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01.
“디아!”
마일의 어린 꼬마는 며칠 전부터 저렇게 나를 쫓고 있었다. 얼마 전에 내가 다친 강아지를 치료해줬더니 좋다고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만 쫓아올래?”
“이거 드세요!”
북부에는 겨울이 오면 먹을 것이 부족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산에서 캐 먹거나 귀족의 밑에서 일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사내들이 목숨을 걸고 괴이한 짐승을 잡아 오곤 했다.
다들 금화가 무언지도 모르고, 돈보다는 식량을 우선으로 하는 곳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는 외지인이 거의 없이 다 아는 사이였다. 그 때문에 처음 이곳에 정착하고자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꽤나 많은 배척을 견뎌냈어야 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음식을 한 다음에 집집마다 나누어줬지만 우리 집은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어쩌다가 수확한 농작물도 우리 집만은 건너뛰었고. 내가 혼자 집에서 공부하는 처지인지라 말은 못 했지만 서러웠다. 가끔 훌쩍이며 울 때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치유에 대해서 독학을 했을 때. 이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로브스 씨의 다리를 고쳐주고 나서야 한층 신임을 받았다. 이래저래 부대껴 산 지 몇 달이 넘으니 우리 집에도 찐 감자 같은 것을 가져다주는데.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기뻐서 엉엉 울고 말았다. 고작 감자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마일이 주는 토마토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여기서는 돈을 낼 수가 없으니 먹을 것으로 감사를 표하곤 했다. 토마토를 얻어온 것을 보니까 장터에 내려갔다 올 일이 있었나 보다. 나는 토마토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요리를 생각해 보았다. 상상만으로 군침이 돌았다.
키르얀은 토마토를 좋아할까? 군소리 없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는 하는데 한 번도 맛있다든지, 맛없다든지 그에 관해서 말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먹기에는 그럭저럭 먹을 만한데 키르얀한테는 맛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다 같이 긴털 여우를 잡으러 간다고 했지.
혼자 이 북쪽으로 와서 그를 찾고, 산속에서 짐승 잡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수소문하는 데에만 나는 가지고 온 경비를 다 썼다. 다행히 키르얀은 이방인이라서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아직도 북부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서부에서 나올 때 경비를 조금 더 많이 마련해서 도망칠 것을 그랬다. 아쉽게도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았던 탓에 이것저것 쓰고 나니까 남은 것은 이 오두막 하나를 구할 돈이었다. 더 큰 집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키르얀이 아직도 짐승 사냥을 다니는 것을 보니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도 치유원에 들어가지 못했다. 일단 책을 가지고 독학만 하는 처지라 아직 본격적으로 돈벌이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방인과 누가 봐도 아랫지방에서 올라온 것 같이 생긴 아가씨. 마을 사람들은 퍽 이질감이 느껴지는 우리의 조합에 거리를 뒀다. 키르얀이 짐승 사냥에 참여해서 많은 보수를 받게 도와주고, 그나마 내 능력이 쓸 만은 하니 받아주고는 있지만.
이게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히 작은 마을이라서 딱히 소문날 곳은 없으나 할아버지가 나를 포기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내 시신이라도 발견돼야 멈추실 분이었다. 한곳에 오래 정착하는 것은 좋지 않고. 내후년이면 따로 떠날 곳을 알아봐야겠다.
그 아이는 잘하고 있으려나. 섬의 야만인들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게 서부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여기는 북부였고, 자신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는 오래 떠드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북부의 예레카가 누구인지도 희미한 사람들한테 서부의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은 안 되겠다 싶었다.
짤랑, 종소리가 울렸다. 토마토를 씻으며 멍 때리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그제야 바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털옷 끝자락에 피가 묻어 있는 키르얀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키르얀.”
다행히 오늘은 다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짐승을 사냥하고 고기를 얻어온 듯했다. 키르얀은 내가 씻고 있는 토마토를 보고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마일이.”
