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비가 오려나 보다, 생각했었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전부 뒤덮을 만큼 가득 몰려온 먹구름이 변방에 있는 작은 마을을 어둠으로 뒤덮었다. 갑작스럽게 어두워진 하늘은 비가 올 징조인 것을 제외하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만, 바로 낮에만 해도 비가 올 날씨가 아니었던지라 로렌 부인은 빨래를 걷으면서도 다소 의아해하긴 했다. 그러나 몰려온 먹구름에 대한 의문은 잠시뿐이었다.
“엄마!”
앞마당에서 급히 빨래를 걷던 로렌 부인은 해맑은 막내딸이 마당으로 나오려 하자 황급히 만류했다.
“스위트피! 혹시라도 비를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어서 들어가서 에리카와 놀고 있어.”
언니와 놀고 있으라는 말에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스위트피가 맨발로 앞마당에 나가려고 할 때였다.
“스윗.”
스위트피는 뒤에서 부드럽게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언니!”
로렌 부부의 첫째 에리카가 동생을 안아 들었다.
“엄마는 일하시느라 바쁘니까, 언니랑 놀자.”
“그치만 나는 엄마랑 있고 싶은데…….”
떼쟁이 동생의 투정이 익숙한 에리카는 스위트피의 귓가에 아주 큰 비밀을 털어놓기라도 하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언니랑 놀면 엄마 몰래 초콜릿도 나눠 줄 건데?”
“……초콜릿?”
“쉿, 엄마가 듣잖아.”
“헙!”
“그리고 스윗이 듣고 싶어 하는 재미난 얘기도 잔뜩 들려줄게. 우리 스윗은 비밀스러운 샘의 정령과 불을 내뿜는 새처럼 신비한 이야기를 좋아하잖아.”
“응! 언니가 해 주는 얘기는 다 좋아! 재미있어!”
“오늘은 어떤 얘기를 해 줄까?”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듯 곰곰이 생각에 잠긴 스위트피의 머릿속에는 엄마를 성가시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까맣게 지워진 지 오래였다. 약 10초간의 고민 끝에 스위트피는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드래곤에 대해 듣고 싶어!”
“……드래곤?”
“응! 엄청 크고 무섭다는데, 아빠는 내가 밤에 못 잘까 봐 드래곤의 신화를 알려 주지 않을 거래.”
“그럼 아빠 대신 언니가 들려줄게.”
사랑받는 것이 익숙한 스위트피는 자신의 뺨에 쪽, 입을 맞추는 언니의 입술이 간지러워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내 스위트피는 바쁜 엄마를 두고 언니의 품에 안겨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솨아아-
갑자기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로렌 부인의 손에 있던 얇은 이불이 바람에 저 멀리 날아가고, 달을 가리던 구름이 물러가며 마침내 마을에 달빛이 내려왔다.
세 모녀 중 ‘그것’을 먼저 발견한 것은 스위트피였다.
피부를 베어 버릴 듯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결에는 어린아이가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기묘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땅이 웅웅, 소리를 내며 울렸다. 집 담벼락을 타고 있는 넝쿨이 스위트피에게 외쳤다.
[도망쳐! 도망쳐야 해!]
하지만 스위트피가 바람으로부터 자신을 감싸는 에리카의 어깨 너머로, 회색빛이 도는 거대한 새가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엄마! 언니! 저것 좀 봐!”
로렌 부인과 에리카가 바람결에 머리를 흩날리면서도 스위트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스위트피는 언니와 엄마가 ‘그것’을 확인하고 눈이 커진 순간, 깨달았다.
저것은 새가 아니며, 순식간에 마을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존재가 작은 산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을.
“에리카, 스위트피! 도망쳐!”
순식간에 마을에 당도한 드래곤이 입을 벌린 순간 로렌 부인이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도망칠 수 없었다. 드래곤의 거대한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 딸들을 향해 도망치라고 외치는 로렌 부인을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엄마!”
스위트피가 불길 속에 사라진 로렌 부인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자신을 안고 달리는 언니의 품속에서 엄마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날이 스위트피가 마지막으로 엄마를 본 날이며…….
“미안해, 스윗. 내가 미안해…….”
모든 가족과 영원히 헤어져야 했던 날이기도 했다.
* * *
“스위트피 로렌! 이 게으른 녀석!”
마고 부인의 우악스러운 주먹이 스위트피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엄살 부리는 아이를 싫어하는 마고 부인을 알기 때문에 스위트피는 이를 악물고 앓는 소리를 참아 냈다.
“우물가에서 물 좀 길어 오라고 시켰더니, 돌아오는 길에 물을 다 엎질렀다고 거짓말을 해?”
“거, 거짓말은 아니에요…….”
“또 변명이지? 또?!”
“윽……!”
화를 못 이긴 마고 부인이 무려 세 번을 연달아 스위트피의 머리를 내리쳤다.
애초에 아직 어린 스위트피가 혼자서 커다란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길어 오는 것부터가 무리인 일이었다. 그동안은 마고 부인에게 혼나지 않으려 어떻게든 물을 길어 왔지만, 오늘은 마고 부인의 아들인 크리스의 못된 괴롭힘에 걸려 물을 엎지르고 말았다.
사고로 다리를 저는 스위트피에게 성장이 빠른 남자애가 발을 걸어 넘어뜨리니, 피할 방도 따위는 없었다.
“내가 뭣 때문에 너를 먹이고 입히고 재운다고 생각하는 게야? 일손이 부족해서 데려온 건데 매번 일을 더 만들기나 하고!”
“죄, 죄송해요…….”
