안 그 새끼랑 논다고 틈만 나면 숲으로 달려간 거냐?”

“…….”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동안 나한테 건방졌던 거구나?”

입이 막혀 있어 해명조차 할 수 없었다.

“넌 내 거야! 우리 엄마가 사다 준 내 장난감 같은 거라구!”

지금까지 겪어 왔던 모든 위기 중에,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드래곤을 봤던 순간만큼이나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트피의 몸이 추위에 떠는 것처럼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누가 좀 도와줘……!’

스위트피가 간절하게 누군가를 찾을 때였다. 살짝 열어 둔 창문 틈으로 작은 침입자들이 등장했다.

찍, 찍찍-

그 작은 침입자들은 눈앞의 덩치 큰 폭군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생명체였다.

“응? 뭐야? 으악! 쥐! 쥐다!”

쥐들이 제 옷 속에 기어 들어가자 크리스는 펄쩍펄쩍 뛰며 쥐들을 떼어 내기 위해 난리를 쳤다. 스위트피는 그 틈에 불편한 다리로 힘들게 방을 빠져나가 빗자루를 문고리 사이에 걸어 버렸다. 크리스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마고 부인을 깨운다면 오히려 자신을 야단칠 확률이 높았다. 아들 사랑이 넘치는 마고 부인이라면 크리스가 자신을 때리게 허락할 수도 있다.

‘날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하지만 누가 날 도와주지? 내 편은 아무도 없는데…….

마고 부인의 주점이자 집을 빠져나왔지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어 길을 잃은 것처럼 막막했다.

「이름이 뭐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누군가가 스치듯이 떠올랐다.

「넌 이미 내 이름을 부른 적 있어.」

늘 꺼지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을 크리스에게서 도와주기까지 한 사람…….

리시안셔스, 그라면 자신을 도와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스위트피는 이미 익숙해진 길을 따라 뛰었다. 자신의 유일한 희망인 리시안셔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 * *

모두가 잠든 새벽, 거대한 드래곤이 달을 가리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언제나처럼 묘비에 기대어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리시안셔스는 허락지 않은 침입자의 등장에 눈을 떴다.

“세상에, 이게 무슨 몰골이람.”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변한 붉은 드래곤이 리시안셔스의 몰골을 보며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상의 첫 번째 피조물, 최초의 드래곤, 드래곤들의 아버지-.”

여자는 예의를 갖춰 허리를 숙였으나, 오히려 그것은 리시안셔스를 향한 모욕이었다.

지상의 첫 번째 피조물.

최초의 드래곤.

드래곤들의 아버지.

분명, 그렇게 불렸던 적도 있었다.

지상에 그를 위한 신전이 세워지며 세상을 만든 하늘의 어머니 다음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그를 경배하고 떠받들며 신성시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드래곤들은 힘이 쇠퇴하여 숨어 살거나 스스로 동면에 들어갔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옛날처럼 절이라도 올릴까?”

“마음에 없는 말은 되었어, 아케르트.”

“다행이네. 진짜로 절이라도 하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거든?”

가리고 있는 한쪽 눈의 미약한 통증을 느끼며, 리시안셔스는 아케르트를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와 호전적으로 싸우기에는, 그는 이미 심적으로 지친 지 오래된 상태였다.

동면에서 깨어난 것조차 그의 뜻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늘 자신을 귀찮게 굴던 그 꼬마가 자신을 깨운 것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답을 내렸다. 그것은 절대 아닐 거라고. 깨어날 의지가 없었던 자신을 한낱 인간이 깨울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그저 시간이 오래 지나서 깨진 결계 틈으로 들어온 소녀가 우연히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던 그와 마주친 거뿐이었다.

신이 자신을 깨웠다는 것은 드디어 약속한 전쟁의 시간이 왔다는 것일 테다.

“천하의 리시안셔스가 아직도 한낱 인간의 무덤이나 지키고 있다니. 모든 드래곤들이 안타까워할…….”

“아케르트.”

그저, 리시안셔스가 그녀의 이름을 읊조린 것뿐이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잔잔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멈췄다.

“너와 수준을 맞춰 놀아 줄 생각은 없으니, 네 용건을 말해.”

쳇, 한물갔어도 아직 얕볼 상대는 아닌가.

아케르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지나가다가 같은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져서 들른 것뿐이야. 하지만 당신, 하는 꼴 보니 아직 신이 정해 준 반려는 따로 없는 거 같네.”

“신이 정한 내 반려 따위는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거야.”

리시안셔스의 단호한 발언에 아케르트의 시선이 무덤을 스치듯 훑었다.

흥, 어련하시겠어.

“반려가 없는 당신에게 볼일은 없으니 이만 가 보겠어.”

리시안셔스에게 반려가 없는 것을 확인한 아케르트가 다시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하필 그때,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인간의 기척이 느껴졌다. 본체로 돌아가려던 아케르트의 피부에 솟은 비늘이 다시 인간의 부드러운 피부로 돌아왔다. 대신, 그녀는 뱀처럼 동공이 찢어진 눈으로 기척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시안셔스!”