‘강아지를 고쳐줬다고 이런 것까지 줬지 뭐야.’라고 작게 얘기하면서 토마토를 씻었다. 내 등 뒤로 그의 발이 다가왔다. 등 뒤에 서고, 찬물에 토마토를 씻고 있는 내 손을 덮었다. 그는 이렇게 내가 음식을 하거나, 옷을 기워 입거나,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음식을 얻어오면 항상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얼른 가서 씻어. 물 덥혀 놓았어.”
나는 애써 밝은 척하며 구석에 놓은 물그릇을 가리켰지만 키르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머리칼과 목선에 코를 박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할게.”
그는 잠시 나의 머리칼에 기대어 향기를 맡더니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으나 키르얀은 힘으로 나를 들어버렸다. 부엌 한가운데에 두었다.
그는 우선 겉옷을 벗고 와 토마토를 씻으면서 내게 물었다.
“무슨 요리를 하게.”
그것까지 생각해 둔 적이 없던 나는 곰곰이 머릿속에서 떠올려 보았다. 지난번에 밀가루 받아둔 것으로 만든 빵이 있으니까. 치즈도 있었고.
“빵에 얹어서 먹을까? 치즈하고 같이.”
키르얀은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서 토마토의 꼭지를 땄다. 작은 칼을 꺼내어 얇게 토마토를 자르려는 키르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이드리하임에서 그를 만난 날이 떠올랐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를 토끼숲에서 보게 된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경비에서도 쫓겨나 갈 데가 없어진 그가 숲지기에 지원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이 나쁜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먼 발치에서라도 나를 보고 싶은 마음이었고, 나는 양배추를 사서 귀여운 토끼에게 전달하려고 했었다.
처음에 키르얀을 보았을 때는 나는 이야라를 떠올렸다. 이야라도 소매치기를 하면서 자랐다고 했는데 마침 키르얀도 소매치기를 하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한바탕 죽음이 되기 직전까지 맞은 다음에 나의 마차로 숨어들었다.
그때의 나는 한창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나 할아버지의 관심은 온통 이야라에게 쏠려 있었고, 나는 그것이 당연한 일인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외롭고 쓸쓸했다. 차라리 나의 친어머니라는 사람이 나를 바꾸지 않고 그저 데려다 키웠으면 좋았을걸. 남몰래 임신해서 해산하는 날까지 아무도 존재를 몰랐던 내가, 이야라를 대신하고 그 자리에 가서 큰 내가 끔찍스러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예레카가 되면 마음고생 좀 하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에도 그저 웃어넘기기 일쑤였는데. 그래서 한 가지 생각을 해보자면 그랬다. 하녀였던 어머니가 내 몸을 걱정해서 이야라와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야지 나는 조금이라도 덜 쓸쓸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의 이름부터 이야라의 것이었다. 나의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심지어 나의 것이 아닌데도 잃으면 마음이 아팠다. 나는 더는 그 끔찍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키르얀만은 나를 바라본다. 예레카였던 사람도 아니고, 하녀의 딸도 아니고, 그저 나는 한 여자로서 키르얀의 앞에 설 수 있었다. 키르얀은, 우리는 서로밖에 없었다.
키르얀은 이방인 무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나는 그저 가문의 딸로서 살아가지 않기를 원했다. 서로가 원해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인데도 키르얀은 처음 만났을 때는 나를 돌려보내려고 했다.
‘돌아가.’
먼지가 쌓인 배의 짐칸에 타고 왔다. 북부에 오자마자 사기를 당할 뻔하고, 겨우 의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산에서 짐승을 잡고 다니는 그를 찾아낸 것이었다. 남은 돈도 별로 없고 너무 추웠고 배가 고팠다. 나는 나를 밀어내는 키르얀의 앞에서 울면서 한마디를 했다.
‘그러면 나 먹을 것 좀 줘.’
정말 배가 고파서 눈에 뵈는 게 없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키르얀은 그런 내가 안쓰럽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거둬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처음으로 나를 그의 옆에 가만히 두었다. 우리가 같이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나보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다. 자신이 먹여 살리겠다며.