“어휴, 불쌍한 고아를 거둬 주면 제 밥값은 할 줄 알았지……. 맨날 불쌍한 척 다리를 절뚝거리는 거나 할 줄 알지, 어쩌면 이렇게 할 줄 아는 일이 하나도 없는지…….”
“…….”
“뭐 하고 서 있어? 곧 손님들 올 시간이니까 썩 꺼져!”
스위트피는 마고 부인의 눈치를 살피며 낡은 주점을 나섰다. 마고 부인은 아까 본인이 말했던 대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스위트피를 보고는 꼴 보기 싫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스위트피가 밖으로 나오자 서너 마리의 참새가 날아와 스위트피의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중 한 마리는 스위트피의 눈높이에 맞춰 날며 그녀의 코에 작은 부리를 비볐다.
“난 괜찮아, 얘들아.”
스위트피는 마고 부인을 마구 욕해 주는 참새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때마침 바로 곁에 있던 작은 꽃이 스위트피의 발목에 꽃잎을 비벼 왔다.
“위로해 줘서 고마워, 제비꽃아.”
스위트피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제비꽃의 연약한 꽃잎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질투한 참새들이 스위트피의 머리카락을 부리로 물고 잡아당겼다.
남들이 본다면 희한한 모습일 것이다. 이것은 마고 부인의 말대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스위트피가 가진 유일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재능’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위트피는 자연의 일부인 동물, 식물과 교감이 가능했다. 그들의 마음을 읽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가족들은 스위트피가 어리고 상상력이 많아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과의 대화는 스위트피의 상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아마 이미 죽은 가족들은 영영 모를 사실이지만 말이다.
주점의 창고 근처로 간 스위트피는 잔디밭에 누워 식물들의 위로와 동물들의 귀여운 재잘거림을 들으며 몇 안 되는 자유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야, 절름발이!”
그러나 스위트피가 조금이라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마뜩잖아하는 방해꾼의 등장으로 즐거운 시간은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마고 부인의 아들,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스위트피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여유롭게 누워 있다가 크리스에게 갈비뼈를 걷어차이는 일은 극구 사양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이야, 고아 주제에 여유롭게 처 누워 있는 거야?”
스위트피의 주변에 몰려 있던 동물들은 호전적이고 드센 크리스를 피해 모두 달아나 버렸다. 꽃들과 풀들은 크리스와 둘만 남은 스위트피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땅에 못 박힌 존재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야, 또 내 말 무시하냐?”
“그, 그런 거 아니야……. 할 일이 끝나서, 부인께서 나가 보라고 하셔서, 그래서…….”
“넌 진짜 눈치도 없다.”
크리스가 혀를 쯧쯧 차며, 거리를 좁혀 왔다. 스위트피는 절뚝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보다 크리스의 속도가 더 빨랐다.
“화재 사고로 가족도 잃고 마을도 잃은 널 거둬 준 게 우리 엄마인데, 쉬란다고 진짜 쉬고 싶냐? 양심이 없는 거냐, 눈치가 없는 거냐?”
“…….”
“하긴. 축제한답시고 마을을 홀랑 불태울 만큼 불을 지핀 멍청한 마을 출신답지만.”
크리스의 마지막 말에 스위트피는 감정이 울컥 치솟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스위트피의 마을에서 난 화재 사건에 대해 축제를 하다가 큰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정리해 버렸다. 그날 작은 축제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 화재는 축제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위트피는 그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설 속의 드래곤이 나타나 마을을 덮쳤다니…….
그 누구라도 황당해할 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스위트피는 고아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다리를 저는 아이를 데려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주점의 일손이 부족했던 마고 부인이 저렴한 가격으로 스위트피를 데려온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이 집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는 스위트피는 마고 부인이 매번 억울한 일로 자신을 혼내고, 크리스가 이유 없이 자신을 괴롭혀도, 꾹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반응을 안 하니까, 내가 재미가 없잖아.”
“…….”
“야, 야!”
크리스가 일부러 아프게 스위트피의 볼을 꼬집었다. 그제야 스위트피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들자, 크리스의 얼굴에 만족감이 피었다.
“이런 처지를 탓하려거든 네 부모를 탓해. 딸을 두고 먼저 뒈진 사람들이 잘못한 거잖아?”
이제껏 크리스의 괴롭힘을 홀로 견디어 왔던 스위트피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오래되었어도 스위트피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 주었는지 말이다.
“우리 부모님은 그런 사람들 아니야!”
“뭐?”
그런 부모님을 욕하다니. 더군다나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매일 자신보다 약한 사람한테 시비 거는 게 전부인 크리스라 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정도로 잘못하신 거 없어!”
“너, 지금 돌았냐?”
“우리 부모님 욕보인 거, 취소해!”
“싫다면?”
“그, 그럼…… 나도 너한테 심한 말 할 거야!”
“그럴 배짱이나 있으면 어디 한 번 지껄여 봐.”
크리스가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렸지만 스위트피도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스위트피는 겁을 먹어 어깨를 떨면서도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크게 내질렀다.
“바보! 멍청이! 덩치만 큰 고릴라!”
스위트피의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지고, 적막감이 돌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스위트피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얼굴이 시뻘게진 크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고분고분하게 굴면 봐주려고 했더니, 이 계집애가!”
마고 부인만큼이나 커다란 크리스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스위트피는 아무것도 못 한 채로 굳어 버렸다. 그러나, 크리스의 손은 스위트피의 얼굴을 내리치지 못했다.
“으악!”
어쩐 일인지 크리스가 바닥에 철퍽, 엎어진 것이었다. 스위트피는 얼마 안 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풀과 꽃들이 크리스의 양쪽 발목을 밧줄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그들이 스위트피에게 외쳤다.
[우린 얼마 버티지 못하니까 어서 도망쳐, 스위트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