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화>
“고마워, 얘들아!”
스위트피는 자신을 도와준 식물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뛰기 시작했다.
연약한 식물들이 덩치 큰 크리스를 오래 붙들고 있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가 다리를 저는 스위트피는 달려 봤자 금방 크리스에게 붙잡힐 것이 뻔했다. 그러니, 크리스가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최대한 빨리 멀리 도망쳐야 했다.
새들이 다시 스위트피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그들은 스위트피를 인간들은 잘 접근하지 않는 깊은 숲속으로 안내했다.
햇빛이 비치는 탁 트인 들판을 지나 나무가 울창해 그늘이 새까맣게 진 숲속에 들어서자 새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스위트피는 그중 가장 큰 나무 밑에 숨어 숨을 죽였다. 그리고 때마침, 서둘러서 뛰어오는 인기척이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제기랄! 스위트피, 이 계집애! 어디로 숨은 거야!”
악에 받친 크리스가 고래고래 내지르는 소리를 들은 스위트피의 어깨가 떨렸다.
이대로 가 주면 좋을 텐데…….
“잡히면 흠씬 두들겨 패 줄 테다!”
애석하게 크리스는 이대로 사라져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쪽으로 오면 어떡하지…….’
실수로라도 크리스를 화나게 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 스위트피는 눈물이 찔끔, 날 거 같았다.
잔뜩 긴장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그때, 어깨에 간지러운 감촉이 들었다. 스위트피가 조심스레 어깨로 시선을 내리자,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날개를 가진 푸른 나비가 부드럽게 날갯짓하며 어느 방향으로 날아갔다.
스위트피는 숨을 죽인 채 저 멀리 있는 크리스의 눈치를 살피며 나비를 따라나섰다. 나비는 숲속의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비야,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근처에 크리스가 보이지 않자, 스위트피는 겨우 나비에게 말을 걸었으나 정작 아름다운 나비는 묵묵부답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멀리 나온 적은 없을뿐더러, 무서운 짐승이라도 만날까 봐 두려워진 스위트피는 되돌아가고 싶어졌다. 아무리 동물과 말이 통한다 해도, 피를 맛보는 짐승들과도 교감이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속으로 계속 따라갈지 말지 고민하던 스위트피는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나비가 의도한 목적지에 도착한 뒤였다.
“…….”
그곳에는 작은 무덤이 있었다. 묘비에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래되고 부식된 흔적이 있어 읽기 쉽지 않았다. 으스스한 느낌을 받기 충분했으나 무덤을 감싸 안 듯 피어 있는 꽃이 그러한 느낌을 희석시켰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무덤에 빼곡하게 핀 꽃은 화려했고 아름다웠다.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니?”
스위트피는 친근하게 꽃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평소 제게 호의적이던 다른 식물들과 다르게 이 꽃은 스위트피에게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마치 깊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스위트피는 꽃에게 대답을 강요하진 않았다. 대신,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잎을 어루만지며 꽃의 이름을 속삭였다.
“리시안셔스…….”
사랑스러운 꽃의 이름을 속삭인 것이 실수였던 걸까. 무덤 곁에 피어 있던 꽃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놀란 스위트피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는 스위트피의 눈앞에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꽃이 사람의 형상이 된 것이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장발의 남자가 묘비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 다친 것인지 한쪽 눈을 하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꽃이었다가 사람이 된 남자는 한쪽 눈은 가리고 있는 데다, 또 다른 한쪽 눈은 감고 있었는데도 아름답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외향을 갖고 있었다.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도자기처럼 매끈해 보이는 피부와 기다란 속눈썹, 그러면서도 어깨는 넓고 다부졌고, 커다란 손등에는 핏줄이 솟아 있었다.
이 수상한 남자는 뭐지. 깨워야 하나…….
고민하던 스위트피는 조심스레 잠들어 있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느리게 뻗어 나간 손끝에 머리카락이 닿은 순간, 남자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아…….”
놀란 스위트피가 다시 손을 물렸을 때, 남자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
“…….”
이제 막 눈을 뜬 남자가 졸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스위트피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뜨자 더욱 아름다운 외향에 놀란 스위트피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꼬마야.”
“네……?”
나지막했지만 잠에서 깨어난 거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낮지만 부드러운 중저음이 얼빠져 있던 스위트피에게 다정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게, 나비가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오다가…….”
“…….”
“…우, 우연히요…….”
“우연?”
되묻는 말에 스위트피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었나…….”
남자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거 같기도, 또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거 같기도 한, 이상한 말을 하더니 다시 스위트피를 힐끔 바라봤다.
“그래서, 날 깨운 게 너인가?”
방금까지 곤히 자던 사람을 깨운 건 사실이기에 스위트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화, 화나게 했다면 죄송해요……. 밖에서 계속 주무시게 두는 건 안 좋을 거 같아서…….”
“귀찮으니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다정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남자는 스위트피를 향해 생긋, 웃어 줬다. 행동을 종잡기 어려운 남자였지만……. 아름다운 외모 때문일까. 가리고 있지 않은 한쪽 눈이 반달로 휘어지자 스위트피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이리 다정한 미소를 보여 준 게 너무 오래전이었던지라 심장 소리의 울림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꼬마야.”
그러나, 남자의 입은…….
“이만 꺼져 줄래?”
얼굴과는 달리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
* * *
다행히 그날, 주점으로 돌아온 스위트피는 크리스에게 얻어맞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제풀에 지쳐 화가 누그러진 크리스가 스위트피를 한 대만 쥐어박고는 그냥 넘어간 것이다.
물론 일손이 필요했는데 어디론가 사라져 농땡이를 피웠다고 마고 부인께 혼나기는 했지만 크리스에게 얻어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날 이후로 지루하고 우울하던 스위트피의 일상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마고 부인이 챙겨 주는 아주 소량의 식사를 절반으로 나누어 숲으로 향하는 일이었다.
