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
마을에 작은 축제가 있던 날이었다. 사람들은 불을 피워 놓고 서로 즐겁게 춤을 추며 한 해를 즐겁게 마무리했지만, 스위트피의 집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사소한 말싸움이 번져 남편과 크게 다툰 로렌 부인은 평소처럼 집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어린 자매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축제에서 어머니의 화를 풀 선물을 사 오겠다며 나갔고, 시끌벅적한 마을과는 다르게 로렌가는 조용했다.
그날, 스위트피는 보았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드래곤을.
「에리카, 스위트피! 도망쳐!」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로렌 부인이 드래곤의 불길에 갇히고 난 뒤였다.
「엄마!」
스위트피가 막 엄마의 이름을 외치던 순간, 에리카는 동생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언니! 엄마가, 엄마가……!」
어깨를 때리며 어미를 찾는 스위트피의 행동에도 에리카는 달리는 두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평온하던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고,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저 사이에 두 자매의 아버지도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버지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찾았다.』
그때, 두 자매의 위로 거대한 어둠이 덮치며 기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집채만 한 드래곤의 발이 에리카의 머리를 쥐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구세주가 등장했다.
비늘이 돋아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발톱이 에리카를 낚아채기 직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온 또 다른 드래곤이 회색 드래곤의 목을 물고 바닥을 뒹군 것이다.
「아리움!」
에리카는 서로 엉겨 붙어 뒹구는 두 드래곤을 향해 외쳤다. 어쩌면 둘 중 단 한 명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도망가, 에리카!」
이때, 스위트피의 머릿속에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그것도 친근하게 언니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다. 에리카는 스위트피를 감싸 안고 불길이 덜한 다른 사람의 집 마구간 뒤로 숨었다.
「언니, 엄마는? 엄마 구하러 가면 안 돼?」
「스윗, 엄마는 이미 늦었어…….」
「아, 아빠한테 엄마를 구해 달라고 하자! 아빠부터 찾으러 가면 되잖아……!」
눈앞에서 화마에 감싸인 엄마가 아직도 살아 있을 거라 믿는 어린 동생을 끌어안으며 에리카는 몸을 잘게 떨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스위트피는 자신의 언니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해, 스윗. 내가 미안해…….」
「…….」
「그의 말대로 진작에 떠났어야 했는데…….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미루다가…….」
「…….」
「다 내 잘못이야…….」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스위트피는 눈치챌 수 있었다. 언니의 이름을 부르던 드래곤과 지금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언니의 사과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언니, 저 드래곤이랑 아는 사이야?」
동생의 눈을 마주하는 에리카의 눈이 잘게 떨렸다. 자신의 죄를 들킨 죄인처럼.
「스윗, 나는……. 아, 앗……!」
「언니……? 왜 그래!」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는 에리카의 모습에 놀란 스위트피가 에리카의 어깨를 붙잡을 때였다.
작은 돌로 쌓은 탑이 무너지듯 너무도 쉽게, 커다란 마구간이 무너져 내렸다. 놀란 말들이 소란을 피우며 달리기 시작했고, 그중 한 마리의 말이 나무판자에 깔려 옴짝달싹 못 하는 한 소녀의 다리를 밟았다.
「아아아악!」
막내딸이라 이제껏 가벼운 꾸중도 들어 본 적 없던 스위트피는 난생처음 겪는 강렬한 고통에 버둥거렸지만 몸을 누르고 있는 판자 더미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각자 도망치기 바쁜 이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스위트피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 줄 사람 또한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자신의 언니를 제외하고는.
「흐윽……. 흐어어엉, 언니……. 언니이…….」
스위트피는 애타게 언니를 불렀으나 자신과 똑같이 판자 더미에 깔려 있는 에리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력한 스위트피와는 다르게 쿵, 쿵, 거대한 울림소리를 내며 다가온 회색 드래곤은 너무나도 손쉽게 판자를 몇 개 들춰내어 그 속에 깔려 있던 에리카를 찾아냈다.