그러니 내가 뭐를 조금 하려고만 해도 저렇게 질색을 하고 나선다.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도 그는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키르얀의 등 뒤로 가서 그를 안았다.
“같이 해. 같이.”
“앉아 있어.”
우리는 우리밖에 없었다. 이 겨울 산만 있는 황량한 북부의 마을에 있었지만 나는 그 어느 호화로운 성에 사는 것보다 마음이 행복했다. 드디어 나의 안락을, 행복을 찾은 것이다.
“장작 좀 더 가져올까?”
문득 할 일이 생각 난 나였다. 나는 키르얀이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기 전에 재빨리 문밖으로 나갔다. 걸어 둔 털옷의 눈을 털며 입고 나가려는데 키르얀이 나를 불렀다.
“내가 할게.”
그 말을 할 줄 알았지. 나는 웃으며 마른 땔감을 쌓아놓은 곳으로 향했다. 가지고 가려는데 저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히잉, 우는 말의 울음은 이 마을에서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나무에 가려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임을 알아챘다. 장작을 놓고, 천천히 숲으로 걸어갔다.
이파리 하나 나지 않는 검은 나무가 빽빽한 숲이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아는지 점점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에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누군가 나를 데리러 온 것임을 알았다. 안 돼. 만약 할아버지 앞에 키르얀이 끌려가면 그는 죽는다. 나는 다급하게 뒤로 돌았다. 검은 나무가 가득한 숲을 빠져나왔다. 눈이 푹푹 밟히는 길을 뛰어갔다.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치며 안락한 오두막 앞으로 갔을 때. 나는 문 앞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보았다. 자그마한 상자였다. 두려운 마음에 키르얀을 부르며 뛰어갔다. 저 안에 키르얀의 머리라도 들어 있으면 어떡하지 싶었다.
“키르얀!”
촛불이 켜진 오두막의 문이 곧바로 열렸다. 칼을 든 키르얀이 문 앞으로 뛰어나왔다.
“키르얀. 무슨 일 없어?”
키르얀은 달려오는 나를 보고서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에 발에 걸리는 상자를 보았다. 어려움 없이 그것을 들었다.
“이게.”
“뭔가 이상해.”
나는 불안에 떨면서 그 상자를 보았다. 말의 소리, 상자. 이미 나의 위치를 알고 있는 할아버지가 경고차 보내온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키르얀은 먼저 그 상자를 열었다.
“아…….”
상자 안에는 화려한 패물들이 있었다. 브로치, 귀걸이, 팔찌, 그리고 귀부인의 장갑까지. 모두 하나같이 귀한 것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나는 키르얀에게서 상자를 받아들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키르얀은 그런 나를 다급하게 일으켰다.
“왜 그래.”
나는 일어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리는 흰 눈에 발자국이 다 사라져 있었다. 어디였을까. 어디서 나를 지켜보셨을까.
“어머니…….”
저 장갑, 귀걸이, 목걸이, 팔찌…… 전부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것이었다. 평상시 자주 차고 다니는 것이었다. 상자 안에 다급하게 이것을 벗어 넣으셨을 어머니를 생각하자 나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흰 눈에 눈물이 떨어져서 녹았다. 키르얀은 내 옆에서 무슨 상황인지 대강 파악한 것 같았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그 상자에 눈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히 닫아서 내게 건넸다.
“들어가자.”
키르얀을 만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에, 할아버지의 마음에, 이야라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것은 내내 괴로웠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후회됐다. 조금 더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든 걸, 그것만을 기억할걸. 왜 나는 항상 이렇게 지나고 후회하는 걸까.
어머니의 장갑을 꺼내어 남아 있는 온기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다시 오실 것이다. 다음에 오시면 꼭 차를 대접해 드려야지. 내가 공부하고 있는 성과도 보여드려야지. 나는 장갑을 가슴에 안고 다짐했다.