오늘도 스위트피는 자신의 형편 없는 식사를 함께 나눠 먹기 위해 남자를 찾아갔다.
“저, 저기…….”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스위트피가 소심하게 남자를 부르자, 언제나처럼 묘비에 기대어 무덤을 지키던 남자가 지긋지긋해하는 기색으로 스위트피를 바라봤다.
“여긴 그만 오라고 했을 텐데.”
“그치만…….”
“용건 없으면 이만 꺼져.”
남자는 이제 겉으로나마 웃어 주던 얼굴은 보여 주지 않았다. 오늘은 유독 짜증스러운 얼굴로 꺼지라 했지만, 저런 남자의 반응에 익숙해진 스위트피는 전만큼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거기다가 무엇보다 남자는 마고 부인이나 크리스처럼 스위트피를 때리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제게 살가운 말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모욕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스위트피가 남자를 찾을 이유는 충분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스위트피를 절름발이라고 안쓰러워하거나 만만해하거나 둘 중 하나였기에 외려 스위트피가 그들을 불편해했다. 아주 가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호의적인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있어도 크리스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고 부인의 외동아들인 크리스는 소유욕이 강해서 스위트피가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식물, 동물들이 있어서 외로움은 덜했으나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마고 부인께서 스튜를 만들어 주셨어요. 만들다가 탄 거긴 하지만 맛있을 거예요……!”
사실 남자는 스위트피가 나눠 준 음식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다. 몇 번 더 권유해도,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만 돌아올 뿐이었다.
물론 마고 부인이 스위트피에게 주는 음식은 대개 손님들이 남기거나 실수로 태워 버린 음식이라 당연할 수도 있는 반응이지만 말이다.
“하…, 꺼지라니깐.”
남자는 피곤한 듯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이를 갈았지만 스위트피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러긴커녕, 오히려 타지 않은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빵을 남자에게 슬쩍 내밀었다.
하, 황당해하는 남자의 비웃음이 들렸지만 이번에도 스위트피는 부정적인 반응은 못 들은 체했다.
“꼬마, 넌 내가 안 무서운가 보다?”
“…….”
“내가 무서운 괴물이면 어쩌려고.”
“…잖아요.”
“뭐? 안 들려.”
소심하게 웅얼거리며 대답하던 스위트피가 용기 내어 크게 말했다.
“절 안 때리잖아요.”
“…….”
“그러니까, 꺼지라고 하는 것 정도로는 안 무서워요.”
당돌하게 말해 놓고 다시 남자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비에 젖은 소동물처럼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는 아이였다.
스위트피가 학대당하고 있을 거란 사실은 매일 보이는 새로운 멍으로 인해 남자도 이미 알고 있던 바였다. 굳이 끼어들 이유가 없으니까 아는 체하지 않았을 뿐.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저번에 너무 늦어서 마고 부인에게 혼났거든요.”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읊은 소녀는 남자가 먹지도 않을 음식을 남겨 둔 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성치 않은 다리로 황급히 달려 나갔다.
남의 무덤 앞에서 소풍 온 것처럼 식사하고, 수상한 자의 정체를 묻지도 않고, 쓸데없이 예의 바른 소녀.
요즘 인간들은 다 저렇게 독특한가.
한참 어린 인간 소녀가 피곤했던 남자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부드러운 초록 잎이 도는 무덤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 * *
이제 30분 후면 이 마을에 딱 하나밖에 없는 주점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뒷정리와 마지막 설거지는 언제나 스위트피의 몫이었기에 오늘도 스위트피는 비어 있는 테이블의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는 단골손님들만 빼면 모든 테이블은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였다.
스위트피가 일하는 동안 마고 부인은 단골손님들의 옆에 앉아 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 오늘 아침 신문 봤어요?”
“오늘 무슨 재미있는 소식이 있었나 보구려.”
“이 사람은 신문도 안 보고 말이야! 세상 돌아가는 얘기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바빠 죽겠는데 여유 있게 글자 나부랭이를 읽을 시간이 어디 있어?”
술에 취한 그들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컸기 때문에 듣고 싶지 않아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 요즘 드래곤 목격담이 그렇게 들린담서?”
차례대로 그릇을 쌓던 스위트피의 손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예끼! 이 사람아! 어린애들도 아니고 유치하네!”
“아, 진짜라니까? 수도에서도 드래곤을 봤다는 사람들이 있어. 옆 나라에서도, 그 옆 나라에서도! 요즘 심심치 않게 목격담이 들린다니까?”
“드래곤이 어디 있어. 다 신화 속 동물일 뿐이지.”
“그래도 우리 조상들은 드래곤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거지. 이 세상에 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
“아, 자네는 무교라 그랬지!”
굳어 있던 스위트피가 다시 움직인 것은 농땡이 피우지 말라는 마고 부인의 으름장을 듣고 나서였다. 테이블마다 돌며 그릇을 치우는 것은 다리가 불편해 느릴 수밖에 없지만 가만히 서서 하는 설거지는 서둘러서 끝낼 수 있었다.
일을 끝낸 스위트피는 곧장 위층 다락방으로 올라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불로 덮어 버렸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드래곤에게서 숨어야 할 것만 같은 초조함이 들었다.
스위트피는 아까 손님들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글쎄, 요즘 드래곤 목격담이 그렇게 들린담서?」
「예끼! 이 사람아! 어린애들도 아니고 유치하네!」
‘그건 소문이 아닐 거야.’
사람들은 그저 허황된 소문으로 여기겠지만, 스위트피는 안다. 드래곤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봤어.’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인데도 스위트피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드래곤이 자신의 마을을 파괴하던 그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