회색 드래곤과 싸워 주던 푸른빛이 돌던 드래곤은 목이 반쯤 잘린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안 돼! 언니……, 언니!」
스위트피가 에리카를 애타게 불렀으나 기절한 에리카는 미동도 없었다. 회색 드래곤은 스위트피의 바로 옆에서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에리카의 왼쪽 가슴에 날카로운 발톱을 찔러 넣었다.
「언…니…….」
드래곤의 발톱에 끌려 나온 것은, 새빨간 심장이었다. 언니의 옷을 적시는 피와 똑같은 색. 스위트피는 눈을 감았다.
부디, 깨어나면 이 모든 것이 지독한 악몽이었기를.
* * *
진정한 악몽은 현실 속에 있었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스위트피는 이웃 마을 사람들에게 구출되었고, 고아원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말에게 밟혀 절름발이가 된 스위트피는 좋은 집에 입양 가지 못하고, 푼돈을 받은 원장에 의해 팔려 가듯 마고 부인에게 오게 된 것이었다.
‘기분 나쁜 생각은 이제 그만하자.’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그때의 일을 수없이 생각한다고 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위트피는 그저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스위트피! 테이블에 식사 놔뒀으니 챙겨 먹고, 또 농땡이 피우지 말고 제시간에 돌아와야 한다. 알겠어?!”
“……네, 부인.”
여느 때처럼 마고 부인이 준 식사를 챙긴 스위트피는 숲속으로 향했다. 그래도 자신을 사람 취급 정도는 해 주는 듯한 남자를 보면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요즘 자신들을 챙겨 주지 않는다며 새들과 꽃들이 서운해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남자도 이곳을 떠난다면 스위트피가 사람과 대화를 나눌 기회는 다신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제 뜻대로 누군가와 만나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야, 스위트피!”
하필이면 남자를 만나러 가는 나무가 우거진 숲의 길목에서 크리스에게 붙잡히고 만 것이다.
“크, 크리스……. 네가 왜 여기에…….”
“요즘 매일 어디로 사라지는 게 수상해서 쫓아와 봤더니만.”
성큼성큼 다가온 크리스가 오늘의 식사가 남겨진 가방을 빼앗으며 비열하게 웃었다.
“가던 길 마저 가. 같이 가 줄 테니까.”
“나, 난 괜찮아…….”
“아, 글쎄 꿀단지라도 숨겨 놓으셨어? 데려다준다는데 왜 말을 안 듣냐.”
“…….”
“네가 매일 도둑고양이처럼 우리 엄마가 챙겨 준 식사를 들고 어디로 가서 누구랑 만나는지, 나도 좀 알자고.”
크리스는 스위트피를 자신의 애완동물이나 장난감인 줄 아는 놈이었다. 예전부터 스위트피가 누군가와 가까워질 거 같으면 온갖 방법으로 치사하게 훼방을 놓고는 했다. 물론 스위트피를 물리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야, 왜 말을 안 하냐고.”
어차피 크리스는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 주지 않으면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스위트피는 남자에게 자신이 크리스에게 구박받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매일 무기력하게 묘비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남자에게 피곤한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스위트피가 선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크리스의 강요에도 스위트피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싫다는 의사 표현만 했다. 역시나 크리스는 스위트피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자 서서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가 너 같은 절름발이를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
“이게 은혜도 모르고 나한테 거역해? 네가 감히 나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 내 허락도 없이?!”
저항도 못 하는 스위트피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크리스의 얼굴은 불곰만큼이나 사납고 포악했다.
“왜? 그때처럼 날 밀치고 도망이라도 가 보시지?”
“이, 이러지 마…….”
“기회를 줄게. 네가 몰래 만나는 그놈한테 날 데려가.”
“시, 싫어…….”
“그럼 여기서 얻어맞을래?”
“그래도 싫어!”
협박과 폭력에도 끝까지 거부하자, 크리스는 시뻘게진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이번에는 진짜 맞겠구나……!’