최고의 포식자가 사냥을 준비하는 줄도 모르고, 스위트피는 마침내 이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스위트피가 낯선 여자를 인식하기도 전에, 아케르트는 빠르게 다가가 스위트피의 목을 졸랐다.

“어, 헉!”

그녀의 손톱이 독수리의 발톱처럼 길쭉해졌다. 목이 졸리면서도 그녀의 손이 짐승처럼 변하는 것을 본 스위트피가 더욱 버둥거렸다. 그러나 아케르트는 무자비한 힘으로 스위트피를 찍어 누르며 망설임 없이 왼쪽 가슴께에 발톱을 꽂으려 했다.

“그만.”

그런 아케르트를 말린 것은 리시안셔스였다.

“그 애는 내 반려가 아니야.”

“그럼 얘가 죽어도 상관없잖아.”

“무고한 생명이 죽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반신반의하던 아케르트는 스위트피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기도 하고 빤히 바라보며, 만져 보다가 이내 결론을 내린 듯 스위트피를 내려놓았다.

“허으, 허어…….”

바닥에 떨어진 스위트피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바닥을 기어 리시안셔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만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았다. 거기다가 저 여자,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손이 기이하게 변하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으니 말이다!

“하긴. 옛 여자도 못 잊는 남자에게 신이 또 다른 반려를 내릴 리가 없지. 안 그래?”

스위트피는 리시안셔스의 팔을 꼭 붙잡았다.

당연하게 도움을 요청할 만큼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스위트피에게는 그가 아니면 도움을 바랄 곳도 없었다.

리시안셔스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스위트피를 조금은 귀찮은 기색으로 내려다봤다.

신이 미치지 않는 한 자신에게 새로운 반려를 내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누가 되었든, 자신이 타인을 사랑하게 될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금발에 구불거리는 단발, 여름날의 숲처럼 말간 녹안, 뺨에 젖살이 채 빠지지도 않은 어린아이.

특히나 이런 반려라면 더욱 사양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리시안셔스가 꽤 기꺼운 듯 답했다.

“내게 반려가 생길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야.”

영문을 몰라 하는 소녀를 향해 생긋, 웃어 준 리시안셔스가 거추장스럽게 붙어 있는 스위트피를 떼어 내기 위해 제 팔을 잡은 작은 손을 붙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리시안셔스가 스위트피의 손을 잡은 순간, 서로 맞닿은 손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신성한 푸른빛이 순식간에 숲을 삼켜 버렸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은 스위트피가 다시 눈을 뜨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나치게 눈부신 푸른빛의 여파로 스위트피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떠서 스위트피가 가장 첫 번째로 본 것은, 그들의 손등에 새겨진 푸른빛의 문양이었다.

나비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갑자기 손등에 새겨져 있자, 당황한 스위트피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 하하하!”

스위트피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아케르트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웃어 젖혔다. 두려워진 스위트피가 다시 리시안셔스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손은 매정하게 내쳐졌다.

“리시안셔스……?”

스위트피가 다시 그를 올려다봤을 때 마주한 건, 차갑게 식은 리시안셔스의 한쪽 금안이었다.

“리시안셔스, 아무래도 신은 네가 이 싸움에서 빠지는 걸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는 거 같은데? 어떡할 거야?”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 스위트피는 다시 한번 리시안셔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리시안셔스는 스위트피가 힘겹게 뻗은 손을 너무나도 매정하게 내쳤다.

“네 마음대로 해.”

마지막 희망이 자신을 버렸다. 리시안셔스에게 허공에서 내쳐진 스위트피의 손은 완전히 갈 곳을 잃었다.

“이 아이가 죽어 주면 나는 자유로워질 테니.”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스위트피와는 다르게, 아케르트는 호탕하게 웃었다.

“아, 다행이다. 실은 너랑 싸우긴 싫었거든.”

“…….”

“좋았어. 편하게 심장을 빼앗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사냥을 즐겨 볼까?”

‘심장을 빼앗는다고……?’

스위트피는 아케르트의 말에서 한 가지 의문을 발견했다.

“꼬마야. 딱 100초까지 셀 테니, 잘 숨어야 한다?”

아케르트의 피부에 점점 비늘이 돋아났다. 그러더니, 그녀는 서서히 커져서 주변의 나무들을 넘어뜨렸다.

“아, 아…….”

겁에 질린 스위트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드래곤이었다. 자신의 마을을 불태우고, 눈앞에서 언니의 심장을 뺏어 갔던 드래곤…….

서로 다른 드래곤이겠지만 스위트피의 눈에는 언니를 죽인 드래곤과 자신을 죽이려 하는 드래곤, 둘 다 똑같았다.

『일, 이, 삼…….』

드래곤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제야 스위트피는 아까 저 드래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100초. 그 안에 숨어야만 한다.

스위트피는 다시 한번 리시안셔스를 바라봤으나, 그의 눈이 말해 주고 있었다.

나 또한 네가 죽길 바란다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사라진 스위트피는 아픈 다리로 힘겹게 일어났다. 리시안셔스가 원망스럽진 않았다. 그를 믿은 자신이 바보 같았을 뿐이다.

‘살아야 해, 살고 싶어……!’

스위트피는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이 어두운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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