스위트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악!”
하지만 비명을 지르게 된 사람은 스위트피가 아니었다.
“…….”
조심스럽게 눈을 뜬 스위트피가 가장 먼저 본 것은 거대해 보이던 크리스의 얼굴을 가린 결 좋은 머리카락이었다.
“인간은 암컷이 수컷보다 훨씬 나약하지.”
“으아악!”
항상 무기력하게 앉아 있어서 깨닫지 못했는데, 남자는 크리스보다 훨씬 더 컸다. 키도, 어깨도, 손도.
“너희들의 언어로 설명해 주마.”
남자에게 붙잡힌 크리스의 손이 비틀려 꺾여 있었다. 스위트피가 항상 두려워하던 크리스는 남자에 비하면 보잘것없을 정도로 작고 초라했다.
“신사는 숙녀를 때리지 않는다.”
무력으로 크리스의 손을 꺾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목소리만큼은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선생님처럼 조곤조곤했다.
“으윽! 넌 누구야! 이, 이거 안 놔? 우리 엄마한테 이를……, 으악!”
“알았니?”
“스, 스위트피! 이 남자한테 이것 좀 놓으라고, 으, 악!”
“내가, 알겠냐고, 묻잖아.”
한 음절씩 끊어서 말하는 남자의 말투는 그의 심기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다행히 크리스는 멍청하긴 했지만 자신의 위기를 눈치챌 만큼의 머리는 있었다.
“아,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 손 좀……!”
“다신 이 근처에 오지 않겠다고 약속도 해야지.”
“안 올게요! 다, 다시는 안 올게요!”
그제야 남자가 크리스의 손목을 놔주었다.
“스위트피! 너, 나중에 두고 봐!”
비겁한 크리스는 이 와중에도 남자가 아닌 스위트피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사라졌다.
크리스가 사라지고 이곳에는 이제 남자와 스위트피, 둘밖에 남지 않았다. 남자가 무덤 곁을 벗어난 것은 상당히 특이한 경우였다. 스위트피가 아는 한, 남자는 언제나 그곳을 떠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바람이 불자 남자의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이 잔잔하게 휘날렸다. 천으로 가린 눈이 아픈 듯, 눈가를 가린 남자가 스위트피를 한 번 보고는 인상을 홱 찌푸렸다.
“미안하지만 널 도와준 게 아니야. 시끄러웠을 뿐이지.”
“그래도요!”
“…….”
“그래도, 고마워요…….”
자신이 마고 부인에게 구박받는 것을 보아도, 크리스에게 맞는 것을 목격해도, 사람들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아니라고 하지만 스위트피는 그래도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준 남자가 고마웠다.
“정 고마우면 오늘은 너도 이만 꺼져.”
“…….”
“시끄럽게 짖어 대던 저 수컷 인간 때문에 피곤하니까.”
스위트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크리스에게 시달리느라 슬슬 돌아갈 시간이기도 했다.
“저어, 잠깐만요……!”
항상 까칠하게 굴면서도 정작 스위트피가 그를 붙잡자, 남자는 또 얌전히 서서 기다려 줬다.
사실 전부터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떤 말을 하든 꺼지라고만 하니, 차마 묻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름이 뭐예요……?”
별거 아닌 질문인데도 괜히 긴장됐다. 남자는 한참 동안 말없이 스위트피를 바라보다 미련 없이 돌아서며 모호한 답을 남겼다.
“넌 이미 내 이름을 부른 적 있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땐 이미 남자가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내가 언제 이름을 불렀다는 거지……?’
처음에는 그저 의문만 가득했다. 그러나, 스위트피는 문득 남자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무덤에 가득 피어 있던 꽃.
스위트피가 그 꽃의 이름을 말하자…….
「리시안셔스…….」
꽃은 사람의 형태가 되었다.
남자가 자신과 같은 꽃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괜히 반가워 스위트피는 작게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